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세상만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용준 Oct 08. 2018

결혼은 미친 짓이 아니다

어떤 결혼을 할 것인가,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나이 서른을 목전에 둔 무렵부터 지겹게 듣게 된 질문이 있다. "애인 있어? 결혼 안 해?" 인연의 너비와 상관없이 대개 그랬고, 결혼 소식을 알리기 전까지 그랬다. 물론 나도 과거엔 때가 되면 대학에 가고, 때가 되면 취직하고, 때가 되면 결혼하는 거라 생각했다. 쭈쭈바 입에 물던 시절을 추억하며 나름 머리에 피 좀 말랐다고 자뻑하던 풋내기 시절엔 세상 만사가 지구의 자전처럼 빤하게 돌아가는 거라 막연했다. 인연의 유효기간 연장에 성공하며 함께 늙어가는 처지가 된 10년 지기 친구들은 이제 술 한잔했다 하면 현실의 밑바닥을 긁어댄다. 갖고 싶은 것보단 갖고 있어야 할 것을 고민한다. 혈기왕성하게 자고 싶은 여자를 지껄이던 놈들도 점점 결혼할만한 여자를 논한다. 언제부턴가 결혼이란 단어가 대화를 지배했고, 그 대화의 8할은 집 문제로 가 닿았다. 결혼할 여자를 구하는 것보다 결혼해서 살 집을 구해야 한다는 데서 보다 심각해진다. 저마다 벌이가 다르고, 먹고 사는 수준이 다르니 고민의 너비도, 높이도 각자 다르다. 하지만 30대 초입 안팎에서 서성거리는 대부분의 수컷들에게 집 장만의 압박은 결혼이라는 골포스트를 가리고 선 최고의 장벽이다. 동네 인근의 부동산 윈도우에서 '억억거리는' 전세가만 보더라도 결혼은 미친 짓이다. 하지만 결국 다들 미친 척한다. 결혼을 담보로 기꺼이 밑지는 인생을 감행한다.


JTBC에서 방영했던 <우리가 결혼할 수 있을까>, 일명 <우결수>는 그 미친 짓에 관한 드라마다. 호텔 스위트룸으로 여자친구를 이끌고 와서 반지를 꺼내 든 남자는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청혼한다. 여자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 순간만으로도 두 사람은 영원할 것 같다. 그러나 <우결수>는 그 순간으로부터 턱시도와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랑신부의 결혼식장으로 점프하지 않는다. 그 찰나의 감동이 앙상한 뼈를 드러낼 때까지 씹고 뜯는다. 그 이빨을 드러내는 건 그네들의 부모들이다. 일찍이 남편을 잃고 홀로 두 딸을 키워온 여자의 어머니는 억척스럽다. 자신이 애지중지 키워온 딸을 데려갈 사위라니 웬만해선 성이 차지 않아서 집안의 뒷조사까지 불사한다. 남자의 엄마는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고 헌신적인 남편의 사랑을 받으며 화목한 집안의 사모님으로 살아왔다. 아들을 존중하니, 아들이 사랑한다는 아들의 여자도 존중한다. 하지만 그녀의 엄마까진 존중하기 어렵다. 가뜩이나 교양도 없어 보이는데 상견례에서 노골적으로 자기 아들을 깔아뭉개니 꼭지가 돈다. 그래서 아들의 여자를 긁는다. 자기 딸의 생채기를 알아본 딸의 엄마도 딸의 남자를 보채고 옥죈다. 어린 것들의 사랑 따윈 찜 쪄 먹고도 남을 어른들의 복마전이 치열하다.


대부분의 결혼 준비 과정에서 결혼 당사자들의 의견이 판단의 장외로 밀려나는 건 그들이 가진 것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예전에 취재차 만난 한 웨딩플래너는 일반적인 결혼비용이 1억 3천 만원에서 2억 5천 만원 사이이며 그 비용의 8할 정도는 집값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최근 결혼적령기가 늦어진다고 말하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사이의 연령대에 놓인 커플이 결혼하는 경우가 우세하다고 말했다. 그 연령대의 남녀 대부분에게 그 정도의 결혼비용이 준비돼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러니 은행에 빚지거나 부모에게 손 벌릴 수밖에. 그리고 웬만하면 금리가 없는 부모에게 손 벌리는 쪽이 나을 수밖에. 투자자가 된 입장에서 투자 가치를 판단하는 건 당연하다. 투자자가 된 부모는 당연히 자식의 결혼에 개입하고, 자식은 이에 침묵할 수밖에. 지극히 자연스러운 역할의 배분이다. 양가간에 순탄한 합의와 이해가 가능하다면 문제될 리 없다. 사람 마음이 그렇기가 쉽지 않으니 문제라는 거지.


