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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란드리아 Jun 25. 2024

<헤르만 헤세의 나로 존재하는 법>


지금은 좀 사그라든 것 같기는 하지만 최근의 서점가는 쇼펜하우어가 점령한 듯했다. 왜 쇼펜하우어인가? 그러나 그것은 꼭 쇼펜하우어가 아니어도 되었다. 그여서가 아니라, 사람들은 누군가에게서 위안을 받고 싶어 한다. 불안한 마음을 달래줄 수 있고, '지금의 나도 괜찮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한다. 그게 쇼펜하우어든, 니체든, 하이데거든... 아니면 플라톤이나 소크라테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도 상관없다. 


철학자뿐만 아니라 작가들의 글도 마찬가지다. 특히 헤르만 헤세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꾸준히 사랑받는 작가이기에, 그의 문학 작품뿐만 아니라 산문, 사적인 글들까지도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다. 나 또한 그의 작품들 뿐만 아니라 산문들도 여럿 읽은 적이 있다. 특히, 내가 중학생 시절에 읽었던 <데미안>은 그 시기를 통과하는 사춘기 아이들의 필독서처럼 여겨졌다. <수레바퀴 밑에서>, <싯다르타> 등과 더불어서. 


헤세의 글이 인기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지 그의 글이 "있어 보이기" 때문일까? 확실히 그의 작품들에는 청소년들과 청년들의 마음을 끄는 힘이 있다. 그래서인가, 그의 작품을 젊은 시절에 읽었을 때와 좀 더 나이가 들어서 읽었을 때의 느낌은 다른 듯하다. 아니, 그보다는 헤세의 원숙함과 더불어 독자도 나이를 먹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만큼 인생을 더 알게 되었기에, 그 얘기들이 당연한 얘기처럼 들리는 것이겠지.


헤세의 작품에서는 그의 통찰력과 철학을 느낄 수 있다. 이는 그의 어렸을 때의 경험에서부터 비롯되며, 그가 성장하면서 고민한 것들의 결과이다. 특히 그가 자살 시도를 했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의 작품은 어느 정도건 자전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그 시절 그의 고통과 좌절이 훗날 그를 뛰어난 작가로 성장하게 해 준 것이다. 


헤르만 헤세는 1892년 열네 살의 나이에 마울브론의 신학교에서 뛰쳐나왔고 3개월 뒤에 자살시도를 했다. 그에게서 고집의 마귀를 몰아내려는 부모님, 친분이 있는 신학자들의 노력이 헛수고로 끝난 뒤, 헤세는 1892년 6월 말에 렘스탈의 슈테텐 정신병원에 보내졌다. 3개월간 그곳에 머물며 막 열다섯이 된 헤르만 헤세는 부모님께 여러 번 편지를 썼다. 어떤 형태로건 외부에서 자신의 인생을 좌지우지하려 하는 명령들에 크게 반발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일 작가들의 서간문학과 맥을 같이하는 편지들이다.


그러한 성찰의 과정은 시대와 국가를 불문하고, 설사 다른 문화권이라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보편성을 갖는 것이며, 그렇기에 그의 진심이 현재의 독자들에게도 와닿는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에 그러한 갈등과 고통을 겪고, 삶의 목적과 의미에 대한 고민 등을 해보지 않을 수 있을까? 이는 서두에 했던 얘기와도 이어진다. 확실히 헤세는 그런 면에서 사람들에게 더 가닿는 면이 있다. 그의 글의 문학적 가치가 그에게 노벨문학상을 안겨준 것이 아닌가.


그의 글은 아름답다. 미사여구가 없어도 솔직하고 담백하게 자신의 생각을 글로 풀어나간다. 이는 그의 삶을 통해 쌓인 사유다. 또한 높이 쌓인 만큼 깊이 들어간다. 그의 이야기는 우리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우리 내면을 들여다보게 한다.  그렇기에 그의 글은 겉으로 드러나는 멋만 보고 단지 가벼이 볼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글들이 모두 그러한 감성과 통찰과 사유를 담고 있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어떤 글은 그의 정수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어떤 글은 밋밋해 보이기도 한다. 기대가 커서일까? 하지만 그러한 것들이 모두 헤세를 이루고 있는 것들이다. 일상의 사소한 것들까지 거창하게 쓸 수는 없지 않은가.




