연주에 진심인 바이올리니스트 김다미가 지향하는 삶에 관한 대화.
누구보다도 무대에 진심인 바이올리니스트 김다미는 지난 5년 사이 교수로서, 연주자로서 최선을 다해왔다. 적지 않은 부침을 겪기도 했지만 보다 확실해진 것도 있었다. 바이올린과 함께 보다 오래도록 살아가는 법을, 누구보다 잘 알게 됐다.
오늘 함께 촬영한 바이올린은 요즘 각광받는 모던 악기 제작자 스테판 폰 베어에게 주문한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사용한 지 4년 정도 됐는데 모던 악기를 길들이는 과정이 처음이라 조금 만만치 않았지만 이제 악기 소리가 좋아진 것 같다는 피드백도 받고, 나름 만족스럽게 쓰고 있어요. 요즘은 개인적으로 모던 악기를 주문하는 연주자가 많이 늘어난 거 같아요. 심지어 유명 제작자의 모던 악기를 투자 목적으로 구매하는 분들도 있어요. 제작자가 살아있어도 1년에 한 번씩 가격이 오르거든요. 악기를 구매하면 주기적으로 악기 점검과 수리를 받는데 얼마 전 프랑스를 방문해 점검을 받을 때 듣기로는 제 악기도 작년보다 2만 유로 정도 올랐더라고요.
귀한 정보네요.(웃음) 과거 콩쿠르 수상 자격으로 대단한 올드 악기를 대여받아 사용하셨잖아요. 과다니니나 스트라디바리우스, 도미니쿠스 몬타냐나 같은, 하나 같이 훌륭한 명기로 꼽히는데요.
지금까지 대여받아 연주에 사용한 악기는 스트라디바리우스 두 대와 도미니쿠스 몬타냐나 한 대였고, 과다니니는 콩쿠르 우승 자격으로 대여받았지만 스트라디바리우스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연주하진 않았어요. 그렇게 세 대의 올드 악기를 거쳐왔죠. 몇 백 년에 걸쳐 수축하고 팽창하는 과정을 거친 완성형 악기라 어떤 식으로든 특별한 경험이었어요. 다만 대여받은 지 2년이 지나면 돌려줘야 하니까 악기와 친해지고 좀 적응했다 싶으면 쓸 수 없는 고충이 있어서 개인 악기를 주문했어요.
지난 5년 사이 많은 일이 있었군요. 새로운 모던 악기를 주문했고, 새 앨범도 발매했고, 서울대 음악대학 관현악과 교수로 임용됐습니다. 서울대 최연소 교수라고 들었는데 교직 생활은 어떤가요?
익숙하지 않은 일이라 좌충우돌하듯 시작했죠. 연차가 많은 교수님들에 비하면 덜하지만 회의도 많고, 행정일도 미숙하니까 적응하기가 수월하진 않았어요. 여행을 못해서 힘들기도 했어요. 팬데믹 기간과 겹친 탓도 있지만 평소 여행을 통해 기분을 환기했는데 좀처럼 시간이 나질 않아 여행을 갈 수 없어서 한동안 연습할 의욕도 떨어지고 매너리즘에 빠진 거 같아요.
보스턴 뉴잉글랜드 음악원 시절 미리암 프리드의 사사를 받았습니다. 미리암 프리드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여성 최초 우승자이기도 하고, 그전에 프레미오 파가니니 국제 콩쿠르도 우승한, 대단한 족적을 남긴 여성 바이올리니스트죠. 그전에 커티스 음악원 진학 당시 아론 로잔느의 사사를 받은 것으로 아는데, 그 역시 당대의 비르투오소로 꼽힙니다. 두 분의 지도 스타일은 어땠나요?
