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학박사 김한중교수가 해석한 My Pedagogic Creed
1. ARTICLE ONE. WHAT EDUCATION IS
제1조 교육이라는 것
I believe that all education proceeds by the participation of the individual in the social consciousness of the race. This process begins unconsciously almost at birth, and is continually shaping the individual's powers, saturating his consciousness, forming his habits, training his ideas, and arousing his feelings and emotions. Through this unconscious education the individual gradually comes to share in the intellectual and moral resources which humanity has succeeded in getting together. He becomes an inheritor of the funded capital of civilization. The most formal and technical education in the world cannot safely depart from this general process. It can only organize it; or differentiate it in some particular direction.
나는 이것을 믿는다. 즉, 모든 교육은 개인이 종종의 의식에 참여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이 과정은 거의 출생 시 부터 무의식적으로 시작하여, 그 후 계속적으로 개인의 힘을 가다듬고 의식을 채우며 습관을 형성하고 아이디어를 훈련하며 감정과 정서를 일깨워 준다. 이 무의식적 교육을 통하여 개인은 인류가 애써 모아놓은 지적, 도덕적 자원을 점차로 공유하게 된다. 그는 문명이라는 합자 유산의 상속자가 된다. 이 세상의 가장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교육이라 하더라도 이 일반적인 과정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 제도화된 교육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그 과정을 특정한 방향으로 조직하고 세분 하는 것뿐이다.
I believe that the only true education comes through the stimulation of the child's powers by the demands of the social situations in which he finds himself. Through these demands he is stimulated to act as a member of a unity, to emerge from his original narrowness of action and feeling and to conceive of himself from the standpoint of the welfare of the group to which he belongs. Through the responses which others make to his own activities he comes to know what these mean in social terms. The value which they have is reflected back into them. For instance, through the response which is made to the child's instinctive babblings the child comes to know what those babblings mean; they are transformed into articulate language and thus the child is introduced into the consolidated wealth of ideas and emotions which are now summed up in language.
단 하나의 참된 교육은, 아동이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사회적 상황의 요구에 의하여 그의 힘을 자극하는 데서 나온다. 이 요구를 통하여 아동은 한 단위체의 구성원으로서 행동하도록, 원래 자기가 가지고 있던 좁은 행위와 정서에서 벗어나 그가 속하고 있는 집단의 복지라는 관점에서 자신을 파악하도록 자극을 받는다. 자기 자신의 행동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통하여 그는 이 다른 사람들의 존재를 사회적인 관점에서 파악하게 된다.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는 아동을 거쳐 그들에게 반사되어 들어간다. 예컨대, 아동의 본능적인 웅얼거림에 대한 다른 사람의 반응을 통하여 아동은 그 웅얼거리는 소리의 의미를 알게 된다. 즉, 그 웅얼거림의 분명한 언어로 변형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아동은 오늘날 언어에 요약되어 있는 풍부한 아이디어와 정서의 통합체에 입문된다.
I believe that this educational process has two sides - one psychological and one sociological; and that neither can be subordinated to the other or neglected without evil results following. Of these two sides, the psychological is the basis. The child's own instincts and powers furnish the material and give the starting point for all education. Save as the efforts of the educator connect with some activity which the child is carrying on of his own initiative independent of the educator, education becomes reduced to a pressure from without. It may, indeed, give certain external results but cannot truly be called educative. Without insight into the psychological structure and activities of the individual, the educative process will, therefore, be haphazard and arbitrary. If it chances to coincide with the child's activity it will get a leverage; if it does not, it will result in friction, or disintegration, or arrest of the child nature.
이 교육적 과정에는 심리학적 측면과 사회학적 측면이라는 두 개의 측면이 있으며, 그 중의 어느 것 하나라도 다른 것에 종속되거나 도외시되면 나쁜 결과가 따라온다. 이 두 가지 중에서 심리학적 측면은 교육적 과정의 기초를 이룬다. 아동 자신의 본능과 힘은 모든 교육의 자료이며 출발점이 된다. 만약 교육자의 노력이 아동의 독립적, 자발적인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활동과 연관을 맺지 못한다면, 교육은 외부로부터의 강압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것이 모종의 외적 결과를 가져온다 하더라도 그것을 진정한 의미에서 교육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러므로 아동 개인의 심리적 구조와 활동에 관한 통찰이 없이는 교육적 과정은 우발적이고 임의적인 것이 될 것이다. 어쩌다가 아동의 활동과 들어맞으면 효과를 보고, 그러지 않으면 아동의 본성과 마찰이 생기거나 그것을 와해 또는 금지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I believe that knowledge of social conditions, of the present state of civilization, is necessary in order properly to interpret the child's powers. The child has his own instincts and tendencies, but we do not know what these mean until we can translate them into their social equivalents. We must be able to carry them back into a social past and see them as the inheritance of previous race activities. We must also be able to project them into the future to see what their outcome and end will be. In the illustration just used, it is the ability to see in the child's babblings the promise and potency of a future social intercourse and conversation which enables one to deal in the proper way with that instinct.