<헤르만 헤세의 나로 존재하는 법>은 독일어 원서를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다. 독일어 원제는 <Eigensinn macht Spaß>인데, 우리말로 하면 '고집이 재미를 만든다' 또는 '고집스러워야 재밌다'가 될 것 같다. 번역하면서 굳이 제목에 '헤르만 헤세'를 넣어야 했나 싶은데, 이는 마케팅 목적이기에 억지스러워 보인다. 게다가 '나로 존재하는 법'도 좀 애매하다. 


여기에는 그의 산문, 편지, 일기 등이 담겨 있으며, 어렸을 때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그 시기의 경험과 이야기들을 적었다. 이를 통해 헤르만 헤세라는 인물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 작가가 되었고, 작가가 된 이후에도 어떠한 생각들을 하며 살았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그가 가장 강조한 것은 '고집'이다. 제목부터 그랬으니 고집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당연하게 여겨진다. 


자신의 성향과 취향을 가능하면 한껏 개발하고 발휘하는 것 말고 자기실현의 다른 방법이 있던가. '자기 자신이 되라!'는 것은 이상적인 법칙이다. 최소한 젊은이에게는 그러하다. 자기답게 사는 것 외에 성장하고 진리에 이를 수 있는 다른 길은 없다. 하지만 이런 길을 가는 것은 녹록지 않다. 도덕적 장애물과 다른 장애물들이 길을 막기 때문이다.
세상은 우리가 고집스럽고 소신 있게 밀고 나가는 모습보다는 세상에 순응하여 유약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 그러기에 조금이라도 속에 불을 품은 사람들의 삶은 가히 투쟁에 가까워진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힘과 필요에 따라 관습에 얼마큼 복종하고, 얼마큼 거스를지를 선택해야 한다. 관습을, 가족과 국가와 공동체의 요구를 무시할 때 사람은 스스로 위험을 무릅쓰는 셈이다. 스스로 얼마나 많은 위험을 감당할 수 있느냐에 객관적 잣대는 없다. 자기 분수에 넘치면 대가를 치러야 한다. 소신 있게 나아가는 면에서도, 순응하는 면에서도 너무 멀리 가는 사람은 대가를 치르게 되어있다. 


헤세는 '고집스럽고 소신 있게 나아가는 모습'을 불편해하는 세상을 지적한다. 세상은 우리가 순응하여 유약하게 살아가기를 원하지만, 소신을 지키며 살아가는 삶은 투쟁에 가깝다. 모든 사람은 관습과 가족, 국가, 공동체의 요구 사이에서 얼마큼 순응하고 얼마큼 거스를지를 선택해야 한다. 자신에게 맞는 길을 찾는 것은 각자의 책임이지만, 그 과정에서 대가를 치를 수도 있다. 그래서 그러한 정면 도전을 피하게 된다. 고집만 부리며 사는 것이 힘든 이유다. 


내가 아주아주 사랑하는 단 한 가지 미덕은 바로 '고집'이다. 책에서 읽고, 선생님들에게서 들은 많은 미덕들은 사실 내 마음을 그리 동하게 하지 않는다. 이제까지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미덕들은 한 가지 이름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복종이다. 말 잘 듣고 순종적인 것 말이다. 문제는 다만 누구에게 복종할 것인가 하는 것뿐. 그러나 그렇게 따지면 자기 자신에게 복종한다는 면에서 고집도 복종이다. 그 외 그리도 인기 있고 칭송받는 미덕들은 인간들이 만들어낸 법칙에 복종하는 것이다. 다만 고집만이 이런 법칙에 굴하지 않는다. 고집 있는 사람은 다른 법칙에 복종한다. 자신 속에 있는 단 하나의 거룩한 법칙, 바로 '자신의 감각'에 말이다. 