아론 로잔느 선생님은 굉장히 엄한 편이었어요. 가끔씩 과격한 발언을 하시기도 했는데 아마 요즘 시대라면 문제가 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였고, 그로 인해 자신감이 바닥으로 떨어지곤 했어요. 그런데 대학에 진학한 뒤 미리암 프리드 선생님을 만나서 자신감을 많이 회복했죠. 처음에는 칭찬을 받는 게 어색했는데 덕분에 연주에 대한 즐거움을 되찾았어요.
어쩌면 지금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그런 경험을 대입해보고 있는 것 아닐까요?
맞아요. 제 음악 인생이나 생활 태도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미리암 프리드 교수님 생각을 자주 하죠. 바이올린 수업은 대부분 1대 1로 진행하니 선생님 영향을 굉장히 많이 받거든요. 단순히 기술이나 실력 문제를 넘어 자아 형성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 거죠. 누구에게 어떻게 배우는 가에 따라 자신감도 달라지고요. 학생들마다 성향도, 성격도 다르고 실력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잖아요. 그래도 서울대에 입학한 친구들은 평균 이상의 실력을 갖춘 편이라 연주 실력을 나무랄 일은 별로 없지만 성격이나 태도에 따라 달리 접근하게 돼요. 어떤 친구에게는 좀 더 엄할 수밖에 없고, 어떤 친구는 좀 더 구슬려보고, 그러다 보니 한 명 한 명 다 지도하는 게 쉽지 않죠.
클래식 팬들에게 김다미 씨는 연주 활동에 매진하는 연주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만큼 연습량도 상당한 편일 텐데 교직 생활과 연주 활동을 병행하는 것도 만만치 않을 거 같아요.
직업 교수가 되면서 연습량은 어쩔 수 없이 줄었지만 생각해 보면 20대 때는 필요 이상으로 연습했던 거 같아요. 보다 완벽한 연주를 해야 한다는 강박이 상당했죠. 콩쿠르 출전 경험이 몸에 밴 시절이기도 했고요. 이제 그런 압박감을 내려놓아도 되겠더라고요. 물론 가급적 완벽한 연주를 들려줘야 하겠지만 무대에서 좀 더 자유로워지고 싶어요. 그래서 예전보다 연습을 더 못하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는 많이 덜어냈어요. 물리적으로 연습 시간을 마음껏 쓸 수 없으니 시간을 정해 최대한 효율적으로 연습하는 패턴에 익숙해지고 있죠. 이제는 좀 더 행복하고 자유롭게 음악을 하려고 노력 중이죠.
지난 2022년 두 번째 앨범 <TIMEPASS>를 발매했습니다. 타이틀부터 ‘시간 죽이기’라는 의미를 가진 앨범인데 스스로 ‘소품집’이라 규정했더군요.
원래 처음 염두에 둔 타이틀은 ‘Consolation(위로)’이었어요. 팬데믹으로 고통을 받던 시기에 기획한 탓인지 시대적인 분위기를 의식한 제목을 떠올린 거 같은데 뒤늦게 너무 뻔한 타이틀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즉흥적으로 변경했죠.
차이콥스키와 조지 거슈인, 슈만과 비탈리까지, 다섯 곡의 연주곡이 수록된 앨범인데 소품이라 하기엔 나름 무게감이 있는 곡도 있습니다. 시대적으로도 다양하고요. 부클릿을 읽어보니 곡들마다 개인적인 사연도 있더군요. 덕분에 에세이집을 읽듯 앨범을 감상하게 된 거 같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개인적인 의미가 있는 곡들로 트랙리스트를 꾸렸어요. 다만 소품집을 만든다고 해서 앙코르곡으로 자주 연주하는 짧은 곡을 모을 생각은 없었고요. 러닝타임 면에서도 그렇고, 어느 정도 무게감이 있는 소품집을 만들어보고 싶었죠. 앨범을 듣는 분들이 가볍게 위안을 얻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시간 죽이기’라는 제목을 붙였고요. 무엇보다도 과거 20대 시절에 자주 연주한 곡들을 마지막 기록처럼 남기고 싶다는 생각으로 구성한 트랙리스트이기도 해요.