사회적 조건에 관한 지식, 현재의 문명 상태에 과한 지식은 아동이 가지고 있는 힘을 올바르게 해석하는 데에 필요하다. 아동은 그 자신의 본능과 경향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가 그것을 사회적 맥락에 비추어 해석할 수 있기 전에는 그것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알 수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동의 본능과 경향을 과거의 사회에 다시 투입하여 그것을 이전의 인류의 활동의 유산으로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또한, 그것을 미래에 투영하여 그것이 가지고 올 성과 또는 그것이 이룩해야 할 목적이 무엇인가를 예상할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앞에서 사용한 예를 가지고 설명하자면, 이동의 웅엉거리는 소리에서 장차의 사회적 교섭과 대화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보는 능력, 이것이 곧 아동의 본능을 올바르게 다룰 수 있도록 한다.
I believe that the psychological and social sides are organically related and that education cannot be regarded as a compromise between the two, or a superimposition of one upon the other. We are told that the psychological definition of education is barren and formal - that it gives us only the idea of a development of all the mental powers without giving us any idea of the use to which these powers are put. On the other hand, it is urged that the social definition of education, as getting adjusted to civilization, makes of it a forced and external process, and results in subordinating the freedom of the individual to a preconceived social and political status.
교육의 심리학적 측면과 사회학적 측면은 서로 유기적으로 관련이 되어 있으며, 이런 의미에서의 교육은 양자 사이의 타협이나 그중의 하나가 다른 하나를 지배하는 것으로 규정되어서는 안 된다. 오늘날 사람들은, 교육을 심리학적 관점에서 정의하는 것을 공허하고 형식적이라는 말을 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러한 정의는 온갖 정신능력의 개발에 관해서는 언급하면서도 그 능력이 어디에 쓰이는가에 대해서는 말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교육은 개인을 문명에 적응시키는 일이라는 식의, 사회적 관점에서의 정의는 교육을 외적, 강제적 과정으로 취급하여 개인의 자유를 사전에 정해 놓은 사회적, 정치적 상황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I believe each of these objections is true when urged against one side isolated from the other. In order to know what a power really is we must know what its end, use, or function is; and this we cannot know save as we conceive of the individual as active in social relationships. But, on the other hand, the only possible adjustment which we can give to the child under existing conditions, is that which arises through putting him in complete possession of all his powers. With the advent of democracy and modern industrial conditions, it is impossible to foretell definitely just what civilization will be twenty years from now. Hence it is impossible to prepare the child for any precise set of conditions. To prepare him for the future life means to give him command of himself; it means so to train him that he will have the full and ready use of all his capacities; that his eye and ear and hand may be tools ready to command, that his judgment may be capable of grasping the conditions under which it has to work, and the executive forces be trained to act economically and efficiently. It is impossible to reach this sort of adjustment save as constant regard is had to the individual's own powers, tastes, and interests - say, that is, as education is continually converted into psychological terms.
교육의 두 측면을 서로 대립된 것으로 따로따로 떼어놓고 보면, 위의 두 가지 반론은 모두 타당하다. 힘이라는 것이 참으로 어떤 것인지 알려면 그 힘의 목적, 용도, 기능을 알아야 하며, 그렇게 하자면 개인을 사회적 관계 속에서 활동하는 존재로 파악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 현존의 사회적 조건하에서 아동으로 하여금 적응할 수 있도록 하는 유일한 방도는 아동이 가지고 있는 모든 힘을 완전하게 발휘 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다. 민주주의와 현대 산업사회의 도래로 말미암아, 지금부터 20년 뒤에 문명이 어떻게 될지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따라서 아동을 모종의 엄밀하게 규정된 상황에 준비시켜 준다는 것도 있을 수 없다. 이동에게 장차의 삶을 위한 준비를 시켜준다는 것은 아동으로 하여금 스스로 통어할 수 있도록 하는 것, 다시 말하면, 그의 모든 능력을 언제 어디서나 충분히 활용할 수 있도록 그를 훈련시킨다는 뜻이다. 그의 눈과 귀와 손은 언제라도 사용할 수 있는 도구가 되어야 하며, 그의 판단은 그것이 적용될 상황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하며, 그의 실행능력은 경제적으로 효율적으로 작용할 수 있도록 훈련되어야 한다. 이런 식의 적응에 도달하려면, 개인 자신의 능력과 취향과 관심에 대한 항구적인 존중이 있어야 한다. 즉, 교육은 늘 심리학적인 고려에 비추어 점검되어야 하는 것이다.
In sum, I believe that the individual who is to be educated is a social individual and that society is an organic union of individuals. If we eliminate the social factor from the child we are left only with an abstraction; if we eliminate the individual factor from society, we are left only with an inert and lifeless mass. Education, therefore, must begin with a psychological insight into the child's capacities, interests, and habits. It must be controlled at every point by reference to these same considerations. These powers, interests, and habits must be continually interpreted - we must know what they mean. They must be translated into terms of their social equivalents - into terms of what they are capable of in the way of social service.