고집은 단순히 부정적인 의미만 갖는 것은 아니다. 그가 말하는 고집은 자신에 대한 인정이지만 타인들이 자신에게 하는 평가에 대한 수긍이나 복종이 아니다. 굴종이 아니라 그들 앞에 당당하는 것이며,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낸 법칙에 굴하지 않는 것이다. 고집이 있는 사람이 돈이나 권력을 추구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 속의 신비한 힘을 소중히 여긴다. 더불어, 그는 물질적 가치보다 내면의 성장을 중요시한다.


내가 말하는 '고집' 있는 사람은 돈이나 권력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도덕이나 이타심의 화신이라서 돈과 권력을 무조건 경멸하고 보는 것은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그러나 돈이나 권력, 그밖에 사람들이 그토록 이를 악물고 서로 괴롭히고 죽이기까지 하며 추구하는 그 모든 것은 자신에게 이르른 사람, 즉 고집 있는 사람에겐 별로 가치가 없다. 고집 있는 사람은 단 한 가지를 소중히 생각한다. 바로 자신 속의 신비한 힘, 바로 자신을 살게 하고, 성장하도록 하는 그 힘 말이다.


그는 "이런 식으로 사는 게 맞는 것일까?"라는 질문 대신, "나는 나다. 나는 이렇게 생겨먹었다. 그럼에도 삶을 견디고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자신의 영혼과 그 필요를 받아들이고,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화해할수록 더 강해질 것이라고.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고집은 대체로 부정적인 의미가 더 강한 듯하며, 어느 정도는 결과론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잘 되면 고집이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이며, 잘 안 되면 고집 때문에 망한 것이다. 


그래도 예술계에서는 고집이 어느 정도 인정받을 수 있을까? 이는 독창성으로 높이 평가받기도 하지만 대중성의 측면에서는 외면당할 수도 있다. 예술가, 작가의 고집만으로는 살아남기 어려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을 좋게 봐줘서 개성이나 독창성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우리 사회는 그러한 것에 아직도 야박하다. 혹은 이기주의, 개인주의로 치부되기도 한다. 개인의 고집이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닌데도. '튀면 안 된다'는 인식이 더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갈등 사이에서 주저하는 이들에게 헤세는 용기를 준다. 그러면서 '나로 존재하는 법', '나답게 사는 법'을 일깨워준다. 물론 방법은 각자의 몫이다.




그가 하고자 한 얘기는 이렇게 앞에서 이미 다 한 것 같다. 뒤의 이야기들은 자신의 이야기다. 자신의 삶이 정답이라고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삶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글들을 쓴 이는 헤세지만, 글을 모은 이는 헤세가 아니다. 누구일까? 궁금해서 아마존에서 원서를 찾아보니 Volker Michels라는 작가다. 그가 헤세의 글을 모아서 2000년에 펴낸 글을 번역해서 이 책으로 낸 것 같다. 그런데 번역본에서는 그에 대한 얘기는 없었던 것 같다. 


우리는 헤세에게 무엇을 기대하는 것일까? 이는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게 한다. 그리고 책을 다 읽고 난 후 그 기대에 부응했는가? 글쎄, 썩 만족스러운 편은 아니었다. 역시, 이런 산문 모음집은 뷔페에서 이것저것 주워 먹어서 배는 부르지만 뭘 먹었는지는 모르는 그런 느낌이다. 


하지만 헤세의 내면과 성장 과정을 엿볼 수 있었고, 어떤 작품 (예를 들어 <데미안>과 같은)을 쓸 때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었던 점은 좋았다. 마치 헤세와 대화를 나눈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는 철학자는 아니지만 철학자라고도 할 수 있다. 철학이 별 건가. 삶면서 알아야 할 것들, 실천해야 할 것들을 알려주는 것이 철학이 아닌가. 그런 면에서 그는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말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마음가짐이다.




이 책에서 발췌한 내용들을 덧붙여 본다.


