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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란드리아 Jun 17. 2024

황석영 <철도원 삼대>


올해 인터내셔널 부커상 최종 후보 (숏 리스트)에 황석영 작가의 <철도원 삼대>가 올랐다는 소식에 의아했다. 작년에 천관명 작가의 <고래>가 최종 후보까지 올랐을 때 느꼈던 의아함 못지않았다. 


영문 번역본을 읽어보진 않았지만 두 작품 모두 영어로 번역했을 때 원작의 느낌을 충실하게 살리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번역의 수준이 높았겠지만, 그것과 원작의 느낌은 별개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철도원 삼대>는 한국현대사에서도 가려진 내용들을 소재로 하고 있기에 (예전 같았으면 금서로 지정되었을) 한국인들조차도 생소하거나 거부감을 느낄 수 있는 내용이다. 그러니 한국현대사를 거의 모르는 외국인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래서 'goodreads'에서 외국인들의 독서평을 찾아보았다. 참고로 번역본 제목은 <Mater 2-10>인데, 작품을 읽어본 분들이라면 이 제목의 의미를 알 것이다. 이는 작품 내에 등장하는 기관차의 모델명이자 현재 임진각에 전시되어 있는 '마터 2형 10호차'를 의미하며, 그 자체로 남북 분단 현실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 작품이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후 한국전쟁을 거쳐 현재까지 약 100여 년간의 시간을 아우르며, 이념 갈등에서 비롯된 비극적 사건을 제목에 담고자 했을 것이다.


황석영 작가는 처음에 이를 작품이 제목으로 정했지만, 독자들이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다 차선책으로 <철도원 삼대>로 정했다고, 아쉬움을 토로한 바 있다. 그런데 영문판 제목은 그걸로 했나 보다.


일단 평점은 3.65/5이다. 2024년 6월 17일 현재, 69개의 리뷰가 있었고 279명이 평점을 매겼다. 외국인들이 리뷰는 대체로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었다. 외국인들에게 공감을 얻기 어려웠을 것으로 생각된 것이 맞았다.


그럼에도 혹시나 하는 기대감은 있었다. 만약 인터내셔널 부커상을 수상한다면 정말 이변이 아닐까 싶은. 하지만 이변은 없었다.


국내에선 어떨까. 유감스럽게도 이 작품은 국내에서도 대중적인 인기를 얻지는 못한 듯하다. 하긴, 확실히 대중성을 갖기는 어려운 작품으로 보인다. 만약 황석영 작가의 작품이 아니고, 이번에 인터내셔널 부커상 후보에 오르지 못했더라면 작품성만으로 성공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아쉽다. 나도 이 책이 출간된 지 몇 년 지나서야 책을 읽기 시작했고, 책을 읽던 중에 부커상 후보 소식을 들었다. 수상자 결정이 나기 전에 다 읽으려 했지만 책 자체도 쉽게 읽히진 않았고, 개인적인 일들로 너무 바쁘다 보니 결국 이제야 완독을 하게 되었다.




제목에서 철도원 '삼대'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4대의 이야기다. 그러나 이백만-이일철-이지산으로 이어지는 3대는 철도에서 일을 하였기에 이들을 철도원 삼대를 지칭할 것이며, 이진오는 노동자이지만 철도가 아닌 금속노조였으므로 (하지만 업무에서는 증조부인 백만과 더 가까운 듯한) 제외했을 것이다. 참고로 진오를 중심으로 인물 관계를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이 책은 진오의 고공 투쟁으로 시작한다. 그는 사측의 부당해고와 위장폐업에 항의하기 위해 발전소 굴뚝 위에 올라가 홀로 400여 일을 견뎌낸다. 


그는 자신이 외계인이라고 상상해 보았다. 그렇지 않은가. 이곳은 하늘도 아니고 땅도 아니다. 여기는 사람이 거처하는 공간이 아니다. 이 좁은 원둘레는 지상의 일상과 시간을 벗어난 우주선의 조종실 같은 곳이다. 그는 죽지 않고 여기 살아 있으나 세상은 그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그는 남들에게는 언젠가 돌아올 여행 중에 있는 사람과 같았다.


그러던 중 외로움과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페트병에 자신이 알던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 놓는다. 증조할머니 주안댁, 할머니 금이, 어릴 적 친구 깍새, 함께 투쟁하던 진기, 그리고 과거에 만난 적이 있었던 노동자 영숙.  진오는 그 페트병에 말을 걸고, 그들에 대한 기억이 (그리고 환영이) 이진오를 찾아온다. 


