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베이의 소소한 일상] 세상의 ‘덩치’들에 대한 위로
한 덩치 합니다. 185cm에 87kg 정도니 몸집이 있는 편이지요. 어릴 때는 더했습니다. 학교 다닐 때도 키는 반에서 제일 큰 편에 속했고 살집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오히려 몸무게가 빠진 편입니다. 자발적인 덩치 커밍아웃이네요.
우리말에 이런 표현이 있지요. “덩치는 산만해서!” 에이 정말 산만하겠습니까. 그래도 어느 정도 몸집이 있어야 이런 표현을 하긴 합니다. 과장과 비유긴 하지만 우람한 정도이긴 할 겁니다.
우리말의 특징 가운데 하나일 것 같은데, 한국어는 조사가 많은 것을 말해주는 언어입니다. 주어에 붙는 ‘은는이가’ 조사별로 뉘앙스가 꽤 다릅니다. ‘덩치’에 붙어 있는 조사 ‘는’이 “덩치는 산만해서”가 어떤 뜻을 내포하고 있는지 이미 결정해 줍니다. 좋은 뜻일 리 없지요. 최소한 핀잔입니다.
이런 식입니다.
잠시 방콕 여행을 왔습니다. 글로벌 미식 천국인 방콕에 오자마자 첫날 점심으로 찾은 곳은 룽르엉 돼지고기 국수집입니다. 올해까지 미슐랭 식당으로 7년 연속 등재됐고 백종원 스트리트파이터에도 소개돼 꽤나 유명한 노포 맛집입니다.
이 집의 시그니처 메뉴는 똠양 국숩니다. 물, 비빔 두 가지가 있는데 면은 물론이고 무엇을 넣을지 부속물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새콤한 태국음식 특유의 똠양 국물 베이스이긴 한데 새콤함을 다소 싫어하는 저도 이 새콤함에는 연신 숟가락을 갖다 댔습니다. 약간 매콤하기도 해서 제 입맛에 제대로 네요.
제가 그렇습니다. 매콤한 것을 좋아하긴 하지만 장이 좀 민감한 지라 다음날 아침에 좀 고생을 합니다. 이날도 똠양 국물을 많이 먹어서인지 화장실을 빈번하게 이용합니다.
그랬더니만! 와이프 핀잔이 바로 날라 옵니다. “덩치는 산만해서!” 민감한 장 건강과 우람한 큰 덩치가 무슨 관련이랍니까?!
사실 와이프만 이렇게 연관 짓는 것은 아닙니다. 친구들 또는 업무 관계자들과의 술자리에서도 똑같은 장면이 연출됩니다.
술을 좋아하거나 즐기는 편은 아닙니다만 먹어야 하는 자리면 마십니다. ‘요령껏’ 마시기도 하지만 그렇지 못한 날도 많습니다. 괜한 객기를 부리기도 합니다. 대학교 신입생 환영회 때는 호기를 부렸다가 그 모습이 ‘낙인’ 찍혀 술자리에서는 타깃이 되곤 했습니다. 잘 못 마시는 동기 대신 막걸리 한 병을 그대로 들이켰더니 ‘오 이 녀석 잘 마시는구나’라는 소문이 나는 통에 한동안 고생했습니다.
대만에 와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대만이 이렇게도 술 문화가 ‘발달해’ 있는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정말 많이 마십니다. 정말요. 부임한 첫 주부터 대만 업계 관계자들과 술자리가 이어졌습니다. 놀랍게도 고량주에 맥주 폭탄을 마십니다. ‘좋은 술을 왜 이렇게 무섭게 마시냐’ 했더니 ‘한국 너네가 알려준 거잖아!’라고 우스개 농담합니다.
하여간 그 폭탄주를 꽤 마셨습니다. 처음이고 하니 긴장해서 그런지 잘 버텼습니다. 함께 마신 많은 사람들이 취해서 인사불성 됐는데 겨우 집에 잘 돌아갔습니다. 그 탓에 ‘술 잘 먹는 사람이 부임했다!’는 소문이 또 퍼졌습니다. 이후 업계와의 술자리에서는 으레 술병을 들고 제 자리로 찾아옵니다. 난감할 따름입니다.
