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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란드리아 May 27. 2024

뤼트허르 브레흐만 <휴먼카인드>

인간의 본성은 과연 악한 것인가?


프롤로그 - 인류 보편의 속성


1장 새로운 현실주의 : 인간 본성에 대한 새로운 도전

2장 파리대왕 : 진실은 소설과 정반대였다


1부 자연 상태의 인간

3장 호모 퍼피 : 가장 우호적인 존재의 탄생

4장 사격을 거부하는 병사들 : 전쟁은 본능이 아니다

5장 문명의 저주 : 권력자가 만들어낸 상상

6장 이스터섬의 수수께끼 : 잘못된 인용과 확대 재생산


2부 아우슈비츠 이후

7장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의 진실 : 그곳에선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8장 스탠리 밀그램과 전기충격 실험 : 의도된 결말

9장 캐서린 제노비스의 죽음 : 언론이 만든 ‘방관자 효과’


3부 선한 본성의 오작동

10장 공감의 맹목성 : 거리가 멀어질수록 공격은 잔인해진다

11장 권력이 부패하는 방식 : 후천적 반사회화

12장 계몽주의의 함정 : 비관주의의 자기 충족적 예언


4부 새로운 현실

13장 내재적 동기부여의 힘 : 경제적 보상의 한계

14장 놀이하는 인간 : 우리 안의 무한한 회복탄력성

15장 이것이 민주주의다 : 민주주의의 일곱 가지 재앙을 넘어


5부 비대칭적인 전략

16장 테러리스트와 차 한잔 : 가장 저렴하고 현실적인 방법

17장 혐오와 불평등, 편견을 넘어 : 접촉의 위력

18장 참호에서 나온 병사들 : 희망의 전염성


에필로그 - 삶에서 지켜야 할 열 가지 규칙



* 본 게시글은 예전에 네이버 e-북카페에서 함께 읽기를 진행하며 제가 발제했던 내용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저자 뤼트허르 브레흐만은 네덜란드 출신의 저널리스트인데요, 네덜란드 및 미국에서 역사학을 공부했고 이후 저널리스트가 되어 유럽 쪽에서 주로 활동하고 있는 듯합니다. 진보 성향의 저서가 몇 편 있는데 국내에서는 번역되어 있지 않은 듯해요. 그래서 사실상 그의 책이 국내에 소개된 것은 이 책이 처음입니다.


이 책의 원제도 <Humankind>입니다. 말 그대로 '인류'를 의미하는 것인데, 저는 이 제목을 보면서 'kind'가 '종류'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친절한'이라는 의미도 노린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저만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니었나 봐요. 추천사에서 정재승교수도 비슷한 얘기를 했네요. 


이 책에서 저자가 주장하는 바는 간단합니다. '인간은 본래 고상하다(선하다)'는 주장을 하고 싶은 것이죠. 과연 그것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지는 책을 다 읽고 나서 평가해도 될 듯싶습니다.




책의 앞부분에는 최재천교수와 정재승교수의 추천사가 있었고 프롤로그와 프롤로그에 덧붙여진 이야기들이 이어졌습니다. 전반적으로 어려운 내용은 없었고 잘 읽힌 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최재천교수나 정재승교수 두 분 다 과학의 대중화에 앞장선 스타급 과학자이기는 하지만 최재천교수는 이 책을 추천하는 건지 아닌지 좀 모호했네요. 성의가 좀 없어 보이기도 했고요. 특히 진화론에 대한 부정적인 얘기에 대해 서운함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반면 정재승교수는 책의 내용도 잘 정리해 줬고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좀 더 들게 해 주었습니다.


추천사에서도 나왔지만 이 책은 여러모로 스티븐 핑커의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와 비교될 수밖에 없는데요, 핑커의 책도 이어서 함 칡으로 진행할 예정이기에 <휴먼카인드>와 어떠한 차이가 있을지 직접 느껴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프롤로그에서 런던대공습 당시 영국인들의 낙관적 생활상이 영국인의 특성이 아니라 인류의 보편적 특성이라고 했네요. 독일의 경우에도 비슷한 모습이 나타났고요. 


그러고 보면 위기 상황에 닥쳤을 때 인류는 초반에는 공포에 질리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점차 그것에 익숙해짐에 따라 적응하고 또 안정을 되찾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네요. 한국전쟁 당시에도 1951년 중반 이후로는 사람들도 점차 안정을 되찾아가는 모습이었다고 하죠? 전투가 벌어지는 곳 이외에서는 일상의 모습들이 보였다고 하니까요. (물론 이념차이로 인한 학살, 전쟁의 비극은 계속되었지만요) 가장 최근에는 코로나19 상황에서 우리의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을 듯합니다. 이건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고요.


이렇듯 재난은 사람들의 내면에서 최선의 것을 이끌어낸다고 하며, 사회학적 연구는 그러한 것을 뒷받침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부정편향'과 '가용성 편향' 때문에 부정적인 것에 더 집중하게 되고 이끌리게 됩니다. 이것을 '노시보'효과라고도 했네요. '플라시보'와 반대되는 의미입니다.


대중매체, 언론, 예술, 문학 등이 그러한 쪽으로 편향되어 있기 때문에 사회는, 인간은 이 모양인 거라고 자포자기하는 듯한데요, 저는 최근에 가장 큰 우려가 되고 있는 묻지마 살인과 살인예고 사건들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그런 걸 보면 인간의 속성에 대해서 회의적일 수밖에 없겠죠.


그런데 골딩의 <파리대왕>을 읽어보신 분이 계신가요? 저는 읽어보지 않았는데 2장에서는 그에 대한 반론을 제시하고, 실제 사례를 추적한 과정도 보여주었습니다. 허구의 이야기는 믿는 반면, 실제의 사례는 거의 무시되었습니다. 


<파리대왕> 얘기를 한 것은 우리의 고정관념, 선입견('껍데기 이론'이라고 한)에 대한 상징적인 작품을 얘기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자는 그러한 것에 대한 불리함을 무릅쓰고 그러한 선입견에 반기를 듭니다. 마치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인 데다 기존의 주장을 반박할수록 더 많은 편견과 싸워야 합니다. 조롱도 감수해야 하고요.


그런 힘든 과정이 될 것임을 알면서도 그가 그러한 신념을 갖고 있는 이유가 궁금하시죠? 저만 그런가요? 일단은 그의 주장을 그대로 따라가 보도록 할게요. 


그런데 저자는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것이 아니라 고상하다고 했네요. 아무래도 선/악 이분법적으로 논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겠죠. 하지만 그것이 '성선설'과 유사하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듯해요. 