그래서 크게 보면 진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그 이전 3대의 이야기, 그리고 진오의 기억과 환영이 액자식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비중으로 보면 일철과 이철 형제의 이야기가 가장 높고 또 중심을 이룬다고 볼 수 있다.


아무래도 등장인물이 많고 사건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에 초반에는 집중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다. 그러면서 '철도 얘기는 언제 나오나?' 싶기도 할 것이다.


일제강점기를 다룬 소설들은 당시에나 지금이나 대체로 일본인 지주나 자본가의 수탈, 도시 빈민이나 농민들의 삶, 독립운동, 친일파 등 대체로 어느 정도 알려진 혹은 틀에 잡힌 내용들이 많았던 것 같다. 그러나 누구에게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작품의 전개나 감정의 이입은 달라질 것이다. 


철도 노동자의 이야기는 백만이 철도 작업장에서 일을 하면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면서 주안댁과 결혼하게 된 이야기, 일철과 이철 형제를 낳고 이름을 그렇게 지은 이유가 나오며, 일철, 이철 형제의 이야기가 시작되면서부터는 마치 기관차가 달려가듯이 거침없이 진행된다.




이 작품은 노동자들의 이야기다. 일제강점기, 해방 직후, 그리고 현재의 노동자들의 이야기다. 각각의 시대에 노동자들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일제강점기에도 노동자들이 있었고 노동운동이 있었다. 그런데 당시는 현재와 몇 가지 점에서 차이가 있다. 1920~30년대는 소비에트 혁명의 영향으로 인해 식민지 조선과 일본에도 사회주의 사상이 널리 퍼져 있었고, 코민테른의 '일국일당' 원칙은 당시 식민지 조선 내 사회주의운동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이는 민생단 사건과 같은 역사의 비극을 낳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나라만의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 전 세계적인 현상이었다.


일제의 탄압이 심하던 가운데서도 사회주의는 식민지 조선 내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지만 계파 간 갈등이나 조직력이 약한 한계를 극복하기는 어려웠다. 게다가 독자적인 활동을 하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시대상을 생각해 보면 사회주의가 식민치하의 희망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100여 년 간을 이어온 그 갈등을 아직 해결하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당시 노동운동은 직접적으로 일본인 자본가 (그리고 일부 친일파)들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그 밑에서 관리하는 계층에 대한 불만이 더 컸고, 이로 인해 분규가 일어나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저임금, 장시간 고강도 노동, 열악한 노동환경, 일본인과의 차별, 그리고 중간에서 돈을 가로채는 작당 등 쌓인 불만이 커져서 발생한 것들이 많았다. 


일제는 이 또한 폭력을 동원해서 강력하게 탄압하였다. 그러다 보니 이런 노동운동은 자연스럽게 독립운동과도 연결되었다. 결국 그 모든 원인은 일제 식민지였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었기에.


“독립운동과 계급운동은 다른 일인가요?”

“나에게도 그게 항상 문제였습니다. 우리는 두 개의 무거운 철쇄에 묶여 있어요. 일제의 식민 억압과 부르주아 사회체제입니다. 근로대중의 투쟁을 불러일으키고 일제와 싸우는 과정에서 그 두 과제를 자연스럽게 해결해 나갈 수 있다고 봅니다."


해방 이후는 어떤가? 일제강점기 때보다는 나아졌다고 해도 본질적인 문제는 잔존한다. 그것이 1970년대의 고도 성장기를 지나 1980년대를 맞아 노동운동의 분수령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현재에 이르렀다.


지금도 노동운동을 한다고 하면 '빨갱이'로 취급하는 사람들이 많다.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 중에서도 그런 좌익 인사들은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고, 특히 북한 쪽 인사들이나 월북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언급하는 것조차 금지됐었다. 그나마 2000년대 들어서야 그러한 것도 자유로워졌지만, 아직도 냉전시대, 군사독재 시절의 반공논리에 갇혀 사는 이들이 많다. 그게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착취하는 일본인 자본가들에게 항거하는 것은 옳은 일이고, 같은 한국인 자본가들과 부당한 노동환경에 항거하는 것은 '배부른 소리'인 것인가? 노동자들의 투쟁은 단지 '골수 빨갱이들'이 배후조종해서 일어나는 것인가? 그러다 보니 <철도원 삼대>의 경우에도 그런 식으로 매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책에 등장하는 가족의 이야기는 허구다. 하지만 사회주의활동, 노동운동을 했던 사람들 중에는 실존인물들도 있다. 작품에서는 이렇듯 실제와 허구를 섞어서 사실감 있는 서사를 이루었다. 특히 이철의 활동에 대해서는 마치 논픽션 자료를 읽는 듯한 기분도 들었으니.