요약컨대, 내가 믿는 바로는, 교육을 받는 개인은 사회적 개인이며, 사회는 개인의 유기적인 통합체이다. 아동에서 사회적 요인을 빼어 버리면 남는 것은 추상적 존재일 뿐이다. 사회에서 개인적 요인을 빼어버리면 남는 것은 무기력하고 생명 없는 덩어리일 뿐이다. 그러므로 교육은 아동의 능력과 관심과 습관에 대한 심리학적 통찰로 시작해야 한다. 교육의 모든 고비를 통제하는 것은 바로 그와 동일한 고려에 의해서이다. 아동의 능력과 관심과 습관은 끊임 없이 다시 해석되지 않으면 안 된다. 매 단계에서 우리는 그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사회적 맥락에 비추어, 다시 말하면 그것들이 사회에 어떤 봉사를 할 수 있는가 하는 관점에서 해석하지 않으면 안 된다.
2. ARTICLE TWO. WHAT THE SCHOOL IS
제2조 학교라는 곳
I believe that the school is primarily a social institution. Education being a social process, the school is simply that form of community life in which all those agencies are concentrated that will be most effective in bringing the child to share in the inherited resources of the race, and to use his own powers for social ends.
나는 이것을 믿는다. 즉, 학교는 다른 무엇이기 이전에 하나의 사회적 기관이다. 교육이 사회적 과정인 만큼, 학교는 당연히 사호생활의 한 형태가 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학교는 아동으로 하여금 인류가 물려받은 자원을 공유하고 자기 자신의 힘을 사회적 목적에 사용하도록 양육하는 데에 가장 효율적인 모든 사회기관들이 집결된 곳이다.
I believe that education, therefore, is a process of living and not a preparation for future living.
그러므로 교육은 삶의 과정 그 자체이며, 장차의 삶을 위한 준비가 아니다.
I believe that the school must represent present life - life as real and vital to the child as that which he carries on in the home, in the neighborhood, or on the play-ground.
학교는 삶의 전형적인 모습을 나타내어야 한다. 이 삶은 아동이 가정에서, 이웃에서, 놀이터에서 살고 있는 삶, 그것과 다름없이 실감과 생기를 가진 것이어야 한다.
I believe that education which does not occur through forms of life, forms that are worth living for their own sake, is always a poor substitute for the genuine reality and tends to cramp and to deaden.
삶의 여러 형식들, 그 자체로서 살 가치가 있는 삶의 형식들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교육이 아니라면, 그것은 언제나 진정한 실재의 대용물일 뿐이며, 족쇄를 채우고 목을 조르는 일로 되고 만다.
I believe that the school, as an institution, should simplify existing social life; should reduce it, as it were, to an embryonic form. Existing life is so complex that the child cannot be brought into contact with it without either confusion or distraction; he is either overwhelmed by multiplicity of activities which are going on, so that he loses his own power of orderly reaction, or he is so stimulated by these various activities that his powers are prematurely called into play and he becomes either unduly specialized or else disintegrated.
사회기관으로서의 학교는 현존의 사회생활을 단순화해야 한다. 학교는, 말하자면, 사회생활을 태아의 형태로 축소하여야 한다. 현재의 삶은 너무 복잡하여, 아동이 직접 접촉하면 혼란과 산만에 빠지게 된다. 현재 진행 중인 수 많은 활동에 압도당하여, 아동은 질서정연하게 반응하는 자신의 힘을 읽어버리거나, 그렇지 않으면 다양한 활동에 자극되어 자기 자신의 힘을 때 이르게 발휘하려 들다가 지나치게 전문화된 길로 빠지거나 와해되어 버린다.
I believe that, as such simplified social life, the school life should grow gradually out of the home life; that it should take up and continue the activities with which the child is already familiar in the home.
이와 같은 단순한 사회생활로서의 학교는 가정생활을 출발로 하여 거기서 점차 성장해 나오는 모습을 띠어야 한다. 학교의 생활은 아동이 가정에서 이미 익숙해 있는 활동들을 취하여 그것을 계속시켜 나가야 한다.
I believe that it should exhibit these activities to the child, and reproduce them in such ways that the child will gradually learn the meaning of them, and be capable of playing his own part in relation to them.
학교는 가정에서의 활동을 아동에게 보여주어서 아동이 점차로 그 활동의 의미를 알게 되도록, 그리하여 그 활동과의 관련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으로 그것을 재현해 주어야 한다.
I believe that this is a psychological necessity, because it is the only way of securing continuity in the child's growth, the only way of giving a background of past experience to the new ideas given in school.
이것은 아동의 성장을 계속성을 부여하는 유일한 방법이요, 아동이 가지고 있는 과거 경험배경에 학교교육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부여하는 유일한 방법이며, 이점에서 그것은 심리학적 필수조건이다.