또한 그의 주장이 루소와 유사한 점도 있다고 했는데요, 저도 루소, 스튜어트 밀, 존 롤스 등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편이긴 합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들을 성선설의 범주에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오히려 인간의 자유의지로 만들어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나중에 핑커 얘기할 때 해볼까 합니다.




특이하게도 1부는 3장부터 시작합니다. 그런데 벌써부터 이 책에 대해서 회의를 느끼는 분들이 많으신 듯해요. 특히나 이번주 분량에서는 저희가 관심을 갖고 있는 책인 <이기적 유전자>와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에 대한 직접적인 반박을 하고 있어서 불편감을 느끼신 분들도 많을 듯합니다. 반박 그 자체보다는 저자가 그 책들을 과연 제대로 읽은 것인가에 대한 의문 때문인 듯해요.


공교롭게도 저도 <휴먼카인드>를 읽으면서 제 책장에 나란히 꽂혀 있는 이 두 권을 책을 보고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이 두 권을 원서로 갖고 있는데요, <이기적 유전자>는 원서 외에도 오래전에 구판 번역본, 그리고 새로운 번역본으로도 읽어봤었습니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는 다음 함읽책이기도 하고요)


내가 소유한 <이기적 유전자>와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원서


그걸 보면서 저자는 기존 통념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 것을 이런 방식으로 하려 하는 건가 싶기도 했고요, 그래서 이 책을 계속 읽어야 하나 고민하시는 분들도 계신 듯해요. 


3장에서는 '호모 퍼피: 가장 우호적인 존재의 탄생'이라는 제목으로 되어 있네요. 그런데 이 책의 각 장의 제목은 모두 콜론(:)으로 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런 형식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데요, 앞의 제목은 좀 더 호기심을 자극하고, 뒷부분은 그것을 부연설명하는 방식이네요. 


원서는 어떤가 확인해 보니 앞부분만 있고, 또 뉘앙스가 다릅니다. 즉, 원서가 좀 더 제목의 의미가 명확하게 느껴지기는 하는데요, 번역본 제목은 사족이 된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아무튼 그런 것도 뒤로 하고, 본문으로 들어가 봅니다. 3장에서 하고자 하는 얘기는 간단합니다. 인류의 현생종인 호모 사피엔스는 다른 호미닌들과의 경쟁에서 이겼는데, 개별 두뇌능력은 오히려 네안데르탈인과 비교할 때 떨어지지만 친화성의 증가로 더 큰 집단과 협력체계를 이루어 집단의 힘으로 생존할 수 있었다는 것이죠.


그 과정에서 사람 역시 길들여졌으며, 이는 가축 (은여우 실험 사례)의 길들여짐과도 유사성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호모 퍼피'라는 제목을 썼던 것이고요.


인류의 경우에는 그러한 길들여짐의 결과로 우호적 행동의 증가, 세로토닌과 옥시토신 분비 증가, 길어진 청소년기, 작아진 머리, 여성스럽고 젊어진 외모, 소통능력 증대 등의 효과가 나타났습니다. 그러한 친화성이 지능의 향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경우 개별 지능은 더 떨어졌다고 하면서, 가축의 경우엔 길들여진 개체들의 지능이 더 증가한 것으로 평가하는 것은 모순이 아닌가 싶기도 해요. 통계적으로 볼 때, 집단과 개체에 대한 구분은 좀 더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을 것 같고요, 사실 그가 주장하는 바는 통계적인 의미 자체가 없기에 근거로서는 부족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아무튼 흥미로운 주장이기는 한데 쉽사리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점도 있습니다. 사실 이런 주장을 들어본 적은 별로 없는 편이라서요. 


더군다나 브레흐만이 <이기적 유전자>에서 '인간은 이기적으로 태어났다'는 주장이 잘못된 것이라고 강조했는데 사실 <이기적 유전자>에서는 유전자가 인간만의 것도 아니며, 인간이 이기적이라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집단으로서의 생물은 호혜적 이타성을 가진 존재라는 주장이 핵심입니다. 유전자는 자기중심적이지만, 그의 발현 결과인 인간이라는 존재는 이성을 가지고 있기에 그러한 생물학적 기본단위에서의 '이기적'인 것을 극복할 수 있다는 얘기죠. 그런 면에서 <이기적 유전자>는 오히려 <휴먼카인드>와 같은 선상에 있는 책이라고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쨌거나 저자는 책의 초반부터 헛스윙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에도 그가 주장하려는 바가 무엇인지는 알겠습니다. 




4장의 제목은 '사격을 거부하는 병사들: 전쟁은 본능이 아니다'네요.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3년, 매킨섬에서 병사들이 우세한 상황에서도 80% 이상이 사격을 하지 않았던 상황에 대한 고찰입니다. 인간에게는 본능적으로 폭력을 거부하는 성향이 있다는 얘기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에서 원시시대부터 지금까지 인간의 폭력성이 감소해 왔다는 주장이 잘못되었으며, 인간에게는 애초부터 폭력성이 없었기에 감소할 것도 없었다고 얘기합니다. 스티븐 핑커가 근거로 든 통계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죠.


사실 원시시대, 특히나 극초기 인류 (200~300만 년 전)에 대해서 화석 연구만으로 그러한 것을 밝히는 것은 어렵고, 또 원시 인류를 현존 원시 부족과 동일시하는 것도 무리가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 역시 <... 천사>에 대해 억지로 반박하는 듯한 인상을 주며, 그 책에서 주장하는 바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일부분에 국한해서 공격하고 있는 듯한 느낌도 들었습니다.


게다가 저자는 <... 천사>를 '벽돌 책'이라고 폄하하면서도 그 책과의 비교를 상당히 의식하고 있는데요, 자신의 책 역시 그런 정도의 인기와 인지도를 갖기를 바란 것 같습니다. <휴먼카인드>와 <... 천사>를 비교하는 경우도 많으니 (저희도 두 책을 연달아 읽기로 했으니까요) 저자의 목적이 성공했는지는 모르겠네요. 여담으로, 저희도 <... 천사>를 먼저 읽었어야 했나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 책에서 <... 천사>를 계속 언급할 줄은 몰랐네요. (이 뒤에도 또 나올지는 모르겠지만요)


흥미로웠던 내용 중 하나는 친밀감을 높이는 호르몬인 옥시토신이 낯선 사람, 다른 종족에 대해서는 혐오감을 높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일면 그럴듯하게 들리는데요, 과학적인 근거가 명확한지는 모르겠어요. 


