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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Aug 11. 2018

성형 권하는 사회

누구나 동일한 미인이 되길 바란다는 건 분명 이상한 일이다.

강남의 한 지하철역 출구에는 인생 역전했다는 남녀들의 자랑으로 도배돼 있었다. 그중 한 여성은 성형수술 후, 결혼했단다. 그 옆에 나열된 남성은 프러포즈를 했단다. 국가적으로 결혼을 장려하는 시대에 성형외과가 국익에 앞장서고 있으니 이만한 경사가 또 있을까. 게다가 한 남성은 취업까지 했단다. 나라님도 구제하지 못한 청년 실업자들을 성형외과가 구한다. 그 놀라운 행적의 주체라며 패기 넘치는 광고를 집행한 건 바로 인근에 16층 빌딩을 독점한 어느 성형외과였다. 얼굴을 바꾸면 인생이 달라진다니, 할렐루야! 


일단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것이 광고의 기본적인 목적이라면 어떤 의미에선 대단한 성공이다. 그 출구를 오르내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광고를 쳐다보고 일행과 수군대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손가락질하고 수군대며 깔깔대는 모습이 그리 통쾌하진 않았다. 만약 그 성형 광고 모델이 김태희 같았다면 그녀들은 마냥 그렇게 손가락질할 수 있었을까. 성형이 누군가의 인생을 얼마나 탈바꿈시키는지 몰라도, 이 풍경은 분명 어딘가 놀랍다. 은밀하게 감춰져 있던 욕망이 지하철역 벽에 적나라하게 펼쳐져 욕망의 주체들과 마주본다. 외모도 이젠 하나의 스펙이 됐음을 부정하지 않는 패기 넘치는 카피가 되레 신선했다. 문득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출구를 통과해 성형외과의 문턱을 넘었을지 출구조사라도 해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강남의 특정 지역을 배회하면 가끔 마스크로 얼굴 대부분을 가린 여성들과 마주치기 십상이다. 마스크로 채 가려지지 못한 얼굴 외곽까지도 시퍼렇게 부어 올라 통증을 상기시킨다. 살이 찢기고 뼈가 깎이는 고통이 전이된다. 무섭다. 그네들의 그런 외형이 무서운 게 아니다. 그만한 통증을 감내하고서라도 사고 싶은 인생이 있다는 건 그 고통을 감내하지 않고선 극복할 수 없는 현실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게다가 그것이 자신의 인생을 완벽하게 뒤바꿀 수 있다고 믿을 수 있는 기회라면 추구해야 마땅한 현실인 거다. 


송나라 시대부터 중국에서 미의 기준은 기이하게도 작은 발이었다. 그냥 작은 발이 아니라 작게 만든 발이었다. 당시 중국 여아들은 네다섯 살 무렵이면 네 발가락이 발바닥에 밀착될 정도로 발을 뒤틀어 천으로 동여맸다. 딸에 대한 애정이 깊을수록 어머니는 발을 더욱 세게 조였다, 작은 발을 가지면 시댁의 가문이 달라졌으니까. 가장 이상적인 발의 크기는 9cm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풍습은 1000년 동안 이어졌다. 이른바 전족이다. 전족을 하면 걷기가 불편했기에 집안일을 하지 않고 부축할 하인이 있는 상류층 아녀자들을 중심으로 확산됐지만 서민층도 이를 따라 했다. 두 발로 설 수 없어서 무릎으로 기면서도 아름다운 발을 포기할 수 없었다. 1884년 서태후가 전족 금지령을 내린 뒤에도 이런 전통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전족을 한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선호는 여전했고, 여성들 또한 쉽게 발을 풀어놓지 못했다. 


미의 가치나 기준은 시대별로 지역별로 달랐다. 다만 추구하는 방식은 대체로 유사하다. 중국에서 성행한 전족과 같은 사례는 더러 발견된다. 이디오피아의 수르마족은 여전히 성년이 된 소녀의 입술을 찢어서 쟁반을 끼우는 의식을 치른다. 나이가 들수록 쟁반의 크기는 커진다. 이는 기본적으로 남성에 대한 복종의 의미를 담고 있지만 입술에 끼운 쟁반의 크기가 클수록 혼인할 남성이 지불하는 지참금의 액수가 커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중세 유럽의 여인들이 코르셋을 입고 허리를 옥죈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사회적 수준과 문화의 차이에 따라서 행해지는 방식의 차이만 있을 뿐 본질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혼인을 앞둔 여성들은 남성적 권위가 강했던 당대의 분위기 속에서 통용되는 미적 기준에 부합하며 더 나은 혼인 조건을 충족하고자 했다. 그것이 유일하게 당대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를 높일 수 있는 통로였기 때문이다. 