그래서 굉장히 사적인 앨범처럼 보이기도 하는데요. 아무래도 팬들은 그래서 더 좋아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예를 들어 차이콥스키의 ‘소중한 곳의 추억’은 사사를 받았던 아론 로잔느의 연주를 통해 처음 접하게 된 곡이었다는 설명을 읽고 연주를 듣게 되면 연주자의 개인적인 감정이나 삶까지 받아들이는 기분이 들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렇게 봐주시면 감사하죠.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로잔느 선생님 사사를 받을 때에는 자신감이 바닥이었고 굉장히 힘든 유학 생활을 했기 때문에 솔직히 남기고 싶은 기억이 별로 없을 정도로 아픈 손가락 같은 시간이었어요. 물론 로잔느 선생님도 미리암 선생님만큼 저에게 큰 영향력을 남겨준 스승이라 고마운 마음도 상당하죠. 다만 그 시간이 마음 아프게 다가와서 ‘소중한 곳의 추억’을 들을 때마다 복잡한 감정이 드는 것 같아요. 그런 감정이 녹음에도 반영됐을 거예요. 그래서인지 계획과 달라진 부분도 있어요. 원래 마지막곡인 비탈리의 ‘샤콘느’를 1번 트랙으로 수록할 메인곡이라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녹음하고 보니 ‘소중한 곳의 추억’이 너무 괜찮은 거예요. 그래서 톤마이스터(Tonmeister) 선생님이 이 곡을 1번으로 가는 게 어떻겠냐 제안했고 저도 동의해서 변경했죠.
바로크 음악인 ‘샤콘느’가 첫 트랙이었다면 보다 화려한 연주로 시작되는 앨범이 됐을 테니 지금과는 조금 다른 감상이 남았을 거 같아요. 개인적으로는 서정적인 ‘소중한 곳의 추억’ 1악장 ‘명상곡’으로 시작하는 지금의 트랙 구성이 더 마음에 듭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덕분에 앨범의 무게감도 좀 더 실리는 것 같고요. 물론 저에게는 약간 애증의 곡입니다만.(웃음)
그래도 이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니 이 앨범을 내고 마음이 홀가분한 바는 없었을까 궁금하네요. 지나간 시간이나 감정을 정리했다는 후련함이랄까요?
그렇기도 하죠. 그런데 이 앨범을 내고 나서 그중 몇몇 곡은 계속 연주할 일이 생기더라고요. 개인적으로 이 곡들을 기록을 남긴 뒤 마음으로 안녕을 고한다고 생각했는데 계속 연주하게 되니까 안녕이 안 되는 거예요.(웃음) 사실 ‘포기와 베스’는 너무 모범생처럼 연주한 거 같아서 마음에 들진 않아요. 가끔씩 차에서 랜덤플레이로 음악을 듣다가 이 곡이 나오면 바로 넘기죠. 우리 집 금지곡이에요.(웃음) 하지만 녹음을 한 덕분에 좀 더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도 같아요. 요즘 ‘포기와 베스’를 연주할 때는 녹음과는 아예 다른 방식으로 연주해 보니까요.
사실 <포기와 베스>는 이 앨범에서 가장 현대적인 곡이기도 하죠. 개인적으로는 엘라 피츠제럴드와 루이 암스트롱이 듀엣으로 부른 ‘Summertime’을 정말 좋아하는데 이 앨범에서 바이올린과 피아노 듀엣으로 들을 수 있어서 정말 좋습니다. 그런데 클래식 연주자들은 이런 질문 정말 많이 들을 거 같아요. 클래식 말고 가요도 듣나요?(웃음)
네. 사실 모든 장르를 가리지 않고 대부분 좋아하는 편이에요.
그렇다면 요즘 자주 듣는 음악은 뭔가요?
