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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란드리아 Jun 26. 2024

연지원 <교양인은 무엇을 공부하는가>


토머스 헉슬리는 ”Try to learn something about everything and everything about something“이라고 말했다. 이는 내가 모토로 삼고 있는 말이며 지금까지 이것을 이루기 위해 계속 공부해 온 셈이다. 여기서 굳이 따져보자면 ‘something about everything’은 교양을, ‘everything about something’은 전공을 의미할 것이다. 


직업을 갖기 위해서는 전공을 잘 아는 것이 중요하겠지만, 인생을 살아가면서는 교양을 잘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 물론 이 두 가지는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병립하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교양의 중요성을 간과한다. 그래서 학창 시절에 많은 것들을 배웠지만 다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하여 잊어버리고 산다.




<교양인은 무엇을 공부하는가>는 교양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책이다. 1부에서는 ‘왜 리버럴 아츠인가’라는 제목으로 되어 있으며, ‘교양=리버럴 아츠’라는 개념으로 교양 및 교양 공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2부에서는 ‘교양인은 어떤 사람들인가’라는 제목으로 ‘교양인’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3부는 ‘지적인 전통으로부터 배우기’이며, 과거 중세 시대부터 현대까지 교양 교육이 어떻게 진행되었으며 어떻게 교양을 형성할 수 있는가를 소개한다. 이어 4부에서는 '무엇이 21세기의 교양인가’, 5부에서는 '교양인의 7가지 공부법’을 소개하였다. 4부와 5부는 다소 실용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춘 듯하다.


저자는 리버럴 아츠를 ‘인문학’으로 옮기는 것에 대해 아쉬움을 표한다. 리버럴 아츠가 인문학뿐만 아니라 사회과학, 자연과학, 예술과 기술 개념까지 아우르는 것이므로 더 넓은 의미이며, 그 두 가지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즉, 리버럴 아츠는 ‘융합’ 학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이 모두를 관통하는 핵심은 역시나 인문학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저자는 일반적인 대중을 염두에 두고 이 책을 썼다. 아마도 교양의 중요성을 알리고, 교양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면서 미국의 리버럴 아츠 컬리지의 사례를 언급했고, 하버드나 예일뿐만 아니라 국내 일부 대학에서의 교양 과목 시스템에 관해서도 얘기하였다. 


하지만 그런 시스템적인 측면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국내에서도 일부 대학에서는 교양학부를 운영하고 있는데, 이는 특별히 전공이라고 할 분야가 없이 인문학 전반에 대해 배우는 곳이다. 이 책에서 얘기하는 리버럴 아츠와 잘 접목되는 곳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는 일부 사례일 뿐이다.


우리는 21세기에 살고 있으며 과거의 리버럴 아츠를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래서 저자는 4부에서 무엇이 21세기의 교양인지를 제시하고 각각을 어떻게 배울 것인가를 세세하게 이야기하였다. 이 책에서 제시한 21세기의 교양은 전통적인 영역에서의 교양인 인문학과 예술뿐만 아니라 세계시민 의식, IT, 지리학, 긍정심리학 등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며, 교양인이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지식과 태도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저자의 주장에 대해 대체로는 동의하지만, 긍정심리학에 대해서는 다른 범주와 달라서 과연 갖추어야 할 교양인지 의문이 든다. 저자는 긍정심리학이 사이비 학문이 아닌 실증적인 연구에 바탕을 둔 과학적인 학문이라고 하였지만 그 목적성 때문에 순수해 보이지는 않는다. 자연과학이나 지리학 등은 학습을 통해 익힐 수 있지만, 긍정심리학은 굳이 익힌다기보다는 그러한 믿음을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선택의 문제로 보이기 때문이다. 과연 긍정심리학을 교양의 영역에서 익힐 수 있는 것인지는 개별 독자의 판단에 맡겨야 할 것 같다.