게다가 작품 내에서는 사회주의자들이 사용하던 용어, 은어들이 다수 등장하기에 (러시아어를 그대로 쓴 것도 있다) 뜻을 짐작하기 어려운 것은 검색을 해보기도 했었다. 작가는 일부러 그러한 용어를 쓴 것으로 보이며, 이 역시 사실감을 높이기 위한 것이리라.




작품 내에서 중요한 소재가 되는 것은 역시 '철도'다. 이백만은 철도 단순노동자였으나 일철은  기관사 교육을 받고 정식 기관사가 되었다. 그의 아들 지산 역시 기관사가 된다. 그러다 보니 철도 노선, 기차에 대한 얘기가 많이 나오는데 당시의 기차 노선과 분위기에 기반한 것이지만 이 역시 현재와는 다른 느낌을 준다.


특히 작품에서 중요한 장소가 되는 영등포, 인천의 경우에는 내게는 익숙한 곳이라서 100여 년 전의 모습을 상상해 보기도 했었다. 그곳들 모두 철도를 기반으로 발달한 지역들이기도 하다.


또한 당시, 그리고 현재의 여성들의 모습 또한 다양하게 그려졌다. 가족 내에서는 주안댁(유일하게 이름도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다), 금이, 막음이 고모, 복례가 있었고, 이철과 정식 부부는 아니었지만 아지트 부부로서 함께 살면서 아들 장산까지 낳았던 여옥, 그리고 선옥, 금순 등의 이름들. 여기에 유일하게 최근의 인물로서는 진오가 페트병에 적기도 했던 영숙까지. 특히 영숙은 이전에 크레인 농성으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물론 허구의 인물이다) 


작가는 그러한 여성들의 모습을 단순히 가부장적이고 남성중심적인 사회에 대한 저항으로만 그리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 함께 사회의 모순에 저항했던 인물들로 그리고자 했다. 그럼에도 여성들의 모습이 소모적으로 그려진 듯한 부분도 있는 듯해 아쉬운 점이 있었다.


이름도 없고 가난하고 힘도 없는 사람들이 저희가 겪은 억울한 일을 세상 사람들과 공유할 길은 험한 상황을 버텨내는 길고 긴 과정을 보여주는 수밖에 없었다. 온 세상은 우리의 편이 아니며 겨우 한 발짝씩 아주 느리게 변할 뿐이라는 것을 누구나 잘 알게 되었다. 그는 가만히 불러본다. 영숙이 누나.




작가는 작품 내 소재와 장소 등의 고증을 위해서 많은 자료와 증언을 참고하였다고 한다. 비록 사실과는 다른 부분도 있을 수는 있겠지만 이것이 소설이라는 점에서 한계가 있을 수 밖에는 없을 듯하다. 그래, 어디까지나 소설이니까.


하지만 단순히 소설인 것만은 아니다. 이것은 과거 우리의 역사였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현실이다.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는 여전하고 해결은 쉽지 않다. 그리고 공산주의의 유령은 지금도 우리 사회를 떠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지를 못하지만, 그에 발작적인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에게만 반응할, 그런 유령이다. 누군가는 추종하고 누군가는 잡으려 하는 그런 유령. 


그런 의미에서 <철도원 삼대>는 <공산당 선언>의 해설서라고도 볼 수 있을 있지 않을까. 거기에 우리의 현대사와 현실을 가미한.


황석영이라는 이름과 <철도원 삼대>라는 제목이 주는 느낌답게 아주 묵직하고 아픈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곳곳에서 그의 유머가 드러나기도 한다. 쓰기 어려운 주제로 서사를 밀고 나간 것은 역시나 작가의 역량이 컸다고 할 수 있겠다. 더구나 그도 30 년 이상의 시간을 들여 완성한 작품이라고 하니 얼마나 공을 들였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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