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가 혼란스러운 이유: 진화론의 관점에서
사람들은 다윈의 진화론에 대해 많이 오해한다. 대표적인 것이 "적자생존"이다. 하지만 다윈은 그의 저서 <종의 기원> 초판에서는 '적자생존'이나 '진화'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진화'는 이미 당시에도 보편적인 개념이었기에 굳이 명명을 하지 않아도 무방했지만, 다윈은 이를 "변화를 동반한 계승"이라고 표현했다.
반면, '적자생존'이라는 표현은 철학자 허버트 스펜서가 처음 사용했으며, 다윈은 이를 받아들여 <종의 기원> 6판에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적자', 즉 'fittest'라는 최상급 표현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이는 상대적 개념이므로 비교급(better)만으로도 다윈의 "자연선택"은 충분히 작동할 수 있다.
이러한 원리는 '종 내 자연선택' 뿐만 아니라 '종 간 자연선택'에도 적용된다. 즉, 같은 종 내에서는 다른 개체보다 우세한 생존 능력을 가진 개체가 살아남는데 유리할 것이고, 그러한 개체가 많아지면 다른 종과의 생존 경쟁에서 우위에 있게 되어 그 종이 우점종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마저도 그의 진화론의 반 밖에 이야기하지 않은 것이다. 다윈은 진화의 또 다른 원리로써 '성 선택'을 주장하였으며, 그의 저서 <인간의 유래와 성 선택>에서 자세히 소개하였다. 이것은 '자연선택'에 비해 일반인들에게는 덜 알려졌고, 이론적으로 결점이 있는 부분도 있지만, 이후에 다른 연구자들에 의해 보완되면서 '자연선택' 못지않게 중요한 진화의 메커니즘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이는 생존과 무관하게 보이는 형질의 진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예를 들어 수컷 공작의 화려한 꼬리는 생존에는 오히려 불리하지만 암컷에게 선택받아 번식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에 그렇게 진화하였다는 것이다.
성 선택 이론은 '동성 간 경쟁'과 '이성 간 선택'이라는 두 가지 원리가 작용한다. 대체로는 수컷에 대한 예시가 많지만, 암컷 또한 마찬가지다.
나는 다윈의 진화론을 '수렴'과 '발산'의 관점에서 본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라면, 수렴은 자연선택의 과정과 연결되며, 발산은 성 선택과 연관된다. 이 두 가지 힘은 상반되는 방향으로 작용하지만, 동시에 서로 보완하며 진화의 동력을 제공한다.
수렴은 구심력에 비유될 수 있다. 이는 생존에 유리한 특정한 특성을 중심으로 개체들이 점점 더 비슷해지게 만드는 힘이다. 예를 들어, 북극 지역에 서식하는 동물들은 추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두꺼운 털과 지방층을 발달시키며, 이는 서로 유사한 생존 전략을 보인다. 환경에 적응하려는 생물의 진화는 이러한 구심력의 결과이다. 그렇게 수렴 진화하도록 만드는 환경의 영향(자연조건)을 '선택압'이라고 한다.
반면 발산은 원심력과 같다. 이는 개체 간의 다양성을 촉진하고, 경쟁적 짝짓기나 선택 과정을 통해 새로운 특성을 창출한다. 위에서도 예로 들었지만 수컷 공작의 화려한 꼬리는 발산적 진화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이는 생존 자체보다는 짝짓기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 진화한 특성이다.
비단 성 선택뿐만 아니더라도 '차이'가 있어야 그러한 방향으로 진화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는 다윈이 언급했던 '변화'이기도 하다. 그러한 차이의 발생은 무작위적이고, 모든 방향으로 가능하다. 그래서 단기간의 관찰에서는 진화의 방향성을 볼 수 없지만(전향적으로는 불가능), 장기간의 관찰에서는 진화의 방향성이 결과적(대체로 후향적으로)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지금도 생물학적으로 진화하고 있지만 어떻게 진화하고 있는지, 어떻게 진화할 것인지는 알 수 없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수렴은 개체의 생존을 위한 것이고, 발산은 자손을 남기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지만, 발산은 좀 더 포괄적으로 볼 수 있다. 이 두 가지 힘은 트레이드-오프의 개념을 가진다. 생물이 생존과 번식 사이에서 자원을 어떻게 분배할지 선택하는 것은 진화의 중요한 동력이다. 예컨대, 어떤 생물은 생존에 더 많은 에너지를 투자하여 장수하지만, 번식 기회가 제한되는 반면, 다른 생물은 짧은 생애 동안 많은 자손을 남기기 위해 에너지를 집중한다. 이는 자연의 복잡한 균형을 이루는 핵심 요소다.