어쨌든 우리의 본성에 폭력성이 있는가, 선사시대의 인간은 전쟁을 하지 않았는가에 대해서 저는 둘 다 '아니다'라고 생각하는데요, 저자는 본인의 주장을 하기 위해서였겠지만 핑커보다 훨씬 더 당혹스러운 이야기들을 이어나갑니다. 그래도 어느 시점부턴가는 핑커의 주장이 맞는다는 것을 인정한 것인지 아니면 여전히 그러한 경향성은 없다고 하는 것인지 애매하게 마무리 짓습니다.




5장에서는 '문명의 저주: 권력자가 만들어낸 상상'이라는 제목으로 내용이 이어졌습니다. 3장부터 6장까지 포함하는 1부의 내용이 '자연 상태의 인간'을 이야기하는데 반대로 문명에 대해서는 상당히 적대감을 드러내고 있는 듯 보여요. 이미 3장과 4장에서도 인간의 본성은 폭력에 대한 거부감을 갖고 있는 것처럼 얘기했었죠.


하지만 인간이 폭력성을 갖게 된 것은 문명 때문이라는 주장을 합니다. 선사시대 때 전쟁의 역사가 없었던 인간이 문명화되면서 전쟁이 생겨났다고 하면서요.


앞서 인류 역사의 시작부터 현재까지 스티븐 핑커의 주장처럼 폭력성이 감소했는지 아니면 저자의 주장처럼 원래 없었는지 서로 다른 관점에서 얘기를 했는데요, 마치 '있었는데 없었습니다?' 같은 뉘앙스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자도 어느 시점에선가부터는 분명하게 나타나는 전쟁의 양상을 부정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문명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고요.


문명이라고 했지만 좀 더 정확하게는 지배계급의 등장일 것이고, 이는 권력의 차이로 나타납니다. 즉 불평등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5장에서는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의 내용도 일부 나옵니다. 이 책은 그리 어렵지 않아서 한 번 읽어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저자도 루소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우호적인 듯해요.


문명이 생기기 전에는 수렵과 채집을 하며 마치 유토피아 같았던 (모든 이들이 평등했고, 남녀도 평등했고, 자유로웠던) 시기에서 정착하여 농경생활을 하는 시기로 이행하면서 그러한 것이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소유에 대한 인식이 생겼고, 지도자가 생겨났습니다.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에서 '인류 최대의 사기극'이라고 한 농업 혁명의 결과죠.


공동체가 형성되면서 다른 집단에 대해서는 적대감을 갖게 되었고 (이는 지켜야 할 소유물 때문이기도 하고요), 결국 전쟁으로 이어집니다. 마을 간, 부족 간의 전쟁은 규모가 점차 커지면서 지역 간, 국가 간 전쟁으로까지 확대되고요. 그러한 전쟁을 위해서 집단도 더 커지고, 그 집단을 이끌 '리바이어던'이 등장합니다.


더불어 정착생활과 집단의 거대화에 따른 문제도 많이 생깁니다. 우선 식량문제는 여전히 해결하기 어려웠고, 가축을 사육하기 시작하면서 전염병도 증가했습니다. 자연재해도 계속 발생했고요. 그러한 문제들 때문에 종교가 등장합니다. 인간의 힘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초월적인 존재를 통해 (사실은 문제를 돌리는) 해결하고자 했던 것이죠. 


문명은 인간을 더 살기 좋고 풍유롭게 만든 것처럼 포장하지만 사실은 (인류 역사를 볼 때) 대체로는 불평등과 억압의 과정이었고, 특히나 고대부터 인간은 노예제도를 만들어 다른 인간들 (주로 전쟁에서 진 부족들)을 부려왔습니다. 그것은 근대까지도 이어졌었죠.


결론적으로 저자는 '문명은 재앙이었다'라고 말합니다. 번영이 아니라 고통을 안겨주었다고요. 하지만 그 '문명의 저주'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요? 저자도 그건 모른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문명에 대한 가치 판단을 하는 것조차도 여전히 섣부르다고 하면서요. (그러면 그런 얘기는 왜 한 거죠?)


다만, 인간의 본성에 대한 기대를 거는 듯한데 아직은 의구심만 듭니다.




6장에서는 '이스터섬의 수수께끼: 잘못된 인용과 확대 재생산'에 대한 얘기를 합니다. 이스터섬의 모아이 석상과 그 섬의 멸망에 대한 이야기는 아마 많이들, 대체로 비슷하게 알고 계실 듯합니다. 이 책에서도 초반에는 그런 식으로 얘기를 했죠.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이 사실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애초에 그러한 조사를 하는 방식, 조사 결과부터가 잘못되었고, 그것을 인용한 것도, 재인용한 것도 모두 잘못된 것이라고요. 최초에 토르 헤위에르달이라는 노르웨이인이 잘못된 정보를 기록했고, 그것을 쿡이 인용했고, 제레드가 재인용하면서 이 잘못된 이야기가 정설로 굳어져버렸다고 합니다. 


특히나 제레드 다이아몬드가 <문명의 붕괴>에서 그 얘기를 하면서 마치 확증된 것처럼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인간의 본성인 것처럼 보였죠. 


저도 그 책을 읽어본 적이 있는데요, 그가 말하려는 바가 무엇인지는 알겠지만 다소 과장된 측면도 있는 듯했고, 그가 제시하는 해법이라는 것도 막연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브레흐만은 제레드 다이아몬드에 대해서 비판적이면서도 (사실상 이번 장에서는 제레드 다이아몬드가 타깃인 것처럼 느껴졌어요) 또 챕터 뒷부분에서는 유사성을 보이기도 하네요.


하지만 저자가 이스터섬의 진실을 알아보겠다고 하면서 접촉한 사람들, 참고한 자료들은 과연 근거가 충분한 것일까요? 보어세마의 연구 결과가 과연 기존 학설을 뒤집을 만큼 영향력이 있었다면 왜 우리는 아직까지도 기존 통념을 갖고 있는 것일까요?


솔직히 저는 저자가 주장하는 바의 설득력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존 학설도 가설일 뿐이긴 하지만 그래도 더 설득력 있게 들렸으니까요. 


어쨌든 확실한 것은 이스터섬을 최종적으로 멸망시킨 것은 외부인들, 특히 문명화된 서구인들이라는 점입니다.  여기에서도 문명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는 문명의 탄생과 발전과정이 필연적이었다기보다는 가장 가능성이 높은 쪽으로 진행되어 온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개개의 역사적 사건은 우발적이었더라도 서로 영향을 미치면서 현재까지 왔을 거라는 거죠. 자연 상태에서의 인간을 그대로 두었더라도 지금과 비슷하게 왔을 것 같아요. 다만, 그 과정에서는 (여전히 진행형이기 때문에) 형태나 세부적인 모습의 차이는 있을 수 있겠죠. 현대도 여전히 국지적으로는 많은 차이를 보이니까요.