또한 교양인이란 단순히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지식을 바탕으로 품위를 갖추고 삶의 본질을 이해하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이를 위해 능동적이고 개방적이며 호기심을 잃지 않는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중요하게 새겨두어야 할 내용이라고 본다. 나도 그렇기 위해 노력하지만, 더 큰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저자는 과학적 방법론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과학적 탐구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 교양인의 중요한 소양 중 하나임을 보였다. 과학적 방법론을 이해하고 이를 통해 세상의 본질을 탐구하는 것은 중요하다. 나는 그동안 이공계 분야를 공부하였으며 현재도 융합과학 분야에서 일하고 있기에 과학적 방법론은 누구 못지않게 익숙한 편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 과학적 방법론을 언급한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예술의 본질에 대해 언급한 부분도 핵심을 상기시켜 주었다. 예술은 내용이 아닌 형식에 그 본질이 있으며, 예술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내용의 영향력을 증대시킨다. 그러므로 같은 주제에 대해 문학, 음악, 미술 등 여러 형태로 표현하더라도 형식과 내용 모두 신경을 써야 한다. 특히 문예창작을 목표로 하는 학생의 관점에서 기억해 두어야겠다.


5부에서는 교양인의 공부법을 일곱 가지로 정리하여 제시하였는데 중요한 키워드만 나열해 보자면 태도, 언어, 문법, 얼개, 독해, 토론, 공감 등이다. 물론 이러한 공부법을 제시하고 실천을 요구한 것은 필요한 부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실천적인 부분을 강조하다 보니 이 책의 전체적인 흐름이 인문학 분야에서 여느 자기계발서로 갑자기 바뀐 것 같은 느낌도 든다. 나는 실천을 강요하는 부분들 때문에 자기계발서를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저자가 제시한 공부법들은 과연 얼마나 차별성이 있으며 효용성이 있을까? 이 책의 주제 때문이긴 하지만 그는 ‘교양인’이 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교양인이 기본적으로 가져야 할 태도로 능동성, 개방성, 호기심을 이야기했는데 이는 무엇을 하든 가장 기본이 될 것이다. 이어지는 언어, 얼개, 독해 등은 독서와 관계된 부분이며, 언어와 토론, 공감 등은 소통에 대한 것이면서 정신적인 활동이기도 하다. 


‘문법’에서 나온 22개의 근본개념은 103개의 신토피콘 중에서 추린 것이다. 저자가 임의로 추린 것은 아니고 그러나 개개의 근본개념을 익히는 데만 해도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니 22개 자체도 적다고 하기는 어렵다. 


저자가 가장 강조하는 공부법은 독서이다. 어찌 보면 일곱 가지의 공부법이 모두 독서와 연관되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이야기하는 독서는 일반적인 독서가 아니다. 독서의 목적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는 교양인이 되기 위한 독서를 말한다. 취미로 책을 읽거나 전문성을 쌓으려는 독서와 달리 교양 공부에서는 많은 책을 무시해야 한다고 하며, 세월의 검증을 통과한 명저 읽기는 교양으로 쌓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잊히고 말 책을 읽는 일은 교양과 무관하다고 하였다. 


또한 독서하면서 위상과 개요를 파악하라고 하였으며 이는 총체적 시각과 지적 얼개와도 연관된다. 하지만 독서가 그러한 목적성을 가져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수긍하기 어렵다. 그가 독서의 단면만 강조한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다.




비단 최근의 일만은 아니지만 인문계는 늘 위기라고 한다. 대학에서 인문계열을 전공하고 졸업해도 취업하기가 어려워 다들 피하거나 인문학의 ‘무용론(無用論)’을 얘기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사회에서는 인문학 서적이나 강의 등이 마치 자기계발서와 비슷하게 주목받고 있다. 이는 교양의 필요성을 그만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사람들도 ‘최소한의 교양은 갖고 있어야겠다’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러지 못하는 것에 대한 동경을 표현하는 듯하다.


이러한 교양은 특정 계층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이에게 필요한 것이다. 교양은 고리타분하거나 판에 박힌 지식이 아니고 자기 과시용 지식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지식이 아니라 행동이며, 자유롭게 살기 위해 필요한 덕목이다. 자유에는 책임도 따른다. 그렇다면 교양을 익히는 것은 그 책임에 대해 배우는 것이기도 하다. 사람으로서 알아야 할 최소한인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교양 공부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며 즉각적인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다. 마치 우리 몸속의 혈관과 같아서 꼭 필요하지만 드러나 보이진 않는다. 그러나 피가 우리 몸을 돌며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하고 노폐물을 치우듯이 교양도 우리를 숨 쉬게 하고 살아가게 하는 것이다.


