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정이
< 정이, 연상호 감독, 강수연/김현주 주연, 2023 대한민국 SF >
넷플릭스 오리지널 작으로 개봉된 이 작품은 강수연 배우의 유작이라는 의미가 있기에 보고 싶었다.
영화 도입부의 내레이션으로 인해 엄청난 SF적 서사가 기대되었다. 급격한 기후변화로 지구는 폐허가 되고 인류는 우주에 새로운 이주지를 만드는데, 이 이주지들 사이에 세력 다툼이 생긴다. 그러고 보면 역사는 반복되는 것 같다. 전쟁을 통해 영토를 확보하고 세력을 확장해 나가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그리고 미래에도 되풀이된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프다. 겉으로는 평화를 외치지만 지금도 끊임없이 전쟁과 내전이 일어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에게 직접적인 영향이 없는 한 외면하고 살아가는 현실을 새삼 자각하게 해 주었다.
아무튼 이런 스펙터클 하고도 친절하며 직접적인 영화 초반의 설명, 정교하게 만들어진 SF 영화다운 CG, 난 아직 못 보았지만 흥행작인 <부산행>의 연상호 감독의 작품이라는 점, 무엇보다 강수연 배우의 유작이기에 기대가 컸다.
영화의 내용은 전쟁에서 전설적 영웅인 윤정이라는 사람의 뇌를 연구하여 인공지능 로봇을 만드는 이야기가 주된 줄거리다. 그녀의 사후 35년 후 그녀의 딸이 이 연구를 맡아 주도하지만, 이 연구를 지원해 주던 기관의 상업적 논리에 의해 이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전쟁 영웅 윤정이는 폐기되기에 이른다. 딸 윤서현은 직업적 윤리 교육을 철저히 받았지만, 인간적 고뇌와 감성으로 폐기될 인공지능을 빼돌리며 이야기는 SF가 아닌 신파극으로 바뀐다. 그리고 마무리도 제대로 못한 채 영화는 끝이 난다.
1. 세련되게 잘 만들어진 CG 작품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SF 영화와 견주어도 어색함 없이 느껴진다.
2. 영화의 내용 중에 새로운 터전 '쉘터'를 만들어 거기서 일을 하는 지구인들이 나온다. 그들이 일을 마치고 지하철과 흡사한 교통수단을 타고 지구로 이동하면서 노을을 바라본다. 내게는 2194년 미래에도 직장인의 고된 삶이 느껴지는 장면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장거리 출퇴근을 하는 염미정이라는 인물이 지하철을 타고 노을을 바라보는 고된 삶과 겹치는 장면이 나와서 점점 SF 영화가 드라마로 바뀌는 것은 아닌가 염려가 되기 시작했다.
3. 나의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영화는 SF에 맞지 않게 신파로 흘러가고 있었다. 영화 서두의 내레이션이 무색할 정도로 민망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내전에서 전설의 용병이었던 윤정이의 두뇌에 '미확인된 영역'은 바로 모성애로 가장한 신파였다. SF, AI, 쉘터 이런 단어들을 한방에 무색하게 만드는 신파가 등장한다. 기왕 이리 허무하게 한방에 무너뜨릴 것이라면 차라리 이 서사를 제대로 살려서 눈물을 쏙 뽑아냈어야 하는데 그러지도 못했다. 여러모로 아쉽다.
4. 연상호 감독의 <부산행>은 얻어걸린 것이냐는 매몰찬 관람평이 있었다. 거장의 감독들도 여러 습작을 거치기도 하고, 성공한 작품 후속작품도 부담이 클 것이라 여겨지긴 한다.
이번 작품에 대해 그의 인터뷰 기사를 보니 "한국식 SF"를 만들고 싶었다고 했으며, 그 주인공으로 강수연 배우를 생각하고 작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강수연 배우를 비롯해 연구진들이 입고 있는 옷도 개량식 한복 같았다. 한국식을 겨냥한 감독의 큰 그림이었을지 모르나, BTS 정국이 입은 모습과 사뭇 다른 핏이었으며 최첨단 SF 영화의 의상과 걸맞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의상마저도 아쉬웠다.
5. 엄청난 비용을 들여서 잘 차려진 세트장에 비해 스토리나 배우의 역할이 아쉽다는 느낌이다. 특히, 강수연 배우를 염두해서 작품을 기획했을 정도면 그 주인공의 서사를 더 잘 살렸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리 아쉬움이 큰 이유는 이 작품이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그녀의 유작이 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6.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공지능이 역할을 다하고 나서 용도가 변경되거나 폐기 처분되는 장면에서는 인공지능 로봇이나 인간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씁쓸한 생각마저 들었다. 이 장면에서는 여러 가지 철학적 생각에 잠기게 되었다. 생의 마지막에 대해 고찰해보게 된다.
7. 어쨌든 미래를 생각해 보는 SF 영화였다. 미래의 인공지능 윤리 문제, 인간과 로봇의 협업과 공감, 갈등 등 수많은 미래 공상 과학 영화애서 다룬 주제를 이 영화 역시 담고 있다. 단지 이 영화 <정이>는 이 문제를 뭔가 인간적인 요소로 풀어보려 한 것 같은데 그 설득력이 매우 부족했다.
기대에 비해 여러 가지 아쉬움이 남긴 했지만,
강수연 배우의 유작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주인공인 그녀가 영화 전반을 이끌고 나가는 시선에 충실하여 관람하려 노력해 보았다.
강수연 배우의 삶을 생각해 보니, 모르긴 해도 그녀에게 영화는 인생 전부였을 것이다. 이 영화는 그녀를 염두하고 기획한 영화라는 점이 그녀가 떠나버린 지금 오히려 영화 같은 스토리란 생각이 든다. 이렇게 그녀의 유작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