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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화 이경희 Sep 13. 2021

옛집 툇마루

- 길벗들이 쉬어가는 툇마루

옛집 툇마루


진화 이경희


서울 북촌에 가면 전통 한옥들이 맵시 있게 늘어서 있다. 원형은 훼손하지 않고 내부를 생활하기 편리하게 고친 집들도 마당에는 대부분 소박하게 가꾸어진 꽃밭과 장독대가 있다. 마당이 들여다보이는 집을 지나노라면 괜스레 낯익은 얼굴이 대문을 밀고 나올 것 같아서 마음이 설렌다.


불과 얼마 전 역병이 심각하지 않았을 때, 집안에 행사가 있어서 어르신들을 한옥 게스트 하우스에 모셨다. 오랜만에 일가친척이 만나서 정담을 나누고 서울 구경도 할 겸 한옥을 예약했더니 주변에 공원과 고궁이 있고, 가게와 식당을 이용하기도 편리했다. 어른들은 깨끗한 온돌방과 바삭바삭 풀 맥인 호청의 요이불을 보고 흐뭇해하셨다.


ㅁ자형 집 앞마당에 장독대가 있고 방마다 툇마루가 놓여 있었다. 대청마루에서는 여럿이 모여 앉아 식사나 간식을 나누기 좋고, 툇마루에서는 두세 명이 나란히 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편이 어울린다. 툇마루는 잠시 앉아서 쉬거나 방과 방 사이를 건너 갈 때 두루 요긴하다.

툇마루에 앉으면 대여섯 살 무렵이 기억난다. 동생과 둘이 부엌 가까이에 붙은 툇마루에 앉아서 어머니 저녁밥 짓는 모습을 바라보노라면 밥 뜸 드는 냄새와 찌개 끓는 냄새가 구수하게 풍겨왔다. 어린 나는 툇마루에 앉아 시장에 간 어머니를 기다리거나, 혼자 해바라기를 하며 혼잣말로 일인극을 하기도 했다.


봄, 여름, 가을에는 앉아있기 쾌적해도 겨울의 툇마루는 차갑고 외로웠다. 깊어진 겨울 햇볕 한 조각이 머물다 가기도 하고 더러는 눈바람이 비껴 들어와서 쌓였다. 낮에 만든 꼬마 눈사람 혼자 겨울 툇마루를 지키던 장면이 떠오른다.

부모님이 해외에서 근무하시던 몇 년간 나는 키우던 강아지까지 데리고 둘째 큰 집에 얹혀살았다. 방 세 개와 마루가 있는 ㄱ자형 한옥에 방 두 개짜리 슬라브집 한 동이 새로 붙었고, 마당이 거실로 변한 퓨전 한옥에는 대식구가 모여 살았다. 이웃에 고모 댁까지 있어서 사촌들과 자주 어울렸는데 오빠나 형, 언니나 누나가 동생들에게 공부를 가르치고 진학지도와 상담까지 하니 마치 하숙집 같기도 하고 사숙의 느낌도 드는 독특한 공동체였다. 지금은 사촌 중에 반 이상이 외국에 나가 살고 있기에 온라인으로 소통을 한다. 다문화 가족이 생기고 시절이 바뀌니 밥상이나 마루 대신 SNS가 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


아파트에는 다락방처럼 숨거나 툇마루처럼 편하게 앉아서 쉴만한 공간이 없다. 그래서 신도시 아파트에서 살다가 다시 서울로 이사 올 때 정원이 있는 마당 딸린 조용한 빌라를 택했다. 3층에 다락방이 있는 복층 구조의 집을 보자마자 꿈에도 그리던 서재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마당에는 큰 나무들이 자라고 있어서 이웃끼리 의논할 일이 있을 때는 열린 마루 대신 커다란 모과나무 아래 돗자리를 깔고 모여 앉아 반상회를 했다.


대문을 열면 보이는 대청마루와 툇마루는 현실세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2004년도에 ‘길벗들이 쉬어가는 툇마루’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개인 블로그는 약 50만 명의 방문객이 다녀가고 10,000개가 넘는 글과 자료를 저장한 곳간이 되었다. 그동안 온라인에서조차 현실의 공간처럼 툇마루, 다락방, 연구소로 간판이 수차례 바꾸고 인테리어를 새로 했지만 언제나 옛집과 같이 열린 공간을 두고 벗들과 면대면으로 만날 날을 기다리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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