성형은 사회가 가리키는 미적 기준에 충족하고자 신체의 손상을 감수한다는 점에선 중국의 ‘전족’이나 이디오피아의 ‘쟁반 입술’과 유사한 현상처럼 보인다. 하지만 성형이 전족이나 쟁반 입술과 구별될 수밖에 없는 건 온전히 당사자가 선택한 결과라는 데 있다. 전족이나 쟁반 입술은 커뮤니티의 강압을 통해서 이뤄지는 완벽한 폭력이다. 그저 감당해 내야만 하는 일종의 재앙이다. 하지만 성형은 선택이다. 부모로부터 발을 동여매어지거나 성년이 돼 입술이 찢긴 채로 쟁반이 끼워지는 것과는 엄격한 격차가 있다. 그만큼 선택에 대한 결과적 책임도 온전히 본인의 것이 된다. 하지만 과연 성형이 온전히 개인의 선택을 통한 결과라고 정의될 수 있을까. 


여자든, 남자든, 살아 있는 유기체라면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고 추구하고 동경하기 마련이다. 하물며 꿀벌도 자신의 관점에서 예쁜 꽃의 꿀을 빨아들이는 법이니까. 그런 미적 추구의 방편이 살을 찢고 뼈를 깎는 고통이라 할지라도 타인이 나서서 손가락질할 권리는 없다. 다만 그런 욕망이 마치 누구나 그래야만 할 것처럼 부추기고 전파될 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몇몇 케이블 채널에선 시청자에게 성형수술을 제공하는 프로그램들이 방송되고 있다. 평소 사회생활에 지장을 받을 정도로 외모 콤플렉스가 심한 이들에게 성형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치유의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 이 방송의 모토다. 확실히 성형수술을 받은 여성은 달라 보였다. 단지 외모가 변해서가 아니다. 표정에서 발산되는 생기가 그랬다. 긍정적인 결과다. 단편적인 결과만을 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외모 때문에 주눅들어 살던 여성이 성형수술 후 스튜디오 무대로 당당하게 걸어 나와 카메라를 응시하는 광경은 강남의 한 지하철역 출구에서 목격한 광고와 유사한 구석이 있다. 차이가 있다면 더욱 설득력이 있다는 것이다. 성형이 당신에게 새로운 인생을 선사할 것이라는 달콤한 약속이 TV를 통해서 전파된다. 당신도 이 시대가 요구하는 미의 기준을 갖추고 당신의 가치를 높이라고 속삭인다. 엄연히 말해서 이건 조장이다. 어느 개인의 영역 안에서 벌어지던 일들이 매체를 통해 대중에게 전파되고 전시될 때 그 목적은 뚜렷해진다. 개인에겐 자기 삶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 대부분의 성형 프로그램들은 그 권리에 기생해서 왜곡된 가치를 송출한다. 규격화된 미의 기준을 전시하고, 그런 삶이 보다 나은 미래를 보장할 거라고 무의식을 지배한다. 


성형외과(Plastic Surgery)의 영어식 표기는 ‘형태를 만든다’는 의미의 그리스어 ‘플라스틱코스(Plastikos)’에서 유래됐다. 본래의 타고난 인상에 ‘형태를 만든다’는 건 결국 가공의 의미에 가깝다. 타고난 신체를 원석 삼아 새로운 외모를 가공해내는 것이다. 성형외과를 찾은 이들은 다이아몬드로 거듭나길 희망한다. 그리고 성형외과는, 그 이전에 이 사회는 대학졸업장과 외국어 실력만큼이나 코의 높이와 턱의 형태가 당신의 경쟁력이 될 것이라 부추긴다. ‘단지 예뻐지고 싶어서’라는 개인적 취향이 아니라 ‘예뻐져야 한다’는 강박을 일으킨다. 성형수술도, 성형 미인도 죄가 없다. 당신의 삶이 개력될 것처럼 광고하고 방조하는 성형 권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 죄라면 죄일지도 모르겠지만.


(2013년에 썼던 글을 재편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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