에디 히긴스 음악을 자주 들어요. 말하고 보니 그래도 클래식에 가깝네요.(웃음) 요즘은 재즈 음악을 많이 들으려 노력하는 편이에요. 지식이 많지 않아서 랜덤 플레이 형식으로 자주 접해보고 있죠. 가요도, 크로스오버도 많이 들어보려 하고요.
어릴 때 원래 바이올린보다 피아노를 먼저 접했다고 들었어요. 어머니 권유로 악기를 배웠다는데 어머니께서 음악에 흥미가 상당하셨나 봐요.
악기를 처음 접한 게 다섯 살 때였는데 그때 어머니께서 대전에서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셨어요. 심지어 ‘다미 피아노 학원’이었죠.(웃음) 그래서 피아노는 어머니 학원에서 취미처럼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여섯 살이 되기 직전에 바이올린 학원도 다니게 됐고요.
어머니께서 피아노 학원을 하셨는데 결국 바이올린을 선택했군요.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제가 피아노 연습할 때 맨날 엎드려 자고 있었대요. 아마 처음부터 자는 건 아니었고 어머니 발소리가 들리면 피아노 연습이 싫다는 걸 표현하려고 일부러 엎드려서 자는 척했던 거 같아요. 그런데 바이올린은 집중해서 연주하는 걸 보고 어머니께서 바이올린을 가르쳐야 되겠다고 결심하신 거 같더라고요.
어느 정도 재능을 보셨던 걸까요?
어렴풋한 기억이지만 학원에서 항상 단체연주를 시켰어요. 꼬맹이들 몇 십 명이 합주를 하는데 그때 제가 어깨 받침을 떨어뜨렸대요. 제 인생 첫 연주회에서요.(웃음) 그런데 여섯 살짜리 애가 당황하지 않고 그 자리에 철푸덕 앉더니 어깨받침을 다시 끼우고 연주했다고 해요. 그 모습을 보신 어머니께서 선천적으로 대담한 면이 있다고 생각했나 봐요. 결국 일곱 살때부터 개인 레슨을 받으며 제대로 배우기 시작했죠.
한국 1세대 바이올리니스트로 꼽히는 양해엽 교수님 사사를 받았다고 하더군요.
미국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일주일에 한 번씩 대전으로 내려오셔서 봐주셨죠. 나중에 어머니 말씀으로는 어느 시점부터 레슨비를 받지 않으셨대요. 거의 3년 정도? 그전에도 그리 큰돈을 받지 않으셨다고 들었는데 당시 서민 수준의 집안 형편을 생각하면 선생님 덕분에 마음 편하게 음악을 할 수 있었던 거죠. 심지어 학비를 면제받을 수 있는 커티스 음악원도 소개해 주셨고, 입시 준비까지 도와주셨어요. 제 인생의 경로를 정해주신 셈이죠.
보통 10대 때부터 국제 콩쿠르에 참가하는 게 일반적인데 20대가 돼서 비로소 참가하기 시작했더군요.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당시 아론 로잔느 선생님이 콩쿠르에 나가는 걸 반대했어요. 물론 그래도 그냥 나가는 친구들도 있었는데 저는 좀 순종적인 타입이었던 거죠. 그런데 모두에게 나가지 말라고 간 건 아니라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어요. 그래서 더 열심히 노력해서 콩쿠르에 나갈 실력을 갖추자고 다짐했죠. 덕분에 콩쿠르에 나가는 부담감은 없었던 거 같아요. 만약 10대 때 입상이라도 했다면 20대에는 그걸 넘어서는 기록을 세워야 한다는 마음을 먹었을 거 같아요. 하지만 저는 잃을 게 없었죠. 어차피 저 같은 애는 아무도 모르니까 연주나 잘하고 오자는 생각만 했어요. 경험이 없으니 국제 콩쿠르에서 어느 정도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 스스로도 잘 몰랐고 특별한 기대감도 없었죠.