그리고 저는 인류에 미래에 대해서도 비관적이지도 낙관적이지도 않아요. 그냥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생각이고요. 사실 인류가 멸망해도 별로 상관이 없다는 주의거든요. 지구온난화니, 기후문제니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중심적인 시각일 따름이고 지구는 별문제 없습니다. 인간이 문제인 거죠. 인류가 사라져도 지구는 또 다른 생물들을 증식시킬 것이고 지구를 지배하는 또 다른 생물이 나올 수도 있을 테니까요. 태양계가 사라지기 전까지는요. 


제가 너무 냉소적일까요? 하지만 인류의 문제에 대한 책임을 개인에게 묻는 듯한 것들은 저는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공동체의 문제이자 공동으로 대응해야 하는 건 맞지만, 마치 원죄처럼 심어줄 필요는 없으니까요.


다만 저자가 인간의 본성에 대해 낙관적으로 그리고자 하는 건 인류가 직면한 여러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7장부터 9장까지는 '2부 아우슈비츠 이후'에 속해 있는데요, 여기에서는 유명한 심리학 실험 및 잘못된 보도로 인해 편향이 만들어진 과정을 서술하고 있어요.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의해 유대인을 대학살 한 곳으로 유명하죠. 그곳을 언급한 이유는 인간이 왜 그런 짓을 저지르게 되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였을 텐데요, 이를 위해 여러 가지 심리학 실험이 있었지만 그 실험이 조작되고 왜곡됐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역자가 제목마다 사족을 달면서 스포를 다 해버렸네요. 대체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7장의 제목은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의 진실 : 그곳에선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입니다. 여기에서는 제목 그대로 '스탠포드 교도소 실험'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이는 평범한 일반인들을 모집하여 교도관과 수감자로 나누어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했더니 교도관들이 갈수록 포악해져서 결국 실험을 중단하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이는 평범한 사람이 자발적으로 악하게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 것이었죠.


하지만 이 결과는 이 실험의 책임자인 필립 짐바르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그가 계획하고 지시한 대로 되었다는 것이죠. 즉, 교도관들은 실험자들이 시키는 대로 따랐을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조작된 결과는 그 후 50년 동안 그대로 받아들여졌고, 여전히 많은 심리학 교과서, 서적에서도 인용되고 있죠. 저도 여러 번 본 것 같네요.


2002년에 BBC에서는 TV 리얼리티쇼로 이 실험을 재현하고자 했으나 이번에는 피실험자들에 대해 아무런 관여도 하지 않았고, 아무런 지시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고, 교도관과 피실험자 간에 우호적인 관계가 형성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평범한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 두면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는 거였죠. 


7장에서는 이 실험 이외에도 '로버스 동굴 공원 실험' 얘기도 나옵니다. 이는 아이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서 대립과 경쟁을 하게 할 때 벌어지는 일들인데요, 갈등과 충돌이 심해져 결국 운영진이 개입하여 중단시킨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 역시 실험자들에 의해 조작된 것이었어요. 실험에 참여한 아이들은 갈등 없이 잘 지내고 있었는데, 고의적으로 아이들 간의 갈등을 조장하여 그렇게 만든 것이었죠. 결국 아이들이 조종당하고 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실험이 중단된 것이었네요.


사실 저는 이러한 심리학 실험을 잘 믿지는 않아요. 아무리 실험을 잘 설계하고 수행한다고 하더라도 바이어스를 완전히 제거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실험 결과를 유도하거나 조작하려는 경우도 많다고 생각해서요. 또는 설계 자체부터 잘못된 경우도 있고, 결과를 확대해석하는 경우도 많고요. 제가 심리학 실험들을 오해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신뢰가 가지 않기에 저자가 주장하는 바에 대해서도 그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합니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여전히, 많이 알려진 것들에 대해서 하나씩 각개격파를 해나가고 있는데 그 과정이 심적으로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사실 어느 것이 진실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자의 말이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죠. 그런데 초반부터 저자에 대한 신뢰가 많이 떨어진 편이라, 이젠 그의 얘기들 조차 의심하게 되는군요.




8장의 제목은 '스탠리 밀그램과 전기충격 실험 : 의도된 결말'이었습니다.  여기에서는 스탠리 밀그램의 전기충격 실험이 소개되었는데요, 이 실험 역시 유명하죠. 평범한 사람들이 권위에 눌려 부당한 지시에도 복종하게 되는 것을 보여준 실험이었습니다. 이는 아이히만처럼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이 왜 악을 저지르는가에 대한 답을 주는 듯 보였습니다. 이를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이라고 명명했다네요. 밀그림의 실험은 아렌트의 이론에 증거가 되기도 했습니다.


저자는 밀그램의 실험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며, 이 실험을 무너뜨리고자 했다고 고백합니다. 더 나아가, 앞에서 <파리대왕>에서부터 계속, 기존에 알려진 것들, 특히 권위를 갖고 있던 것들을 무너뜨리고자 했다고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이 책에 대해 반감을 갖는 이유이기도 할 것입니다)


밀그램은 자신의 의도대로 실험을 진행시켰으며, 마치 감독처럼 피실험자들을 그렇게 하도록 만든 것이었죠. 실험 자체는 조작이었으며, 실험의 세부적인 내용은 도중에도, 이후에도 피실험자들에게 알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밀그램의 실험결과가 이후에도 계속 재현되자 실험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결과에 대한 해석을 달리하는 것으로 전략을 바꾼 듯 보입니다. 즉, 인간이 복종해서가 아니라 규칙을 따르기 위해서 그런 행동을 한 것이라는 거죠. 또한 자신들이 선한 (또는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기에 그것을 따랐다는 것입니다. 


이는 7장의 스탠포드 교도소 실험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실험을 충실히 함으로써 자신들의 역할을 했다고 믿었던 것뿐이니까요.


그런데 저자는 한나 아렌트에 대해서는 옹호하는 입장을 보입니다. 그가 잘못된 결론을 내린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오해한 것이라고요. 그러한 것은 좀 의외였어요.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 통념들에 대해서는 그렇게 적대적인데 왜 아렌트에 대해서는 그런 모습을 보일까요? 책 전반에서 자신이 적대적인 것과 우호적인 것에 대해 차이가 너무 분명하게 보이는데 그것 또한 저자의 편향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뒷부분에서는 그러한 악을 피하기 위해서는 '의사소통과 대립, 연민과 저항'이라는 전술을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면서 덴마크의 유대인 탈출 사례, 나치에 저항한 사례들을 보여주죠.  집단적인 저항의 효과와 그 전염성 (확산)을 얘기하지만 그것도 상황에 따라 다를 것 같긴 합니다.