I believe it is also a social necessity because the home is the form of social life in which the child has been nurtured and in connection with which he has had his moral training. It is the business of the school to deepen and extend his sense of the values bound up in his home life.
이것은 또한 사회적 필수조건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가정은 이때까지 아동이 양육되고 도덕적 훈련을 받은 사회생활의 한 형태이며, 여기에 비하여 학교는 가정생활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는 아동의 가치관을 심화, 확대시키는 것을 임무로 삼기 때문이다.
I believe that much of present education fails because it neglects this fundamental principle of the school as a form of community life. It conceives the school as a place where certain information is to be given, where certain lessons are to be learned, or where certain habits are to be formed. The value of these is conceived as lying largely in the remote future; the child must do these things for the sake of something else he is to do; they are mere preparation. As a result they do not become a part of the life experience of the child and so are not truly educative.
현재의 교육이 실패하는 가장 큰 원인은 학교가 사회생활의 한 형태라는 이 근본적 원리를 무시한다는 데에 있다. 현재의 교육에서는 학교를 학생들에게 정보를 제공해 주는 곳, 공부를 가르쳐 주는 곳, 습관을 형성해 주는 곳으로 생각한다. 학교에서 습득되는 이런 것들의 가치는 주로 먼 장래에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아동은 장차 다른 어떤 것을 하기 위하여 이런 것들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그것은 단순한 준비인 것이다. 그 결과로, 이런 것들은 아동의 현재의 생활경험의 일부가 되지 못하고 따라서 진정한 교육이 되지 못한다.
I believe that moral education centres about this conception of the school as a mode of social life, that the best and deepest moral training is precisely that which one gets through having to enter into proper relations with others in a unity of work and thought. The present educational systems, so far as they destroy or neglect this unity, render it difficult or impossible to get any genuine, regular moral training.
도덕교육은 이와 같이 학교를 사회생활의 한 양식으로 보는 관점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된다. 가장 훌륭하고 가장 깊은 도덕적 훈련은 바로 일과 사고가 단일체를 이루는 사태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이루어진다. 현재의 교육체제가 이 단일체를 파괴하거나 도외시하는 한, 진정하고 본격적인 도덕훈련은 어렵거나 불가능하다.
I believe that the child should be stimulated and controlled in his work through the life of the community.
아동이 일의 자극과 지침을 받는 것은 지역사회의 생활을 통해서이다.
I believe that under existing conditions far too much of the stimulus and control proceeds from the teacher, because of neglect of the idea of the school as a form of social life.
현재의 상황에서 그 자극과 지침이 지나칠 정도로 교사에게서 나오는 것은, 학교가 사회생활의 한 형식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I believe that the teacher's place and work in the school is to be interpreted from this same basis. The teacher is not in the school to impose certain ideas or to form certain habits in the child, but is there as a member of the community to select the influences which shall affect the child and to assist him in properly responding to these influences.
학교에서의 교사의 위치와 역할도 이와 동일한 기초에 입각하여 해석해야 한다. 학교에서 교사는 아동에게 관념을 주입하고 습관을 형성하는 사람이 아니라, 지역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아동에게 미쳐야 할 영향을 선정하고 아동이 이 영향에 올바르게 반응하도록 도와주는 사람이다.
I believe that the discipline of the school should proceed from the life of the school as a whole and not directly from the teacher.
학교에서의 훈육은 학교생활 전체에서 나와야 하며, 직접 교사에게서 나와서는 안 된다.
I believe that the teacher's business is simply to determine on the basis of larger experience and riper wisdom, how the discipline of life shall come to the child.
교사의 일은 단순히, 그가 가지고 있는 보다 풍부한 경험과 보다 성숙한 지혜로, 생활의 훈육이 아동에게 어떤 방식으로 이우러져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데에 있다.
I believe that all questions of the grading of the child and his promotion should be determined by reference to the same standard. Examinations are of use only so far as they test the child's fitness for social life and reveal the place in which he can be of most service and where he can receive the most help.
아동의 성적이나 진급에 관한 모든 문제도 위와 동일한 기준에 비추어 결정해야 한다. 시험의 용도는 오직 아동이 사회생활을 해 나가는 데에 얼마나 적합한가를 사정하고, 아동이 어떤 점에서 가장 유용한 봉사를 할 수 있으며 어떤 점에서 가장 도움을 필요로 하는 가를 시사 받는 데에 있다.
3. ARTICLE THREE. THE SUBJECT-MATTER OF EDUCATION
제3조 교육의 내용
I believe that the social life of the child is the basis of concentration, or correlation, in all his training or growth. The social life gives the unconscious unity and the background of all his efforts and of all his attainments.
나는 이것을 믿는다. 즉, 아동의 사회생활은 그의 모든 훈련 또는 성장을 집중시키고 관련짓는 기초이다. 사회생활은 아동에게 무의식적 단일체가 되며 그의 모는 노력과 그의 모든 성취에 배경을 이룬다.