그러다 술을 이기지 못하는 때도 간혹 있습니다. 그럼 바로 날라 옵니다. “덩치는 산만해서!” 몸집과 술을 꼭 연관 지을 필요가 있냐고요! 아 그런데 덩치가 크면 술통이 크니 이것은 좀 다른가요? 아무래도 몸집이 크면 술 해독에 유리한가요? 흠 술 분해인자가 많은 것과 관련되는 것 아닌가요? 쓸데없는 상상의 나래입니다만 하여간 몸집이 큰데 술이 약하면 이런 핀잔은 다반사인 듯합니다.
친구들이건 집에서건 실은 그리 진지한 꾸지람은 아니지만 어렸을 때부터 농담이건 핀잔이건 이 표현은 숫하게 들어온 말입니다. 한국인 평균 이상의 큰 키와 몸집을 부러워하는 시선도 있지만 당사자로서는 곤혹스러울 때도 꽤 많습니다.
사실 고백하건대, 제가 좀 겁이 많습니다. 무서운 영화나 드라마, 또는 유리 잔도를 걸어가야 하면 어쩌나 싶습니다. 어릴 때 ‘전설의 고향’을 볼 때가 생각납니다. 누나들과 이불을 뒤집어쓰고 구미호가 등장하는 무서운 장면에서는 눈을 꼭 감고 귀를 막습니다. 좀 심한가요? 하여간 그때도 어김없이 듣습니다. “등치는 산만해서!” 소리치고 싶네요. 체격이 커도 겁이 많을 수 있습니다!
학교가 그렇잖습니까. 학기 초에 아직 선생님과 학생들이 서로 잘 모르면 수업 시작할 때 질문할라치면 우선 눈에 띄는 녀석에게 ‘화살’이 날아갑니다. 그럼 아무리 숨으려 해도 숨을 수 없는 덩치는 그 ‘눈에 띄는 녀석’이 되곤 합니다.
학교뿐만이 아니죠. 사회나 여러 커뮤니티에서도 조별로 이뤄지는 행사가 있으면 조별 발표를 하곤 합니다. 그때도 서로 눈치를 보다 눈에 잘 띄는 덩치 있는 사람에게 자연스레 ‘양보’를 하곤 합니다. “덩치님~ 한번 맡아 주세요.” 이렇게 되는 거지요. 잘 하면 본전이고 긴장해서 실수라도 하면 “덩치는 산만해서!”란 핀잔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러다 보니 한국 사회에서는 작은 덩치가 호감을 불러일으킬 때도 있습니다. 그 표현 있지 않습니까. 작은 고추가 맵다! 몸집이 작아 기대감이 낮았지만 잘 하면 이런 감탄사가 나오는 것이지요.
갑자기 네안데르탈인이 떠오릅니다. 뜬금없이 네안데르탈인인가요? 하여간 요즘 왜 이리 고대 인류에 관심이 생기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영상을 많이 찾아 보다보니 유튜브 알고리즘 때문인지 관련 영상이 자동으로 추천됩니다.
네안데르탈인은 보통 약 4만년 전 멸종된 것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왜 멸종되었는지는 다양한 학설이 있습니다. 현생인류의 조상인 호모사피엔스와의 경쟁 속에서 도태되었다는 가설도 있고 호모사피엔스에 흡수 소멸됐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빙하기 환경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도태됐다는 학설도 있지요. 어쨌든 죽은 자를 매장함으로써 종교적 믿음을 가졌던 것으로 보이고 언어로 소통했을 것으로 생각되면서 예전보다는 보다 친근하게 느껴집니다.
이 네안데르탈인의 멸종 가설로 체격을 그 배경으로 꼽는 연구도 있습니다. 네안데르탈인은 호모사피엔스보다 체격이 컸다고 합니다. 남자의 키는 165cm에 80kg 정도로 추정됩니다. 그러다 보니 당시 하루를 건사하기 위해 네안데르탈인은 4,000kcal가 필요했는데 이는 호모사피엔스 필요 칼로리인 2,500kcal에 비해 60%나 더 많은 열량입니다.
빙하기 극심한 환경변화로 식량이 부족했을 당시, 이렇게 큰 체격을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먹을거리를 필요했을 네안데르탈인은 어쩔 수 없이 환경변화의 희생양이 됐을 수도 있습니다.
안타깝습니다. 그렇습니다. “네안데르탈인이여 덩치는 산만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