9장은 2부 '아우슈비츠 이후'의 내용이었고, 10~12장은 3부 '선한 본성의 오작동'에 속하는 내용이었습니다.

7, 8장에서 기존의 심리학 실험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는데요, 9장에서는 심리학 실험은 아니지만 한 여성이 살해되는 과정에서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는 '방관자 효과'에 대해서 반박하고 있습니다.


'방관자 효과'는 저도 들어본 적이 있고 일면 수긍되는 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case by case'일 거라 생각합니다. 결론적으로 여기서 얘기하는 건 그 사건은 언론에 의해 잘못 알려진 것이며, 설사 방관자 효과라는 것이 있다고 해도 인간은 위기의 상황에서는 다른 사람들을 도우려 한다는 것이죠. 제가 그러한 것을 목격했다면 당연히 경찰에 신고하고 그 가해자를 저지하려고 했을 것 같은데, 실제로는 어땠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막연히 그렇게 생각만 하는 것일지도요...


이렇게 2부에서는 인간의 본성이 악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려 했네요.




3부의 내용들은 조금 더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어요. 이제 저자는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는 것을 명제로 삼고 있는 듯합니다. 앞에서도 그러한 본성이 문명으로 인해 악하게 바뀐 듯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우리의 선한 본성은 남아 있다는 얘기를 했고, 3부에서도 우리의 본성이 오작동하는 이유에 대해서 얘기하려는 듯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의 저자인 브라이언 헤어를 '강아지 전문가'라는 식으로 폄하하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비슷한 주제, 비슷한 내용의 책을 쓴 다른 저자를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게 마치 견제하는 것처럼 느껴졌는데요, 저는 두 사람이 서로 알고 있는 사이일까, 각자의 책 저술에 대해서 알고 있었을까라는 의문이 듭니다. 어쨌든 이 저자의 태도나 방식은 여전히 맘에 들지는 않습니다.


어쨌든, 저자의 말 대로라면 원시공산주의 사회를 이루며 평화롭게 살던 인류(호모 사피엔스)가 1만 년 전부터 정착생활을 하면서 사유재산과 전쟁이 생겨났는데, 이를 진화심리학자들은 '부조화'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과 인간의 신체적, 정신적 조건이 맞지 않아서 그렇다는 것이죠. 우리의 몸(DNA)은 원시인의 것이나 다를 바 없으니까요.


그럼 무엇이 인간의 선한 본성을 오작동하게 하는지를 밝히겠다고 했는데 사실 그러한 것이 저자의 의도대로 밝혀졌다고는 생각되지 않네요. 3부의 내용은 좀 두서없고, 뭔가 논지가 부족한 듯했습니다. 하긴, 새삼스럽진 않죠.




10장에서는 전쟁 상황에서 발생하는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독일군들의 전투력은 '전우애'를 바탕으로 한 것이고 이데올로기의 영향은 적었다고 합니다. 테러리스트들 조차 어떤 신념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함께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했고요. 


인간의 본성은 익숙한 것에 더 끌리며,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거부감 또는 혐오감까지 느낄 수도 있다는 얘기도 있고, 어린아이들도 본능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돕는다는 얘기도 있었습니다. 이런 것들은 공감능력 때문이라고 하지만, 사실 그 공감능력은 상당히 제한적이라고 합니다. 그러한 제한적 공감능력은 오히려 '우리'와 그 밖의 사람들을 구분하게 하고, 심지어는 혐오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공감의 맹목성'이라는 제목이 붙었네요.


그러다가 갑자기 전쟁에서는 거리가 멀어질수록 더 잔인해진다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는 공감이 작용할 수 있는 것은 물리적인 거리와도 연관이 있으며, 그러한 거리가 멀어질수록 상대방을 동료로서 인지하지 못하며 오히려 적으로 간주하게 되는 것을 말하려는 듯하네요. 이는 폭력에 대한 혐오감을 낮추는 효과도 있고요.


하지만 실제로는 군사 훈련 시에는 가상의 적을 상정하고 (사격훈련 시 과녁을 사람모양으로 만들거나, 예전에는 북한군의 모습을 그려놓은 과녁도 있었습니다) 군인을 살상기계로 만들려는 시도도 있었죠. 실제로 그러한 것이 효과를 발휘하기는 했지만 그로 인한 부작용도 나타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쨌거나 그것은 저자가 말한 인간의 본성에 반하는 것이었으니까요.




11장은 권력에 대한 얘기를 합니다. 여기에서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데요,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과 마키아벨리에 대해서 오해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마키아벨리가 그 책을 쓰게 된 목적을 알지 못하거나 혹은 무시하기 때문이겠죠. 


그는 사실 군주론자가 아니라 공화론자입니다. 정치적으로는 공화정을 원했지만, 당시 혼란했던 이탈리아(여러 도시국가로 나뉜)의 통일을 위해 강력한 지도자가 나타나길 원했고, 자신을 후원하던 메디치 가문이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이 책을 써서 바친 거였으니까요.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기도 했으니 그들에게 잘 보이려 한 것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이 책을 다 읽어본 사람들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지만, 대체로는 그중에서 자극적인 부분들만 발췌해서 인용되기도 하니 오해를 받기 좋은 책이기도 하고요.


어쨌든 저자는 마키아벨리와 <군주론>에 대해서 상당히 적대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권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죠. 권력에 대한 저자의 적개심은 동감합니다. 아마 대부분 그럴듯해요.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권력자가 아니라 권력자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으니까요. 이는 단지 정치적인 권력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조직 내에서의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모든 권력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11장에서는 침팬지와 보노보 얘기도 나왔어요. 이 얘기도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에서 예시로 들었던 것이기도 하죠. 우리는 침팬지보다는 보노보와 더 유사하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입니다. 


또한 우리는 150명 정도의 사람과의 관계만 다룰 수 있으며, 그 이상이 되면 통제 불능이 되어버리는데요, 인간이 집단을 이루는 규모가 점차 커지면서 이를 통제할 지도자가 생겨났고, 그 지도자는 절대 권력을 위해 종교를 끌어들였습니다. 정치와 종교는 원시시대부터 함께 해왔으니까요.


더군다나 그러한 권력자들은 인간의 본성인 '수치심' 조차 느끼지 않는 경우도 있고, '뻔뻔함'이 그들의 속성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이 모양이기도 하고요.




