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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란드리아 Oct 04. 2022

주디스 리치 해리스 <양육가설>



아내가 임신한 후부터 태교, 육아에 관련된 책들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꽤 많이 읽은 것 같은데요(50권 이상?), 실용서도 있지만 자녀교육, 정신건강의학, 심리학 등의 분야도 있습니다. 사실 실용서나 자녀교육서보다는 정신건강의학, 심리학 분야의 책이 더 도움이 되었어요. 그건 부모로서 힘들 때, 또는 암담할 때 위로와 힘이 되어주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저도 부모로서 제가 잘하면 아이도 올곧게 잘 자랄 것이고 미래도 특별히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이에게 많은 것을 투자하고,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려 했었죠.


하지만 주디스 리치 해리스의 책들을 보고는 다소 충격을 받아서 여기에서도 소개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의 책 중에 <개성의 탄생>을 먼저 읽었고, 이 책에서 전작인 <양육가설>이 계속 언급되어서 이 또한 읽게 되었는데요, 순서상으로는 <양육가설>을 먼저 읽는 것이 나을 것 같고, 여력이 되시면 <개성의 탄생>도 같이 읽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양육가설'이란 제가 생각했던 것처럼 부모의 양육에 따라 아이의 미래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아마 대부분의 부모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듯해요. 정상적인 부모라면 아이를 내팽개쳐두는 경우는 없겠죠.


하지만 저자는 그 믿음이 근거가 없다고 말합니다. 무려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통해 그것을 설득력 있게 주장하는 한편, 그동안의 발달심리학에서의 오류도 조목조목 밝히고 있습니다. 특히, 발달심리학에서 부모-자녀관계에 대한 연구가 주를 이루는 이유는 그게 제일 중요하기 때문이기보다는 제일 쉬워서라고 하는군요.


저자가 관심을 갖는 것은 집안이 아닌 집 밖에서의 아이의 모습입니다. 그러한 아이의 모습과 행동의 차이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탐색합니다.


아무튼 이 책의 내용을 간단하게 소개하는 건 무리고, 책을 통해 느낀 소감만 얘기해볼까 합니다.


전반적으로, 전 세계적으로 부모가 아이 양육에 그렇게 매달리게 된 것은 불과 얼마 되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어쨌든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히스테릭 해지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핵가족화 이후에 개인화가 심화되었고, 가족과 자녀에게만 집중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 아이만 잘 되면 된다고 생각하는 부모들이 점점 더 많아지기 때문이기도 하겠죠.


아이의 성향(성격)은 유전적인 요소로 반 정도를 설명할 수 있고 나머지는 아주 작은 요소로 환경, 그리고 더 큰 요소로 타인 혹은 집단과의 관계 형성이 차지한다고 합니다. 특히 또래집단이 부모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죠. 여기에서의 또래집단은 좁은 의미가 아니라 사회화 과정에서 접하게 되는 모든 비슷한 연령대의 집단을 의미합니다. 원문에서는 'peer group'이라고 되어 있네요.


아이가 유아기 때부터 사회화 과정을 겪고 나면 그 이후에는 성인이 될 때까지 또래 집단 내에서 위치, 다른 아이들과의 관계를 통해 자아를 형성해나가게 됩니다. 그건 부모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인데도 부모들은 그것마저 통제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간접적으로는 가능합니다. 아이의 또래 집단을 선택해줄 수 있는 것처럼 보이니까요. 그래서 부모들이 학군을 중요시하고, 더 나은 집단이 있는 곳에 속하려고 애쓰는 것이겠죠. 그 선택이 기대에 부응할지는 별개로요. 또 모든 부분에서 완벽한 또래 집단이 있을 수도 없고요. 부모가 선택해 준 것은 외형적인 것일 뿐, 그 속에서 아이는 나름대로의 집단에 들어가게 되고 관계를 형성하게 됩니다.


부모가 보기에 완벽한 자녀처럼 보인다면 속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부모에게 보이는 것과 그 외의 대상에게 보이는 모습은 다를 수 있죠. 부모들이 자주 하는 말 중에 그런 게 있죠. "우리 애는 그럴 애가 아니네요." 과연 그것은 자녀에 대한 부모의 믿음일까요 아니면 부모 자신에 대한 믿음일까요.


결국 부모의 통제는 아이가 사춘기에 이르러 한계를 드러내고 맙니다. 이미 아이는 또래 집단을 통해서 부모의 영역 이외의 영역을 확장했고, 그 영역 간 충돌은 불가피하니까요. 다만 미성년자인 자녀에 대한 책임과 양육권이 여전히 부모에게 있기에 한계에 봉착하더라도 계속 (더 좁은) 울타리를 쳐 둘 수 밖에는 없는 상황이 되는 거죠.


부모의 노력이 아이의 성공과 인과관계가 분명하지 않다고 해서 영향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부모의 역할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그 한계가 있기에 그것을 인정하고 육아를 해야 한다는 것이죠. 부모가 모든 것을 다 해 줄 수도 없고, 아이를 부모가 원하는 대로만 만들 수도 없고요.


다만, 아이의 성향이 포지티브라면 계속 포지티브 쪽으로 이끌어 주고, 네거티브라도 포지티브 쪽으로 이끌어 줄 필요는 있겠습니다. 포지티브를 네거티브로 만들거나, 네거티브를 계속 내버려 두는 건 부모의 책무를 버리는 것일 테니까요. 그러기 위해서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잘 유지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부모의 역할은 단단한 지반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 위에 어떤 집을 어떻게 지을 것인가는 아이의 몫이고요.

그러니 부모가 아이의 모든 것을 책임지려는 강박감은 버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이의 미래는 부모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사회화 과정을 통해서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니까요. 즉, 이끄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가는 것입니다.


p.s. 자녀는 부모의 소유물도 아니고 대리만족의 대상도 아닌 걸 알면서도 욕심을 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뭘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무엇을, 누구를 위해서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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