그렇게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결국 나는 목표에 도달했다. 그리도 불가능하게 보였건만, 나는 문인이 되었고 세상과의 질기고 긴 싸움에서 승리한 것으로 보였다. 한때 거의 무너져 버릴 것만 같았던 학창 시절과 독학 시절의 고뇌는 잊혔고, 웃으며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지금까지 내게 절망하기만 했던 가족과 친구들도 내게 친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는 승리했고, 이제 아무리 멍청하고 쓸데없는 짓을 해도 내가 나 스스로에게 매혹되어 있는 만큼이나 주변 사람들도 그런 행동을 매력적으로 보아주었다. 그제야 나는 내가 몇 년간 얼마나 몸서리치는 외로움과 고생과 위험 가운데 살았는지를 깨달았다. 인정받고 있다는 안온한 느낌은 기분이 좋았고, 나는 스스로에게 만족스러운 사람이 되기 시작했다. 
개성을 잡아먹는 우리의 산업계와 학계에 조언 같은 걸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산업과 학문에 더 이상 개성적인 사람이 필요 없다면, 그런 사람을 쓰지 않으면 될 터이다. 그러나 예술이 크게 파탄이 나고 있는 상황에서 아직 어지간히 견딜만한 삶의 가능성을 가진 섬에 거주하는 우리 예술가들은 예나 지금이나 다른 법칙을 따라야 한다. 우리에게 개성은 사치가 아니라 생존의 기본조건이고, 숨 쉴 수 있는 공기이고, 필수불가결한 자본이다. 내게 예술가란 스스로 살아있고 성장하고 있음을 느끼고자 하는 욕구와 필요를 가진 모든 사람이다. 자신의 힘의 토대를 의식하고, 그 토대 위에서 타고난 법칙에 따라 스스로를 만들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어떤 활동이나 삶의 방식이, 그 본질과 영향이 좋은 건축물에서 둥근 천장과 벽, 그리고 지붕과 기둥의 관계처럼, 자신의 토대와 명확하고 의미 있는 관계를 맺지 못하는 한, 그런 활동이나 방식에 매몰되지 않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숲 가장자리까지 가서 숲을 떠나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었다. 숲에 끝이 있다면 떠날 수 있겠지. 그런 다음에는 저 이글거리는 텅 빈 공간에, 저 악한 '바깥'에 스스로를 맡길 수밖에 없어. 저 무시무시한 존재인 태양을 찾고, 견디어내야 해. 누가 알겠어? 태양이 두려운 존재라는 그 오래된 가르침도 거짓말에 불과할지. 이런 대담한 생각은 쿠부를 전율하게 만들었다. 모든 시대를 통틀어 아직 그 어느 숲 사람도 자발적으로 숲을 떠나, 저 끔찍한 태양 아래로 나아갈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의 과제는 내 운명을 발견하는 거였어요. 그 어떤 운명이 아니라 바로 내 운명을 말이에요. 그리고 굴하지 않고 올곧이 그 운명을 살아내는 것이었어요. 다른 모든 것은 절반의 것이었어요. 벗어나려는 노력이었고, 대중의 이상으로의 도피였어요. 적응이었고, 자신의 내면에 대한 두려움이었어요. 새로운 이미지는 내 앞에서 두렵고 거룩하게 떠올랐어요. 백 번은 예감하고, 이미 종종 이야기했던. 그러나 비로소 지금에서야 경험하는 것이었어요. 나는 자연이 창조한 산물이었어요. 미지의 것으로, 아마도 새로운 것으로, 아마도 무(nothing)로 내보낸 자연의 소산물이었죠. 자연으로부터 받은 것을 내 영혼 안에서 작용하게 하는 것, 내 안에서 그 의지를 느끼고, 그것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드는 것, 그것만이 나의 소명이었어요. 오직 그것만이.  (...) 정말로 개성적인 인간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가 힘들어요. 하지만 동시에 더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어요. 그들은 무리 속에 숨어 안온한 보호를 누리지는 못해요. 하지만 자신만의 고유한 상상을 하는 즐거움을 누리지요. 그리고 그들이 젊은 시절을 이겨내고 살아남는다면, 세상에 아주 커다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인류의 삶은 이 두 양극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한쪽 극은 도달한 것을 굳게 붙드는 것이고, 다른 한쪽은 그 이상의 것을 추구하기 위해 도달한 것을 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시인이나 소설가의 기능은 이상적인 편에 서서 협력하고, 직관을 가지고, 이상을 만들어내고, 꿈을 키우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작가로서는 결코 믿을 수 없는 '현실'이 존재하게 되었다.