12장에서는 계몽주의에 대한 얘기가 나옵니다. 계몽주의는 <통섭> 이후에 오랜만에 접하네요. 윌슨은 계몽주의에 대해 회의적이고 부정적인 입장이었는데요, 브레흐만 역시 계몽주의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각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데이비드 흄과 애덤 스미스의 예를 들어 그들의 사상이 잘못되었다고 얘기합니다. 흄은 인간이 이기적이고 악하지만 이성의 힘으로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고 했으며, 이를 위해 제도적인 장치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애덤 스미스의 경우에는 <국부론>에서 인간의 탐욕을 옹호한 것처럼 얘기했는데요, 사실 저는 <국부론>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아요.  이 책 역시 <군주론> 만큼이나 오해를 많이 받는 책인 듯해요. <국부론>은 한 번은 읽어봄직한 책입니다. 그게 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양쪽의 바이블이 되었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 책에서 애덤 스미스가 인간에 대해 가지는 신뢰를 보았거든요. 그러한 신뢰를 바탕으로 사회가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을요. 우리가 잘하는 '보이지 않는 손'은 바로 그 신뢰를 이야기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인간 본성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보았습니다. 오히려 너무 믿고 있는 듯한 모습마저 보였으니까요.


인간의 이성을 강조하고, 여러 정치적인 형태가 등장하고, 법치주의가 작용한다고 해도 우리의 사회는 여전히 어렵고 혼란스럽습니다. 이는 그러한 것들의 한계이기도 하지만 계몽주의가 가진 어두운 면 때문이기도 합니다. 계몽주의는 집단, 혹은 전체의 모습이나 방향성을 강조할 뿐, 인간 개개인에 대해서는 집중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기본적으로 인간의 본성은 악하거나 혹은 교정해야 할 대상으로 보았기에 그러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죠. 실제로 그렇게 믿었다기보다는 그렇게 얘기해야 다음 단계의 주장으로 넘어갈 수 있기에 그렇게 전제를 한 것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인간의 본성을 억압하는 것은 문명, 제도, 권력 등에 의한 것이며, 제한적인 공감능력으로 인해 피아구분이 더 극단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라고 얘기하는 듯하네요. 그런데 그렇게 말하기에는 문제를 너무 단순화시킨 것 같기도 하고, 그 원인을 그쪽으로 돌림으로서 해결책 역시 그쪽에서 찾으려는 건 아닌가 싶습니다.




 4부의 부제는 '새로운 현실'이었고, 현재의 문제점들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4부 도입부에서는 잘 아시는 피그말리온 효과와 이에 반대되는 골렘효과 (이름은 많이 들어봤지만 그런 용어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를 언급하며, 우리 본성에 내재된 자신과 서로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문제를 해결하자고 합니다. 인간 본성에 대한 우리의 부정적인 생각이 '다원적 무지'의 한 형태일지도 모른다고 하면서요. 


각 장의 제목은 그럴듯하게 붙여놓았습니다. 하지만 그 내용을 보면 '속 빈 강정'이나 다를 바 없네요. 13장에서 '내재적 동기부여의 힘'을 이야기했는데 이는 '스스로 동기를 보여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당근과 채찍, 즉 금전적인 보상이나 패널티로는 한계가 있으므로 내재적 동기부여를 통해 개인과 조직 모두 윈윈 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자는 것인데요, 요스 드 블록 등 몇 가지 사례를 제시했습니다만 이 역시 상징적인 의미일 뿐으로 보입니다.


스스로 동기를 보여한다고 하더라도 결국에는 그에 따른 보상이 이루어져야 함은 분명합니다. 그것이 금전적인 것이 되든 어떤 것이 되든지요. 하지만 재원과 자원이 한정적인 상황에서 모두에게 균등한 분배가 이루어질 수는 없으며 결국엔 분배의 문제, 불평등의 문제는 야기될 것으로 보거든요. 초기에는 혼란일 것이고 어느 정도 자리 잡은 이후에는 안정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곧 한계를 드러내고 다시 혼란스러워질 것이라고 보입니다. 그렇지 않을까요?




14장에서는 '놀이하는 인간'이라고 했지만 사실상은 아이들, 학생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이들의 놀이 본능을 소멸시킨 현대의 모습은 어느 정도 공감하긴 하지만 (그리고 놀이의 필요성은 느끼지만) '정크 놀이터'같은 건 요즘 부모들이라면 기겁할 내용입니다. 


사실 정크 놀이터 까지는 아니지만 '위험한 놀이터'가 아이들의 자립심과 모험심, 문제해결력, 협동심을 키워준다는 내용은 외국에서도 보고되었다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주로 유럽에서 시도되고 있는 건데요, 이것도 아마 정크 놀이터에서 유래된 것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요즘은 대부분 키즈카페 정도나 가고, 아이가 혼자 놀다가 다치거나 다른 이유로 다쳐도 시설이나 관리자에게 책임을 묻는 상황에서 그런 위험한 놀이터가 국내에 도입될 수는 없을 듯합니다. 


교육시스템에 대한 비판도 일면 수긍하면서도 과연 대안학교들이 답인가 하는 면에서는 답하기 어렵습니다. 학교로 대표되는 공교육이 갖는 의미와 목적을 생각해 보게 되기도 하고요. 가뜩이나 요즘 공교육 문제가 계속 대두되고 있기에 더 고민스럽기도 합니다.


단지 '호모 루덴스'로 돌아가는 태평스러운 말을 하기에는 이 사회가 너무나 복잡하고, 개인과 조직, 사회 전체가 만족할 수 있는 답을 찾는 것은 사실상 '불능(해 없음)'입니다. 결국에는 그 어디쯤에선가 최적점을 찾을 수밖에 없고, 이는 트레이드오프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죠. 누군가는 무언가를 희생하거나 포기할 수밖에 없는데 서로 그러한 희생은 감수하지 않으려 하고, 특히 기득권자들은 자신들의 것을 지키면서 약자에게 더 많은 희생을 강요하니 더 불공정하고, 결국 최적점을 찾는 것도 불가능해지는 것이고요. 그것이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라고 보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서로에 대한 믿음이나 우리 본성에 내재된 공동체 의식, 유대감만으로 극복이 가능할까요? 서로에 대한 치킨 게임에서, '남이 먼저 하면 나도 하겠다'는 홉스의 함정에 빠져있는데 말이죠. 