보다 손이 큰 투자자의 목소리가 커지기 마련이다. 결혼에 있어서 남자가 집을 마련해야 한다는 관념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만큼 결혼비용에 대한 남자의 부담이 크다. 그리고 그런 부담을 이행한 남자의 집안 앞에서 여자의 집안은 덧없이 고개를 숙여야 한다. 불평등한 의무가 전제된다. 물론 '억억거리는' 집값을 양가가 함께 감당하는 페어플레이도 늘고 있다. 하지만 그런 관념이 지배하는 가운데서 의무를 이행하지 못한 쪽은 무의식적으로 죄인 취급을 감당한다. 이런 불평등한 구조야말로 결혼 과정의 불화를 야기하는 뜨거운 불씨임에 틀림없다. 남녀의 사랑으로 시작된 결혼 과정이 집안 간의 갑을 관계로 설계된다. 마음 상하는 이유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함께 살고 싶어서 결심한 결혼이 정작 서로의 애정을 좀먹는다. 물론 누구나 완벽한 시작을 꿈꾼다. 그래서 빚지는 현실을 감당하거나 부모에게 손을 벌린다. 실상 사랑만으로 결혼한다는 믿음은 연약하다. 그 사랑이 결혼으로 완성되기까지 실제로 얼마나 많은 지불이 필요한가. 그 지불이 불순한 게 아니다. 그 지불에 끼어드는 감정이 불순한 거다. 각자 지불해야 할 몫의 차이는 입장의 차이로 이어지고 그 차이와 갈등은 언제나 비례하다. 거대한 결혼비용을 당연시하는 사회적 분위기도 넘어야 할 허들이다. 하지만 낑낑대면서도 그 허들을 기꺼이 넘는 것도 당사자들의 선택이다. 쥘 수 있는 손은 작은데 쥐려고 하는 게 너무 많으니 손을 빌릴 수밖에. 그리고 그 손은 내 손이 아니니 가리키는 방향이 달라질 수밖에.


<우결수>의 커플은 결혼 준비 과정 중에서 불거진 집안 간의 불화를 목격하고 휩쓸리다 결국 두 번의 이별을 경험한다. 힘겹게 재회한 커플은 비로소 다짐한다. 타인의 눈을 의식하다 얻은 각자의 열등감을 안고 서로를 할퀴는 대신 이젠 쓰다듬어줄 방법을 찾아보자고. 사랑만으로 할 수 있는 것을 해보자고. 집안의 반대와 상관없이 서로를 위한 결혼을 해보자고. 부모에게 기대지 말고 서로의 현실 안에서 가장 합리적인 결혼을 모색해보자고. 그렇게 나름의 해피엔딩을 찾아간다. 그 결론에 다다르기까지의 과정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정답도 아니다. 다만 이런 결론도 가능하다는 거다. 세상의 규격에 스스로를 끼워 넣으려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각자에게 어울리는 방식이 존재한다는 거다. 물론 헐벗은 사랑만으로 서로를 끌어안은 채 버텨보라고 등 떠밀고 싶은 게 아니다. 혼자서 결정한다고 될 일도 아니다. 행복의 기준은 각기 다르다. 결국 중요한 건 당사자들의 선택이다. 자신들이 행복해질 수 있는 방식을 선택하면 된다. 결혼은 미친 짓이 아니다. 어차피 다들 행복하자고 결심하는 것 아닌가. <우결수>의 대사처럼. "사람들은 즐거움을 갖기 위해 많은 비용을 지불해. 사랑하는 사람과 있으면 즐거움은 그냥 생겨. 공짜야. 세상에 공짜는 없는데 사랑은 공짜다. 사는 건 갈등과 문제의 연속이야. 그냥 수학문제 풀듯이 풀면 돼." 그러니 기꺼이 감당하라. 아니면 좀 더 평등하고 합리적인 변화를 모색해보든지.

매거진의 이전글 성형 권하는 사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