I believe that the subject-matter of the school curriculum should mark a gradual differentiation out of the primitive unconscious unity of social life.
학교 교육과정의 내용은 사회생활의 원초적, 무의식적 단일성을 출발점으로 하여 거기서 점차 분화된 형태를 나타내어야 한다.
I believe that we violate the child's nature and render difficult the best ethical results, by introducing the child too abruptly to a number of special studies, of reading, writing, geography, etc., out of relation to this social life.
이 시회생활과의 훈련을 떠나서 읽기, 쓰기, 지리 등등, 여러 개의 세분된 교과들을 너무 갑자기 아동에게 제시하는 것은 아동의 천성을 역행하는 것이요, 교과에서 생길 수 있는 최선의 윤리적 결과를 얻기 어렵게 만든다.
I believe, therefore, that the true centre of correlation of the school subjects is not science, nor literature, nor history, nor geography, but the child's own social activities.
학교 교과들을 서로 관련짓는 진정한 구심점은 과학도 아니요, 문학도, 역사도, 지리도 아니며, 오직 아동 자신의 사회적 활동이다.
I believe that education cannot be unified in the study of science, or so-called nature study, because apart from human activity, nature itself is not a unity; nature in itself is a number of diverse objects in space and time, and to attempt to make it the centre of work by itself, is to introduce a principle of radiation rather than one of concentration.
과학, 또는 소위(자연공부)가 교육을 통합하는 구심점이 될 수 없는 것은, 인간 활동과의 관련을 떠난 자연 그 자체는 단일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연 그 자체는 공간과 시간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다양한 물체들일 뿐이며, 이러한 자연을 그 자체로서 공부의 구심점으로 삼으려고 하는 것은 집중이 아닌 분산의 원리를 따르는 것이다.
I believe that literature is the reflex expression and interpretation of social experience; that hence it must follow upon and not precede such experience. It, therefore, cannot be made the basis, although it may be made the summary of unification.
문학은 사회적 경험을 되받아서 표현하고 해석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그러한 경험에 앞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뒤따른 것이다. 그러므로 문학은 통합된 교과를 요약하는 수단은 될지 모르나, 교과통합의 기초는 될 수 없다.
I believe once more that history is of educative value in so far as it presents phases of social life and growth. It must be controlled by reference to social life. When taken simply as history it is thrown into the distant past and becomes dead and inert. Taken as the record of man's social life and progress it becomes full of meaning. I believe, however, that it cannot be so taken excepting as the child is also introduced directly into social life.
다시, 역사의 교육적 가치는 사회생활과 사회적 성장의 여러 면모를 제시하는 데에 있다. 사회생활과 관련 없는 단순한 역사로 취급되면, 그것은 먼 과거로 내던져져서 생기 없고 무기력한 것이 되고 만다. 인간의 사회생활과 진보의 기록으로 취급되면, 그것은 풍부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러나 내가 믿는 바로는, 역사를 이런 관점에서 취급하려면 아동에게 사회생활을 직접 제시하는 일이 병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
I believe accordingly that the primary basis of education is in the child's powers at work along the same general constructive lines as those which have brought civilization into being.
교육의 제 1차적인 기초는 인류의 문명을 이룩하는 데에 작용하는 것과 동일한 방향으로 일반적인 건설적 능력이 아동에게도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I believe that the only way to make the child conscious of his social heritage is to enable him to perform those fundamental types of activity which makes civilization what it is.
아동으로 하여금 그가 물려받은 사회적 유산을 의식하도록 하는 오직 한 가지 방법은 오늘날의 문명을 이룩한 활동의 근본적인 유형들을 아동이 직접 수행할 수 있도록 기회와 능력을 부여해 주는 것이다.
I believe, therefore, in the so-called expressive or constructive activities as the centre of correlation.
교과를 서로 관련짓는 구심점은 이른바 표현활동 또는 구성활동이다.
I believe that this gives the standard for the place of cooking, sewing, manual training, etc., in the school.
학교에서 요리, 바느질, 수공훈련 등이 차지하는 위치는 이 기준에 비추어 판단해야 한다.
I believe that they are not special studies which are to be introduced over and above a lot of others in the way of relaxation or relief, or as additional accomplishments. I believe rather that they represent, as types, fundamental forms of social activity; and that it is possible and desirable that the child's introduction into the more formal subjects of the curriculum be through the medium of these activities.
이런 것들은 많은 다른 교과 위에, 그런 교과의 지적 부담을 완화하기 위하여 도입될 것도 아니요, 그런 교과와는 별도의 추가적인 성취를 위한 특별교과도 아니다. 내가 믿기로는, 교과의 유형으로 말하면, 그런 활동들은 사회적 활동의 근본적 형식이며, 아동이 보다 형식적인 교과에 들어갈 때, 일단 그런 구성활동을 통하여 들어가는 것이 가능하고 또 바람직하다.