15장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여기에서는 민주주의에 대한 얘기를 했는데 일단 저자는 정치제도로서의 민주주의와 경제체제로서의 자본주의/공산주의에 대한 개념도 제대로 잡지 못한 것 같고요, 특히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개념도 제대로 잡고 있지 못한 듯합니다. 


그는 전 세계 민주주의가 정당의 무력화, 시민들 사이의 불신, 소수의 배제, 유권자의 무관심, 정치인의 부패, 부자들의 탈세, 현대 민주주의가 불평등하다는 자각의 확산 등 최소한 일곱 가지 재앙으로 고통받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토레스나 포르투알레그리 등의 예를 들어 이러한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했습니다. 그러한 것을 통해 냉소주의에서 참여로, 양극화에서 신뢰로, 배제에서 포함으로, 안주에서 시민권으로, 부패에서 투명성으로, 이기심에서 연대로, 불평등에서 존엄성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저는 이 역시도 회의적으로 봅니다. 새로운 공유지 개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고 보면 저는 여기서 나온 내용들을 다 회의적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제가 냉소적이거나 회의주의자라서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무엇보다 현실성을 보기 때문이죠. 여기서 대안이라고 제시하는 것들이 좀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그 주장의 근거도 빈약하고,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것들이니까요. 그러면서도 그것을 마치 현재의 시스템과 기득권 (권력자들 및 다국적기업 등)들 탓으로 돌리고 있죠.


그렇다면 그가 진정 원하던 것은 그야말로 원시로 돌아가는 것이었을까요? 비가역적이었던 인류의 발전방향을 되돌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본인도 알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일말의 적은 가능성을 몇 개 던져주며 이러한 것이 있으니 해보면 되지 않겠느냐고 합니다.


사실 이런 것은 그가 처음 주장한 것도 아니고, 이미 외국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예전부터 TV 다큐멘터리나 방송 등을 통해서 사례들이 소개된 바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제기된 문제들은 비단 어느 국가에게만 해당하는 것도 아니니까요.


하지만 그것은 정말 극히 일부 사례일 뿐 근거 수준은 매우 낮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기도 하고요. 사회의 구성원 및 형태는 다양하기에 각각의 요구와 조건을 다 만족시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사례 역시 운 좋게, 시기와 장소와 구성원이 적절했기에 (일시적으로라도)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며, 성공이라는 것도 그 기준과 지속가능성의 측면에서 보면 또 다르게 평가될 소 있는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것을 무시한 채 극소수의 사례를 일반화하게 되면 극단적 오버피팅으로 인해 실패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그래도 이런 가능성이 있지 않느냐'라고 말하는 건 기만이라고 보입니다. 독자들을 기만하는 것이죠. 


저자 본인도 그 한계를 알고 있고 인정하면서도 미련을 놓지 못하는 듯 보이고요. 앞에서는 기존의 이론이나 통념을 부수려고 그렇게 애를 쓰면서도 정작 본인이 주장이 이렇게 김새는 것이었다니, 다른 분들께서도 아마 허탈하면서도 어이가 없으셨을 듯합니다. 


이 책에 대해서 애초부터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시작하기는 했지만 이런 식이라면 정말로 이 책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얘기밖에는 할 수 없을 듯합니다. 빨간 알약과 파란 알약 중 그냥 매트릭스에 갇혀 살기를 선택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저자의 말에 수긍하며 받아들일 수는 없을 듯하고요.


시스템의 문제를 개인이 해결할 수도 없고, 기껏해야 그 시스템에서 상위로 올라가거나 혹은 국소적 시스템을 탈출하여 다른 시스템으로 옮겨가는 것뿐이지만 거시적으로는 다 엮여 있기에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시스템을 개편하는 것은 인류가 멸종한 후 새로 시작하지 않은 한 불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5부의 내용은 '비대칭적인 전략'이라는 부제로 전개됩니다. '비대칭적 행동'은 마치 예수가 말한 대로 '오른뺨을 맞으면 왼편도 대라'는 얘기인데요, 상대방의 불의에 선의로 대응하라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비대칭적이겠죠. 그러나 이게 과연 가능할까요?


16장에서는 '테러리스트와 차 한 잔'이라는 제목으로 몇 가지 사례들을 얘기합니다. 노르웨이의 할렌 교도소는 '비대칭적 감옥'이며 다른 곳과는 다른 방식으로 교정업무를 수행합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방식이지만 예상보다 더 효과적으로 작동하며, 재범률 역시 낮아졌다고 하는군요. 비용은 좀 더 많이 들지만 재범률이 낮으므로 결과적으로는 이득이 된다는 주장을 합니다.


이것 역시 예외적인 사례인 듯해요. 미국에서도 비슷한 시도는 있었지만 '마틴슨 보고서'나 필립 짐바르도의 주장에 의해 무산되었습니다. 더구나 제임스 윌슨의 '깨진 유리창 법칙 (이것도 유명한 얘기죠)'과 이를 신봉한 브래튼에 의해 범죄 예방책이 중요하다는 것이 강조됩니다. 그로 인해 인권이 무시될 정도로 무분별한 검문과 체포가 횡행했습니다. 결국 이 이론도 범죄예방 효과가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죠.


그러면서 테러리스트 혹은 잠재적(?) 테러리스트들에게 호의와 멘토를 제공함으로써 유대감을 강화하여 예방 효과가 있었다고 하는데요, 무엇이든 문제가 생기기 전에 예방하는 것은 바람직하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방법인데요, 브래튼식의 무분별하고 강압적인 방식이나 덴마크 사례처럼 온정을 베푸는 것 둘 다 극단적이라고 보입니다. 그로 인한 결과는 해석하기에 따라 다르게 보일 것이고요. 




17장은 '혐오와 불평등, 편견을 넘어'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혐오, 불평등, 편견은 우리 사회의 문제이며 해결해야 할 과제임은 명백합니다. 이것 또한 방법이 문제인데요, 저자는 '접촉'이 해결책이라고 말합니다.


서로 적대적인 관계일지라도 접촉(만남, 대화 등)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며,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빌욘 형제의 사례를 듭니다. 또한 인종차별에 대해서도 인종간 접촉빈도 혹은 친밀도가 그러한 것을 타파하는데 효과적이라고 하죠. 