하지만 참가한 모든 콩쿠르에서 결선 무대에 진출했고, 준수한 입상 경력을 남겼습니다. 특히 프레미오 파가니니 국제 콩쿠르에서 1위 없는 2위를, 나고야 무네츠구 국제콩쿠르와 하노버 요아힘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했죠.
처음부터 잘한 건 아니었어요. 첫 국제 콩쿠르였던 마이클 힐 국제 콩쿠르에서는 6위를 했고, 두 번째로 참가한 센다이 국제 음악 콩쿠르에서는 5위를 하면서 알았어요. 정말 많은 레퍼토리를 준비해야 하는구나. 그리고 세 번째로 참가한 파가니니 콩쿠르가 상위 입상한 첫 콩쿠르가 됐죠. 그때 강원도 산중에 있는 오피스텔을 빌려서 도 닦듯이 연습만 했어요.(웃음)
콩쿠르에서는 온전히 혼자가 돼서 경합을 벌이는 자리이니 부담감도 상당할 거 같고, 좀 외로울 거 같아요. 그런 상황을 이겨내고 제대로 실력을 발휘하는 게 관건일 거 같네요.
그렇긴 한데, 막상 현장에서 느끼는 동질감도 있어요. 콩쿠르 직전까진 혼자 연습실에서 연습하고 고독한 작업을 수행할 수밖에 없죠. 그리고 모두 긴장된 상태로 연주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있으니 저 친구는 얼마나 힘들까 생각하며 나름의 소속감을 갖는 거 같아요. 그리고 콩쿠르에 참여하다 보면 이전에 만났던 친구를 다시 만나고, 그러면 꽤 반갑거든요. 그래서 만남의 광장 같은 분위기가 돼요. 연주자로서 사회 생활하는 느낌? 오리엔테이션을 진행하면서 제비뽑기로 연주 순번도 정하는데 서로 깔깔거리면서 웃고 박수도 나오고 덕분에 즐거운 기억도 생기죠. 무엇보다 콩쿠르가 끝나면 심사위원과 대화할 수 있는 리셉션 자리에서 피드백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상당한 도움이 되죠. 그래서 학생들에게 국제 콩쿠르 참가를 권하는 편이에요. 한국에서 나가는 콩쿠르와 분위기가 확실히 다르거든요.
단순히 경쟁만 하는 자리가 아니라 세계관이 넓어지는 경험의 장이기도 하군요.
맞아요. 그래서 저도 학생들에게 국제 콩쿠르 참가를 권하는 편이에요. 한국에서 나가는 콩쿠르와 분위기가 확실히 다르거든요.
한 인터뷰에서 ‘무대에서 내 연주 실력이 부끄러워지는 실력이 되기까지 좀 오래 걸렸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피력했어요. 교수로서 제자를 가르치는 입장이 됐다는 사실이 연주자로서 임하는 태도에 영향을 미친 바는 없을까요?
꼭 많은 무대에 서야 하는 건 아니지만 연주 활동을 오래 지속하는 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교육자로서도 그렇죠. 학생들이 모든 선생님에게 예의를 갖춰도 현역 연주자로 활동하는 선생님을 향한 존경의 강도는 또 다를 거예요. 제가 학생들에게 성실하길 요구할 수 있는 것도 교수로 재직하면서 연주자로도 활동한다는 걸 알고 있는 덕분이죠. 제가 얼마나 많은 협주과 협연을 하는지 아는 학생들이 연습을 제대로 안 해왔다고 느낄 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거예요. “그렇게 바빠?” 제 앞에서 바쁘다는 말을 하긴 어렵지 않을까요?(웃음) 교육자로서 좀 더 당당해지려면 연주자로서 오래 활동을 지속하는 게 좋을 거 같아요. 그런 부분이 학생들에게도 좋은 자극이 될 거고요.
너무 무서울 거 같은데요.(웃음)
너무 꼰대 같을까요?(웃음) 어쨌든 교육자로서 좀 더 당당해지려면 연주자로서 오래 활동을 지속하는 게 좋을 거 같아요. 그런 부분이 학생들에게도 좋은 자극이 될 거고요.