고통에서 힘이 나옵니다. 고통에서 건강이 나옵니다. 갑자기 쓰러져 바람을 맞으며 죽어가는 사람은 늘 '건강한' 사람들입니다. 고통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고통은 사람을 질기게 만듭니다, 고통은 사람을 단련합니다. 고통 앞에서 무조건 달아나는 건 어린아이들이지요! 나는 아이들을 좋아합니다만, 평생 어린애로 남으려 하는 사람을 어떻게 좋아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여러분 모두는 그렇게 고통으로부터 행동을 통해 달아납니다. 아픈 게 무섭고, 깜깜한 게 무서웠던 옛날의 그 애처로운 아이 같은 두려움 때문이죠.
세상은 개선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에요. 여러분도 개선되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랍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으로 살기 위해 존재해요. 여러분이 존재하기에 세상은 여러분의 소리와 울림, 분위기와 그림자로 더 풍성해질 겁니다! 여러분 자신이 되세요. 그러면 세상은 풍성하고 아름다워집니다! 여러분 자신이 되지 않고 거짓말쟁이와 겁쟁이가 되면, 세상은 가련해지고 개선이 필요한 곳으로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자아와 세계 사이에서 중용을 찾지 못해 망합니다. 모든 '소명을 받은 자들, 즉 상당히 개성적인 존재가 되도록 정해진 사람들은 젊은 시절을 힘들게 보냅니다. 자기다움을 찾아가는 일은 사람을 고립시키고, 투쟁과 회의를 불러오지요. 가장 큰 위험은 재능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자아에 사로잡힌 나머지 세월이 요구하는 것을 다시금 깨닫지 못하고, 세상과 생산적인 관계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에요. (...) 외부로부터는 아무 조언도 받을 수 없어요. 당신은 당신의 길을 가야 합니다. 당신의 길을 포기하고 궁색하게 대강 다른 사람에게 맞추어 살든지 아니면 당신의 소질이 당신을 평균적이지 않은 삶으로 부르고, 그런 삶을 살도록 한다는 것을 의식해야 합니다. 목표가 눈에 보이지 않고, 이런 평균적이지 않은 삶이 나중에 당신과 같은 사람들을 어디에 세우는지 아직 알 수 없다고 하여도, 당신은 스스로를 귀히 여기고, 자신에게서 뭔가를 이끌어내고자 해야 합니다.
개성적인 인간이 되는 것, 유일무이하고 자기다운 사람이 되는 것은 모든 이에게 정해진 길은 아닙니다. 그 길은 위험을 품고 있고, 고통을 동반하지요. 그러나 그 길은 또한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행복과 위로를 선사해줍니다. 그러므로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어린애 같은 유치함으로 되돌아가거나, 반항적이고 불손하게 행동하지도 마세요. 두 가지 모두 당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 안의 가장 선한 것, 가장 강한 것을 긍정하세요! 그러면 이미 상당한 진보를 이룬 것입니다.
현재 당신들이 할 일은 바로 명확히 깨닫는 것입니다. 명확한 계획을 실행하고, 그 일에 헌신해야 합니다. 이 순간에 당신들의 과제는 우리 문인들의 과제보다 훨씬 더 명쾌하고, 훨씬 더 필요하며, 훨씬 더 중요합니다. 상황은 다시 변할 것입니다. 이미 종종 변했듯이 말입니다.  (...) 당신은 개성적인 존재가 되어가는 중에 있어요. 그 길을 또한 계속 가야 할 거예요. 나는 개인으로서, 개성으로서의 인간을 중요하게 생각해요. 그런데 보아하니 요즈음 이 길을 가는 것은 내가 젊었던 시절보다 더 힘든 것 같아요. 하지만 그 길의 의미는 변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 길의 모습도요. 왜냐하면 사실 인간의 운명이란 것은 몇백 년이 지나도 거의 변하지 않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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