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망스럽다. 애초에 내가 이 책에 대해 어떤 기대를 했는지도 잊어버릴 정도로, 이 책은 실망스러웠다.
나도 30년 전 대학 새내기 시절에 유시민 작가의 책을 처음 접한 이래로 지금까지 그의 책들을 꽤 읽었고, 통찰력을 느끼거나 도움이 되는 부분들이 있었다. 그래서 그의 신간이 나오면 일단 관심을 갖는다. (이 책도 산 지 1년 만에 읽은 셈이지만)
그의 책들은 대체로 무난하며 팬층도 두터워 신간이 나오면 대체로 베스트셀러가 된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한계에 이른 것이 아닌가 싶다. 그의 책들은 대부분 30여 년 전 그가 처음 이야기했던 것들의 변주였고, 자기 복제에 가깝게 느껴진다. 특히 정계에서 은퇴한 이후에는 '생계형 작가'가 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다작과 방송출연에 전념하는 듯하다. (그는 정계 입문 전에도 원래 작가이기는 했다)
그는 스스로를 '지식 소매상'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리고 그 말에 충실했다. 그는 인문학의 여기저기에서 조금씩 지식을 떼어다가 일반 독자들에게 전달하곤 했다. 물론 그러한 활동이 갖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그의 이름값만으로도 그러한 지식들이 보급된 효과가 있으니까.
하지만 그의 책들의 독자층이 대체로 그러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아니며, 문외한인 경우도 많았다. 게다가 유시민 작가는 자신이 이야기하는 범위를 더 넓혀 나갔다. 그것이 그의 무리수였다. 그가 영역을 넓혀 나갔지만, 그러한 소재와 주제들은 결국 그가 가장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영역으로 끌어당겨진다. 결국엔 자기 복제를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책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이 '문과 남자'임을 자처하면서도 '과학 공부'를 하게 된 사연을 털어놓았고, 여러 책을 읽은 후 그것이 자신의 인문학 지식과 어떻게 맞닿아 있는 지를 깨닫고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했다.
그는 같이 방송에 출연했던 김상욱 교수의 조언에 따라 과학책들을 읽게 되었다고 했는데 그 이전에는 과학에 관심을 갖거나 과학책을 읽어본 적은 없다고 했다. 리처드 파인만에 대해서도 처음 들어봤다고 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싶지만, 사실이든 아니든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는 과학책들을 읽으며 여러 가지 충격에 빠졌거나, 혹은 자신이 찾던 답의 상당수가 과학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러한 경험을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었다고 했다.
‘거만한 바보’를 그만두기는 쉬웠다. ‘난 아는 게 별로 없어.’ 그렇게 인정하고, 내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점검하는 습관을 익히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래봤자 크게 나아진 건 없었다. ‘정직한 바보도 바보는 바보 아닌가. 나이 오십에 바보라니.’ 자괴감이 들었다. 그래서 과학 공부를 시작했다. 공부래야 별건 아니었다. 과학교양서를 읽으면서 생각하고 느낀 게 다였다. 그래도 꾸준히 하니 바보는 면한 것 같다. 그게 자랑이냐고? 그렇다. 나는 ‘운명적 문과’다. 그 정도만 해도 뿌듯하다. 어디 자랑하고 싶다.
하지만 그는 결국 과학책 몇 권을 읽고 그것들을 '수박 겉핥기'로만 이해했음을 고백한다. 좀 더 어려운 내용은 '나는 문과니까 패스~'라고 하며 넘어간다. 심지어, 그가 각각의 이론들에 대해서 정리한 것도 그가 읽은 책에 나온 내용들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책을 이공계생들이 보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도 밝혔다.
그의 전작들에 대해선 그래도 어느 정도 옹호해 줄 수 있다고 쳐도 이 책은 그렇게 봐줄 수가 없다. 이는 결국 내가 '뼛속까지 이과'이기 때문일 것이다. 과학적 사고와 과학적 방법론에 찌든 전형적인 이과생. 그래서 이 책을 비판적으로 대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그가 소개한 책들의 대다수는 마침 나도 읽어 보았던 터라 그가 그 책들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도 알 수 있었기에.
이 책의 부제는 "나는 무엇이고 왜 존재하며 어디로 가는가?"이다. 이는 흡사 에드워드 윌슨의 <지구의 정복자 -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의 부제를 떠오르게 한다. 유시민 작가가 이 책을 알았을까? 아니, 이 책을 몰랐더라도 폴 고갱의 동명의 작품 제목은 알았으리라 생각한다. 윌슨 역시 폴 고갱의 작품을 보면서 이러한 부제를 떠올렸다고 하니까.