그러나 그러한 것은 서로가 대등한 관계이거나 혹은 적어도 한쪽이 다른 한쪽을 압도할 만큼의 불균형적이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지만 차별과 편견은 대체로 비대칭적으로 나타납니다. '하는 쪽'과 '받는 쪽'이 있죠. 그러한 가운데 단순히 접촉을 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저자의 주장은 '하는 쪽'에 대한 지침에 가까워 보이지만 받는 쪽은 '비폭력저항'  혹은 '용기' 등 상대적으로 더 희생을 요구하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는 데는 하는 쪽의 역할이 더 중요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너무 막연해 보이는 주장이네요.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는데 서로 타협을 하라고 하면 결국 피해자가 그것을 떠안을 수밖에 없는 거죠. 아무리 화해와 용서를 강조한다고 해도 일방적이라는 생각이 들고요. 우리나라의 역사, 그리고 세계의 역사에서 그러한 것들이 많이 있었는데 피해자이자 약자라면 그러한 타협조차 불가능하고 묵살되는 경우가 더 많았죠. 


결국 피해를 받은 쪽에서 대등하게 올라설 수 있거나 혹은 그러한 계기가 있어야 타협도 가능하고, 화해와 용서도 가능해지는 듯합니다. 남아공은 힘들긴 했지만 그러한 과정을 거쳐오긴 했는데 그러한 화해와 용서도 모두의 컨센서스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 아직도 혼란이 있는 듯하고요. 가해 측과 피해 측 간에 과연 중간지점이 있을 수 있을까 싶습니다.




18장은 '참호에서 나온 병사들'인데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 발발 초기)에 있었던 실화를 얘기합니다. 크리스마스 때 영국군과 독일군이 교전을 멈추고 서로 우호적이 되었던 사건입니다. 적과 가까이 대치하고 있었을 때는 오히려 적대감이 줄어들었고, 멀어질수록 적대감이 증가했다고 하는데요, 이는 서로에 대한 호의와 친밀감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전쟁은 그런 식으로 전개되지 않죠. 결국 이 사건은 예외적이고 상징적인 것이었을 뿐, 전쟁은 계속되었고 갈수록 더 잔혹해졌습니다. 


결국 5부에서 얘기했던 비대칭적인 전략들은 다른 이들에 대한 믿음과 유대감, 친밀성에 기반을 두려고 하지만 그것은 적어도 상대방도 그럴 것이라는 가정이 바탕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비대칭적인 전략의 결과 불의가 선의로 전환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겠죠.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러한 비대칭적인 전략을 구사할 때 우리 사회는 그 사람을 바보취급하거나 호구로 봅니다. 


우리 사회에 '공동선'이라는 것이 작용하고 모두들 그것을 추구하려 한다면 좋겠지만 개인의 생각과 가치관, 행동양식은 너무나 다양하고 세상에는 시비를 가리는 것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것들이 많기에 너무나 복잡합니다. 저자의 주장대로 우리의 본성에는 선한 것을 추구하고, 바람직한 쪽으로 가려는 경향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집단적, 평균적으로 나타날 뿐 국소적 혹은 집단적으로 나타나는 문제들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인간은 내재된, 타고난 본성이 어떻다고 해도 다른 이들과의 관계를 통해 변화하며 유동적으로 흘러가니까요. 앞으로 인류의 모습은 어떻게 될지 염려스러우면서도 문제의식을 버릴 수는 없네요.


5부의 내용이 너무 허황된 느낌이 들고, 일반사람들의 통념에 반하는 것이라 쉬운 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기본적으로 어떠한 것이 전개되기 위해서는 균질성이 바탕이 되어야 하는데 그러한 것이 보장되지 못하니 불규칙성 혹은 무작위성이 발생할 수밖에 없고 그것을 예측하기는 어렵죠. 어쩌면 저자의 주장 역시 그러한 예외성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것 역시 다른 예외성으로 반박될 수 있는 것들이고요. 즉, 어떤 유의성을 갖지 못하는 사례보고일 따름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능성을 키워나가려는 시도는 해볼 수는 있을 듯해요. 그러면서 근거가 좀 더 확보될 수도 있을 테고요. 물론 그것을 과장되게 해석하는 것은 금물이겠죠.




이제 마지막 에필로그로 넘어가 봅니다. 앞에서 장황하게 (허황되게) 얘기를 하고 나선 '삶에서 지켜야 할 열 가지 규칙'을 얘기합니다. 이런 식으로 제시하며 마무리하는 걸 저는 별로 좋아하지는 않습니다만, 요약정리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그렇게 제시한 듯해요. 혹은 이 책에 대해 실망감을 느낄 사람들을 의식한 것일까요? 하지만 솔직히 저는 이것 역시 와닿지는 않았어요. 이렇게 하는 것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요? 이 역시도 막연한 것들이네요. 그래도 일단 그가 말한 열 가지를 옮겨봅니다.


1. 의심이 드는 경우 최선을 상정하라

2. 윈-윈 시나리오를 기반으로 생각하라

3. 더 많은 질문을 제기하라

4. 공감을 누그러뜨리고 연민을 훈련하라

5.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라. 비록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고 할지라도

6. 다른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당신 역시 스스로 가진 것을 사랑하라

7. 뉴스를 멀리 하라

8. 나치에 펀치를 날리지 말라

9. 벽장에서 나오라: 선행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10. 현실주의자가 돼라




이렇게 <휴먼카인드>가 마무리되었습니다. 어떠셨나요? 그동안 함읽을 진행 하면서 많은 분들께서 이 책의 내용에 대해 실망과 분노까지 보여주셨는데요, 저도 애초 기대했던 바에 많이 못 미쳤고 실망스러워서 고민이 많았었습니다. 하지만 이를 통해 비판적으로 볼 수 있었고, 역으로 제가 생각하고 있는 것들은 옳은가 되돌아보게 되기도 했어요.


이 책은 인간의 본성에 대해 낙관적이고 희망적인 시각을 제시하려고 했지만 단순 사례들, 특히 예외적인 사례들을 나열함으로써 일반화하기 어려웠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 책에서 반박하고 부정했던 것들은 상대적인 관점으로 볼 수 있을 듯합니다. 즉, 어떤 주장에 대해 다른 주장도 제기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요. 하지만 그것이 타당하거나 명확한 근거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 신뢰를 떨어뜨리게 한 이유였을 것입니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선한가 악한가는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둘 다겠죠. 모든 것은 조건에 달린 것이라고 보이니까요. 그러나 그 상황에서, 현실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개인으로서, 집단으로서 말이죠.


하지만 이 책에 대해 받아들이는 바는 사람들마다 다를 듯해요. 저자는 어차피 모든 이들을 만족시킬 목표는 없었을 것 같고, 간혹 자신의 주장에 솔깃할, 그리고 자신과 같은 주장을 할 사람들을 현혹하기 위해 쓴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까지 이 책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보아왔지만 또 어떤 사람은 최고라고 할 수도 있겠죠. 각자의 생각이 다르니, 그러한 다양성 역시 인정해야겠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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