I believe that the study of science is educational in so far as it brings out the materials and processes which make social life what it is.
과학 공부의 교육적 효과는, 과학이 현재의 사회생활을 가능하게 한 자료와 과정을 드러내어 준다는 데에 있다.
I believe that one of the greatest difficulties in the present teaching of science is that the material is presented in purely objective form, or is treated as a new peculiar kind of experience which the child can add to that which he has already had. In reality, science is of value because it gives the ability to interpret and control the experience already had. It should be introduced, not as so much new subject- matter, but as showing the factors already involved in previous experience and as furnishing tools by which that experience can be more easily and effectively regulated.
현재 과학교육의 가장 곤란한 문제점은 학습 자료를 순전히 객관적인 형태로 제시하거나, 아동이 이미 경험한 것과는 별개의, 전혀 새로운 종류의 경험으로 취급한다는 데에 있다. 사실상, 과학은 이미 우리가 한 경험을 해석하고 통제하는 능력이며, 그 가치 또한 여기에 있다. 교과로서의 과학은 새로운 교과로서 가르칠 것이 아니라, 이전의 경험에 이미 들어 있었던 요인들을 드러내어 보여주는 것으로서, 그리고 그 경험을 더 쉽게, 더 효과적으로 조정하는 도구를 제공하는 것으로서 가르쳐야 한다.
I believe that at present we lose much of the value of literature and language studies because of our elimination of the social element. Language is almost always treated in the books of pedagogy simply as the expression of thought. It is true that language is a logical instrument, but it is fundamentally and primarily a social instrument. Language is the device for communication; it is the tool through which one individual comes to share the ideas and feelings of others. When treated simply as a way of getting individual information, or as a means of showing off what one has learned, it loses its social motive and end.
현재 우리는 문학과 언어에서 사회적 요소를 빼내어 버림으로써 그 교과가 가지고 있는 가치를 많이 잃어버리고 있다. 교육학 책에서 언어는 거의 언제나 단순히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취급되어 왔다. 물론, 언어는 논리적 도구이지만, 그것은 근본적으로, 또 일차적으로 사회적 도구이다. 언어는 의사소통의 방안이요, 한 개인이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느낌을 공유하는 도구이다. 단순히 개인적 정보를 얻는 방법으로, 또는 이때까지 배운 것을 남에게 떠벌리는 수단으로 취급한다면, 언어는 그것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동기와 목적을 읽어버린다.
I believe that there is, therefore, no succession of studies in the ideal school curriculum. If education is life, all life has, from the outset, a scientific aspect; an aspect of art and culture and an aspect of communication. It cannot, therefore, be true that the proper studies for one grade are mere reading and writing, and that at a later grade, reading, or literature, or science, may be introduced. The progress is not in the succession of studies but in the development of new attitudes towards, and new interests in, experience.
그러므로 이상적인 학교 교육과정에는 교과를 일렬로 나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만약 교육이 삶이라면, 모든 삶은 처음부터 과학적 측면, 예술과 문화의 측면, 그리고 의사소통의 측면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어떤 학년에 적당한 교과는 단순히 읽기와 쓰기라든지, 다음 학년에 가서는 읽기와 문학, 과학 등을 가르쳐도 좋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교과를 배우는 데에 있어서 진보는 일렬로 늘어선 교과를 배워 나가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 대한 새로운 태도, 새로운 관심이 발달해 나가는 과정이다.
I believe finally, that education must be conceived as a continuing reconstruction of experience; that the process and the goal of education are one and the same thing.
교육은 경험의 계속적인 재구성으로 파악해야 한다. 교육의 과정과 목적은 하나요,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I believe that to set up any end outside of education, as furnishing its goal and standard, is to deprive the educational process of much of its meaning and tends to make us rely upon false and external stimuli in dealing with the child.
교육의 바깥에 교육의 표적과 기준을 제시하는 목적을 설정하는 것은 교육의 과정이 지니고 있는 의미의 대부분을 박탈하고, 우리로 하여금 외적인 가짜 자극에 의존하여 아동을 대하도록 한다.
4. ARTICLE FOUR. THE NATURE OF METHOD
제4조 교육방법의 성격
I believe that the question of method is ultimately reducible to the question of the order of development of the child's powers and interests. The law for presenting and treating material is the law implicit within the child's own nature. Because this is so I believe the following statements are of supreme importance as determining the spirit in which education is carried on:
나는 이것을 믿는다. 즉, 교육방법의 문제는 궁극적으로 아동의 힘과 관심의 발달이 이루어지는 순서에 관한 문제로 귀착된다. 학습 자료를 제시하고 취급하는 법칙은 아동 자신의 본성에 씌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하에 적힌 명제들이 교육을 해 나가는 정신을 결정하는 데에 최고의 중요성을 가진다고 믿는다.
1. I believe that the active side precedes the passive in the development of the child nature; that expression comes before conscious impression; that the muscular development precedes the sensory; that movements come before conscious sensations; I believe that consciousness is essentially motor or impulsive; that conscious states tend to project themselves in action.