연주와 연습 그리고 교직 생활까지,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는 것만큼 충실하게 휴식을 취하는 것도 중요한 과업이 아닐까 싶어요.
별일이 없다면 나가는 걸 별로 좋아하진 않고, 그냥 ‘침콕’하는 게 제일 좋아요. 물론 막상 나가면 나름 즐겁기도 하지만 내향인이라 그냥 온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침대에 누워있을 때 만족감이 제일 높은 거 같네요.(웃음)
필연적으로 쌓일 수밖에 없는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특별한 노하우가 있을까요?
특별히 중심을 잃는 편은 아닌데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면 한번 확 풀어줘야 해요. 그럴 때 슬픈 영상을 찾아보죠. 특히 <금쪽같은 내 새끼>처럼 타인의 고충을 느낄 수 있는 프로그램에 공감할 때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렇게 한번 눈물을 쏙 빼고 나면 스트레스가 해소돼요. 그런데 남편이 밥 먹을 때는 제발 보지 말라고 하는데 그 말 들으면 또 섭섭하다며 울고 그래요.(웃음)
더욱 행복하고 자유롭길 바라는 연주자로서 지향하는 목표 같은 게 있을까요?
그럴 기회가 많진 않은데 가능하면 항상 새로운 곡을 연주하고 싶어요. 사실 공연기획자는 대중적으로 유명한 곡을 많이 연주하길 바라고 요청하기도 해요. 관객 동원에 도움이 되니까, 그런 입장은 이해하죠. 하지만 연주자 입장에서는 같은 곡만 계속 연주하면 매너리즘에 빠지기도 하거든요. 아마 사라사테 곡은 100번도 넘게 연주했을 텐데 그런 곡은 어쩔 수 없이 애정도 떨어져요. 그래서 가끔 실험적인 시도를 해보고자 하는 공연 기획자를 만나면 반갑고 기쁘죠. 새로운 곡을 공부하는 데 욕심이 큰 편이기도 하고요.
그렇다면 관현악 협주보다 실내악 협연이 상대적으로 반가울 때가 많을 거 같아요. 실내악 협연 때 새로운 곡을 연주할 가능성이 실내악 협연 때 좀 더 많을 테니까요.
콘체르토 레퍼토리는 한정적이니까요. 아무리 새로운 곡을 하고 싶어도 솔리스트가 오케스트라에 곡을 제안하긴 어렵거든요. 그래서 협주는 대부분 메인 레퍼토리가 정해져 있죠. 하지만 실내악 편성은 무수하니까 도장깨기하듯 새로운 곡을 공부하는 만족도가 높아요. 죽기 전에 연주할 수 있어서 좋다고 느낄 정도의 곡을 만나기도 하고요. 그래서 실내악 연주를 좋아하죠.
나이가 들어갈수록 체력의 변화가 주는 영향력도 있을 거 같아요. 결국 연주자도 몸을 쓰는 직업이니까요. 반대로 음악과 함께 성숙해지는 기분이 들 수도 있고요.
스포츠 선수처럼 연주자도 40대부터 육체적 위기가 찾아온다고 해요. 근육이 약해지고, 연주 실력에 영향을 받는 거죠. 사실 30대가 된 이후로 이미 20대 때와는 다르다는 걸 많이 느끼고 있어요. 그래서 40대가 되면 어떨까, 생각이 많아지죠. 결국 꾸준히 연습하는 것 외에는 길이 없어요. 지금처럼 연주 기회가 많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무대에 서는 그 순간 최선의 역량을 끌어올릴 수 있도록 늘 준비하는 수밖에 없죠. 그래야 제 자신에게도 좀 더 당당할 수 있을 거 같아요.
(한화 펨테크연구소에서 발행하는 'Between' 매거진에 쓴 원고를 재편집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