에드워드 윌슨은 <통섭>의 저자이자 사회생물학의 대가였다. 그는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결합을 강조했고, 그 방법론이자 목표가 '통섭'이었다. 통섭에 대해서는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에서도 소개된 바 있다. 하지만 윌슨의 통섭과 유시민의 통섭은 다르다.
윌슨은 평생을 생물학 연구에 매진했으며, 그 분야의 대가였지만 인문학에서도 조예가 깊었다. 그렇기에 그가 마지막에 저술한 작품에까지 그의 철학을 확고하게 담았다. 물론 그가 주장하는 바에 대해서는 꼬장꼬장함이 느껴지거나 혹은 '꼰대'같은 소리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윌슨과 같은 반열에 오를 정도가 돼야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일 것이다. 반면 그가 쓴 <젊은 과학도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는 선배 연구자로서 후배들에게 보내는 애정이 느껴지기도 했다.
유시민의 경우에는 반대쪽에서 자연 과학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수준의 차이가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니 이번 책은 확실히 그의 무리수였다는 것이 더 느껴진다.
이 책에서는 뇌과학-생물학-화학-물리학-수학의 순으로 내용을 배치했다. 이러한 순서는 타당하며, 일반적으로 많이 통용되는 순서이기도 하다. 이는 '환원주의'의 관점이다. 저 배치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갈수록 더욱 근원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오른쪽을 이해한다고 해서 왼쪽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환원주의의 한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학 공부 이야기를 남한테 하는 건 그렇게 할 수 없다. 나 같은 문과 독자가 알아들을 수 있게 해야 한다. 과학과 인문학은 연구 대상과 연구 방법이 다르다. 쓰는 말과 사고방식도 같지 않다. 과학자는 현상을 관찰하는 데서 출발해 실험과 분석과 추론으로 대상의 실체에 다가선다. 그렇지만 연구 결과를 이야기할 때는 반대로 한다. 자신이 알아낸 대상의 본질을 먼저 밝히고 그것이 어떻게 우리가 인지하는 현상을 만들어내는지 설명한다. 소금물 이야기가 그랬다. 원자의 구조에서 출발해 공유결합과 이온결합을 거쳐 소금 결정의 해체와 복원 과정으로 나아가면서 소금 용해 현상을 설명했다. 그것이 과학 ‘스토리텔링’의 패턴이다.
그런데 그는 저 순서의 가장 왼쪽에 인문학을 두고 싶어 했던 것 같다. 그는 여러 책에서 본 내용을 조금 가져오고 거기에 자신의 생각으로 살을 붙인다. 애초에 자신의 생각의 근거 혹은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그러한 과학 이론들을 가져왔지만, 이는 '취사선택'에 지나지 않았다. 과학 연구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편향성이다. 내가 맞다고 가정하고 그에 맞는 증거만 모으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유시민 작가도 언급했듯이, 과학은 틀릴 수 있는 학문이며, 틀렸을 때 그것을 인정하는 학문이다. 또한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것이 과학이다.
과학자는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지만 철학자는 모른다는 말도 무언가 아는 것처럼 한다. 과학자와 인문학자는 무엇보다 그런 면이 다르다. 나는 그게 인문학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과학으로 증명한 사실만 책에 담아야 한다면 국립중앙도서관 따위는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과학 공부를 한다고 했으면서도 이를 반대로 적용했다. 그는 자신이 맞다고 하기 위해 과학 이론을 가져왔는데 사실 그가 인용한 내용들 중에는 틀린 것으로 밝혀진 것들도 많다. 특히 뇌과학이나 생물학 분야에서 그러한데, '거울뉴런'은 현재는 근거가 부족하여 이론으로서는 폐기 직전인 상태다. 하지만 이는 인간의 공감능력을 설명하는 가설로서 사람들의 믿음에 부응하기 때문에 아직 살아남아 있을 따름이다. 또한 해밀턴의 '포괄적합도'이론 역시 틀렸다는 것을 에드워드 윌슨이 증명해 보인 바 있다.
물론 정립된 이론이나 그에 반대되는 주장 역시 모두 틀릴 수 있다. 그러나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과학 이론은 틀릴 수 있다는 가정을 기저에 깔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이론이 맞다고 믿고 그에 따라 자신의 생각을 내세운다면 그러한 사상의 전개 역시 사상누각이 되지 않을까? 유시민은 그런 점에서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 셈이다. 그러므로 그가 과학적 사고를 가졌더라면 그와 관련된 다른 주장 혹은 여러 이론들을 좀 더 객관적인 시각에서 봤어야 했다.