아동의 본성의 발달과정에서, 능동적 측면이 수동적 측면에 선행하며, 외적 표현이 내적 날인(conscious impression)에 선행하며, 근육의 발달이 감각의 발달에 선행하며, 운동기능이 의식적 감각기능에 선행한다. 내가 믿기로는 의식은 운동 또는 활동에 그 근본을 두고 있으며, 의식적 상태는 행동을 통하여 그 모습을 드러낸다.
I believe that the neglect of this principle is the cause of a large part of the waste of time and strength in school work. The child is thrown into a passive, receptive or absorbing attitude. The conditions are such that he is not permitted to follow the law of his nature; the result is friction and waste.
학교공부에서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는 대부분의 원인은 위의 원리를 도외시하는 데에 있다. 아동은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흡수하는 태도를 취하도록 강요된다. 이 상황은 곧 아동으로 하여금 그의 본성의 법칙을 따르지 못하도록 하는 상황이며, 여기서 생기는 결과는 마찰과 낭비이다.
I believe that ideas (intellectual and rational processes) also result from action and devolve for the sake of the better control of action. What we term reason is primarily the law of orderly or effective action. To attempt to develop the reasoning powers, the powers of judgment, without reference to the selection and arrangement of means in action, is the fundamental fallacy in our present methods of dealing with this matter. As a result we present the child with arbitrary symbols. Symbols are a necessity in mental development, but they have their place as tools for economizing effort; presented by themselves they are a mass of meaningless and arbitrary ideas imposed from without.
아이디어 또한, 행동에서 나오며 행동을 더 잘 통제하기 위하여 사용된다. 추리력과 판단력을 발달시키려고 하면서 행동의 수단을 선택하고 배열하는 문제를 전연 고려하지 않는 것이 오늘날 교육방법의 근본적인 오류이다. 그 결과로 우리는 아동에게 임의적이고 무의미한 상징을 제시한다. 상징은 지적 발달에 필요 불가결하지만, 여기서 상징의 위치는 노력을 절약하는 도구가 된다는 것이다. 상징 그 자체만을 제시하면, 그것은 외부에서 강제로 부과된 무의미하고 임의적인 아이디어의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2. I believe that the image is the great instrument of instruction. What a child gets out of any subject presented to him is simply the images which he himself forms with regard to it.
심상은 수업의 중요한 보조수단이다. 아동이 그에게 지시된 교과에서 무엇인가 얻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 교과에 관련하여 아동 자신이 형성하는 심상이다.
I believe that if nine-tenths of the energy at present directed towards making the child learn certain things, were spent in seeing to it that the child was forming proper images, the work of instruction would be indefinitely facilitated.
현재 아동이 학습을 할 수 있도록 기울이고 있는 노력의 십 분의 구를 아동이 심상을 형성하도록 하는 데에 할애한다면, 가르치는 일은 엄청나게 촉진될 것이다.
I believe that much of the time and attention now given to the preparation and presentation of lessons might be more wisely and profitably expended in training the child's power of imagery and in seeing to it that he was continually forming definite, vivid, and growing images of the various subjects with which he comes in contact in his experience.
현재 수업을 준비하고 자료를 제시하는 데에 들이고 있는 시간과 노력을 보다 현명하고 유익하게 쓰는 방법은 그것을 아동의 심상형성 능력의 훈련에 쓰는 것이다. 교사는 아동이 경험에서 접하게 되는 여러 가지 교과내용에 관하여 명화하고 선명한 심상을 계속적으로 형성, 확대해 나가도록 돌보아 주어야 한다.
3. I believe that interests are the signs and symptoms of growing power. I believe that they represent dawning capacities. Accordingly the constant and careful observation of interests is of the utmost importance for the educator.
관심은 힘이 성장해 간다는 신호요 징후이다. 내가 믿기로, 관심이 있다는 것은 능력이 생기기 시작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따라서 아동의 관심에 대한 부단하고 세밀한 관찰은 교육자에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I believe that these interests are to be observed as showing the state of development which the child has reached.
아동에게서 관찰되는 관심은 그가 현재 도달해 있는 발달의 정도를 나타낸다고 보아야 한다.
I believe that the prophesy the stage upon which he is about to enter.
아동의 관심은 또한 아동이 지금 막 들어가려고 하는 발달의 단계를 예고해 준다.
I believe that only through the continual and sympathetic observation of childhood's interests can the adult enter into the child's life and see what it is ready for, and upon what material it could work most readily and fruitfully.
아동기에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관심에 대한 계속적이고 동정적인 관찰을 통해서만 성인은 아동의 삶에 들어갈 수 있다. 그때 비로소 성인은 아동이 그 삶에서 무슨 일을 할 태세가 되어 있으며 아동이 가장 기꺼이, 가장 보람 있게 다룰 수 있는 자료가 어떤 것인가를 알 수 있다.