이러한 원리는 철학적 관점에서도 볼 수 있다. 헤겔의 '변증법적 통일'은 "상반되는 두 힘이 갈등과 조화를 통해 더 높은 차원의 통합을 이룬다"라는 것이다. 이는 수렴과 발산이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며 생명의 복잡성과 다양성을 만들어내는 과정과 유사하다.
우리 사회 역시 이러한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사회적, 문화적 변화는 수렴과 발산의 반복적인 작용으로 설명될 수 있다. 특히, 정치적 견해와 가치관의 대립 역시 수렴과 발산의 예로 볼 수 있다. 선거와 같은 과정에서 특정 이념이나 정책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결집하는 현상은 수렴의 일례다. 동시에, 다양한 정치적 견해와 이념이 대립하면서 새로운 대안과 아이디어가 등장하는 과정은 발산의 특징을 나타낸다.
사회에서의 "선택압"은 자연보다 더 인위적이며, 이분법적 양상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이는 마치 강한 바이어스 전압이 걸린 환경에서 이온화된 입자들이 양쪽 전극으로 끌려가는 것과 비슷하다. 사회적 가치와 이념의 대립은 이러한 극단적 상황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렇듯 특정한 가치나 이념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결집하는 과정(수렴)과 동시에 다양한 목소리와 관점이 나타나는 과정(발산)이 공존한다.
진보와 보수의 갈등은 사회적 혼란을 초래하기도 하지만, 이로 인해 다양한 관점이 제시되고 기존의 체제가 변화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갈등은 비록 단기적으로 혼란스러울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사회의 발전을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진보주의자이며 사회민주주의적 가치를 지지한다. 그러나 항상 내 견해가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세상은 복잡하고, 모든 문제를 판단할 때 객관적인 근거에 기반해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감정이나 주관이 개입되어 판단이 왜곡될 때도 많다. 또한, 시비를 가리는 일, 즉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어렵다. 진리라는 것도 시간적, 공간적, 그리고 구성원에 따라 조건부인 것이다. 따라서 서로 다른 견해를 경청하고 이를 바탕으로 균형 잡힌 결정을 내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이러한 태도는 수렴과 발산의 원리가 작용하는 사회에서 더욱 필요하다.
또한 다양성은 발산의 측면에서 볼 수 있다. 다양성은 다른 쪽에서는 해롭거나 불편하게 여겨질 수 있지만 다양성의 수용이 공동체를 지속하게 만드는 힘이 되기도 한다. 마치, 생존에 별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은 형질이 결국에는 종을 유지하게 만드는 것처럼, 다양성은 인류가 존속하고 발전하게 했다.
다만, 다양성을 수용하는 주체가 동일 공동체라는 점이 자연의 진화와는 다른 점인데, 인간의 활동과 선택은 자연적인 것만 추구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인간이 공동체의 존속에 해가 된다고 약자를 모두 버렸다면 인류는 지금보다 더 나아졌을까.
아울러 '절대선'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 만약 그런 것이 있다고 믿더라도, 그것은 주관적이고 편향적일 수밖에 없다. 맹목적으로 그것을 추구하려 한다면, 오만이자 기만이 될 것이다.
민주주의의 반대는 독재다. 어떠한 식의 독재라도 용납될 수 없다. 칼을 쥔 자는 그 칼을 쓰고 싶은 욕망이 있는 법. 쉽게 가려고 하다가는 정말 쉽게 (나락으로) 갈 수 있다. 우리는 역사에서 그러한 것을 많이 보아왔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혼란스러운 체제일 수밖에 없다. 윈스턴 처칠이 말했듯이, "민주주의는 최악의 제도이지만 그보다 나은 제도는 없다.' 다양한 의견과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과정에서 혼란이 발생하지만, 이는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 사회가 민주적인지 당장은 알 수 없지만, 후향적으로는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역사가 평가한다"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또한 진화의 과정에 있다. 지금이 그 완결의 시점이 아니며, 앞으로도 완결이란 있을 수가 없다. 수렴과 발산이 계속 작용하기 때문이다.
수렴과 발산은 자연과 사회의 발전을 이끄는 기본적인 원리다. 어느 한쪽으로만 치우쳐서는 지속적인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우리는 이 혼란을 감내하며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한다. 수렴과 발산이 동시에 작용하며 균형을 이루는 민주주의 체제는, 비록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인류가 도달한 최선의 선택이라 할 수 있다. 인간 사회에서도 상반되는 가치관과 견해가 공존하고 상호작용할 때 진정한 진보와 혁신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p.s. 오늘은 1987년 6월 항쟁의 38주년이 되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