그의 그러한 시도조차 물리학이나 수학의 단계로 넘어가게 되면 한계에 이르렀음이 보인다. 앞에서 이미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다 해서인지 여기에서는 읽은 책들의 요약, 그리고 소감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더 실망스럽다. 책의 부제가 너무 거창하다. 차라리 '과학에 관한 인문학 잡담' 정도로 했더라면 기대감이 낮았거나 없었을 수도 있겠다. 또한 그가 계속 자신이 문과라는 것을 강조하고 이분법적으로 끌고 나간 것에 대해서도 유감이다.
그는 이 글들을 자신의 일기장이나 블로그 정도에나 적어두는 것이 적당했을 것이며, 대중서로서 펴내기에는 부족하다.
이 책에 대해 너무 혹평한 것일까? 하지만 이것이 이과생의 솔직한 소감이다. 이공계를 전공한 이들이라면 대체로 그렇게 느끼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그를 탓하지는 않는다. 이번에도 그는 그의 역할을 했고, 그의 독자들이 원하는 수준 정도에 맞췄다. 그게 그가 할 수 있는 만큼이다. 이 책에 실망한 것은 그 이상을 기대한 나의 바람 때문이었다고 해 두자.
하지만 인문학과 자연과학 모두를 공부해야 한다는 그 말에는 공감한다. 그게 나의 모토이기도 하니까. 나는 30년 이상 이과 공부를 해왔지만 인문학 분야에 늘 관심이 많았고, 지금은 문과 공부를 하고 있다. 그렇기에 문과 이과의 구분,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구분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그러한 구분 자체가 없어져야 한다. 우리는 어느 한쪽에만 서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양쪽 모두에 발을 걸치고 서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같은 주제에 대해서 내가 그보다 더 잘 쓸 수 있는 자신은 없다. 어쨌거나 그는 천상 글쟁이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의 애독자 중 한 사람으로서 솔직한 소감을 남기는 바다.
어떤 과학자가 혹시라도 읽는다면 ‘바보’를 겨우 면한 문과 남자의 무모한 도전을 너그럽게 보아주기 바란다. 그래도 과학커뮤니케이터에게는 참고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훌륭한 과학교양서를 쓴 과학자와 전문작가들은 크게 힘들이지 않고도 수학과 과학을 공부했을 것이다. 문과 사람들이 어떤 대목에서 왜 힘들어하는지 아는 게 양자역학을 이해하는 것보다 그들에게는 더 어려울 수 있다. ‘운명적 문과’가 과학의 사실과 이론을 어떤 눈으로 이해하고 해석하고 활용하는지, 때로는 얼마나 비과학적으로 과학을 대하는지 아는 데 도움이 되면 좋겠다. 그걸 알면 문과한테 조금이라도 더 가깝게 다가서는 과학교양서를 쓸 때 참고할 수 있을 테니까.
과학을 공부하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생각하고 느꼈다. 가장 중요한 것이 무언지 짚어 보았다. 인문학의 가치와 한계를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본문에서 누차 말했지만 과학에는 옳은 견해와 틀린 견해, 옳은지 틀린지 아직 모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인문학에는 그럴법한 이야기와 그럴듯하지 않은 이야기가 있을 뿐이다. 인문학 이론은 진리인지 오류인지 객관적으로 판정할 수 없다. 그게 인문학의 가치이고 한계다. 한계를 넓히려면 과학의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고, 가치를 키우려면 사실의 토대 위에서 과학이 대답하지 못하는 질문에 대해 더 그럴법한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우리 자신을 이해하려면 과학과 인문학을 다 공부해야 한다.
나는 스무 살부터 30년 동안 인문학만 공부했다. 과학자들이 찾아낸 우주와 자연과 생명과 인간에 대한 사실을 모르고 살았다. 중요한 사실만이라도 알았더라면 어렵지 않게 답을 찾을 수 있었을 질문까지 다 껴안고 때로는 출구 없는 미로에서 방황했다. 답이 아닌 것을 정답이라 여기며 시간과 열정을 헛되이 소모했다. 주어진 환경에서, 운명으로 받은 모든 것을 껴안고, 존재의 의미를 찾으려고 최선을 다하려다 그랬던 것이라 후회는 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시 스무 살로 돌아간다면 인문학과 함께 과학도 공부하고 싶다. 인생의 막바지에 접어드는 시점에서 이런 아쉬움을 느끼는 문과가 없기를 바라면서 과학에 관한 인문학 잡담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