사회 전반의 여건과 사람들의 인식이 받쳐주지 못한다면 교양, 인문학교육은 단발성이 그칠 가능성이 크며 마치 반짝 유행처럼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 결국 그러한 교양 교육은 개인의 몫으로 소급된다. 설사 그러한 교양 공부를 하는 사람에게 ‘교양인’이라는 칭호까지 붙여주며 독려한다고 해도 그럴 마음이 없는 사람이 대부분인지라 이러한 현실이 아쉬울 따름이다.


또한 교양인은 혼자서는 의미가 없다. 이는 마치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혼자 볼 수 있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 아닐지 싶다. 혼자가 아닌 모두가 교양인이 될 때 그 진가가 발휘될 수 있다. 저자가 바라는 것은 한 사람이라도 더 자신의 의견에 따라서 교양인이 되는 노력을 하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 사회가 좀 더 건전하고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곳이 되기를 바라는 듯하다. 나도 이에 동의한다. 교양인은 특권을 가진 계층이 아니라 가장 기본적인 소양을 갖춘 사람들이며 그러한 소양을 갖도록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저자가 책 한 권 분량을 통해 애써 교양과 교양인의 중요성을 설파했지만, 이 책을 다 읽고 난 뒤에도 여전히 ‘그래서 왜 교양인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사라지지 않는다. 


이 책에서는 많은 것들을 제시하려고 했다. 물론 좋은 얘기들이다. 하지만 이상적인 모델이 현실에서 제대로 작동하기란 쉽지 않다. 교양도 결국 먹고살 만해야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조선시대의 서민들에게 글공부할 여력이 있었을까? 그러다 보니 교양은 우선순위에서 밀릴 수밖에 없고, 대학에서도 교양보다는 전공에 더 주력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전공이 더 구체적인 성과가 있으니까. 그래서 교양 공부는 여유 있는 자의 취미 생활 정도로 여겨질지도 모른다. 


저자는 독서의 중요성을 설파하면서도 기존의 통념과는 다른 방식을 제안하는데, ‘소수의 중요한 책들을 독파하는 것’이 중요하며 결코 읽는 데서 그치지 말고 그 내용을 되새기고 계속 생각해야 내 것이 된다고 강조한다. 그 말에 동의한다. 책은 많이 읽는다고 좋은 것만은 아니고 소수의 좋은 책을 계속 읽어 그 의미를 깨우칠 수 있다면 자신에게 더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소개된 책들을 다 읽어보지는 못하겠지만 몇 권이라도 읽어보며 고전의 가치와 교훈을 깨달아야겠다.


또한 이 책에서 제시한 내용 중에서 납득하기 어려운 것들도 있었지만 대체로는 받아들일 만한 것들이었다. 이는 내가 기본적으로 호기심이 많으며 적극적이고 무엇보다 독서를 좋아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부족한 부분은 더 채우고, 넓고 깊게 볼 수 있도록 해야겠다. 무엇보다 열린 마음을 갖는 것이 필요하겠다. 이는 포용성과 겸손을 둘 다 의미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교양인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여기에서 언급한 노력은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과정에서 얻는 것도 많다. 비록 방향성은 조금 다를 수 있지만 넓게 보면 교양인이 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당연하겠지만 교양은 하루아침에 길러지지 않는다. 계속 관심을 두고 꾸준히 공부하고 익혀야 하는 것이다. 그 과정이 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 비록 용두사미가 될지언정, 아예 시작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를 교양인으로 생각하며 교양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에 대해 계속 생각하며 실천하는 것이다. 


앞으로의 교양 교육 여건이 갑자기 더 좋아질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인간이 살아가는 한 결국에는 인간성의 문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으므로 교양, 즉 리버럴 아츠의 중요성이 더 중요해질 날도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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