I believe that these interests are neither to be humored nor repressed. To repress interest is to substitute the adult for the child, and so to weaken intellectual curiosity and alertness, to suppress initiative, and to deaden interest. To humor the interests is to substitute the transient for the permanent. The interest is always the sign of some power below; the important thing is to discover this power. To humor the interest is to fail to penetrate below the surface and its sure result is to substitute caprice and whim for genuine interest.
아동의 관심을 부추겨서도 안 되고 억압해서도 안 된다. 아동의 관심을 억압하는 것은 아동을 성인으로 바꿔치기하는 것이요, 그렇게 함으로써 지적 호기심과 민첩성을 약화시키고, 자발성을 억압하며 관심과 짓밟아 버리는 것이다. 아동의 관심을 부치기는 것은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것을 영원한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관심이라는 것은 언제나 밑에 숨어있는 힘이 외적 표지이다. 중요한 것은 이 밑에 있는 힘을 알아내는 것이다. 아동의 관심을 부치기는 것은 표면의 밑을 파고들어 갈 수 없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며, 여기서 생기는 어김없는 결과는 진정한 관심을 일시적인 기분이나 변덕으로 대치하는 것이다.
4. I believe that the emotions are the reflex of actions.
정서는 행동의 반사이다.
I believe that to endeavor to stimulate or arouse the emotions apart from their corresponding activities, is to introduce an unhealthy and morbid state of mind.
정서는 상응하는 활동과 관련짓지 않고 정서를 자극 또는 유발하려고 하는 것은 건전하지 못한 병적인 정신 상태를 초래한다.
I believe that if we can only secure right habits of action and thought, with reference to the good, the true, and the beautiful, the emotions will for the most part take care of themselves.
만약 우리가 진, 선, 미에 대하여 올바른 행동과 사고의 습관을 길러 줄 수 있다면, 정서 문제는 대체로 보아 저절로 해결된다.
I believe that next to deadness and dullness, formalism and routine, our education is threatened with no greater evil than sentimentalism.
생기 없이 멍청한 것, 형식주의와 전례답습, 이런 것들 다음으로 우리의 교육을 위협하는 폐단으로서 감상주의만큼 큰 것이 없다.
I believe that this sentimentalism is the necessary result of the attempt to divorce feeling from action.
이 감상주의적 감정을 행동으로부터 분리하려고 하는 데서 필연적으로 따라 오는 결과이다.
5. ARTICLE FIVE. THE SCHOOL AND SOCIAL PROGRESS
제5조 학교와 사회진보
I believe that education is the fundamental method of social progress and reform.
나는 이것을 믿는다. 즉, 교육은 사회의 진보와 개혁의 근본적인 방법이다.
I believe that all reforms which rest simply upon the enactment of law, or the threatening of certain penalties, or upon changes in mechanical or outward arrangements, are transitory and futile.
단순히 법률을 제정한다든지, 형벌로 위협한다든지, 기계적인 또는 외적인 제도를 바꾸는 것에 의존하는 일체의 개혁은 순간적이고 비효과적이다.
I believe that education is a regulation of the process of coming to share in the social consciousness; and that the adjustment of individual activity on the basis of this social consciousness is the only sure method of social reconstruction.
교육은 사회적 의식을 공유하게 되는 과정을 조정하는 일이며, 이 사회적 의식을 기초로 하여 개인의 활동을 조정하는 것이야말로 유일하게 확실한 사회재건의 방법이다.
I believe that this conception has due regard for both the individualistic and socialistic ideals. It is duly individual because it recognizes the formation of a certain character as the only genuine basis of right living. It is socialistic because it recognizes that this right character is not to be formed by merely individual precept, example, or exhortation, but rather by the influence of a certain form of institutional or community life upon the individual, and that the social organism through the school, as its organ, may determine ethical results.
이러한 생각은 개인주의적 이상과 사회주의적 이상을 동시에 존중한다. 개인의 인격형성을 올바른 삶의 단 하나의 지정한 기초로 인정한다는 점에서 보면, 그것은 개인을 존중하는 것이다. 이 올바른 인격이 단순히 개인의 훈시나 모법이나 권유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제도적, 공동체적 삶의 형식이 개인에게 끼치는 영향으로 말미암아 형성되는 것, 그리고 사회적 유기체가 그 하나의 기관인 학교를 통하여 윤리적 결과를 결정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보면, 그것은 사회를 존중하는 것이다.
I believe that in the ideal school we have the reconciliation of the individualistic and the institutional ideals.
이상적인 학교에서는 개인의 이상과 제도의 이상이 혼연일체가 되어 있다.
I believe that the community's duty to education is, therefore, its paramount moral duty. By law and punishment, by social agitation and discussion, society can regulate and form itself in a more or less haphazard and chance way. But through education society can formulate its own purposes, can organize its own means and resources, and thus shape itself with definiteness and economy in the direction in which it wishes to move.
그러므로 교육에 대한 의무는 지역사회가 져야 할 최고의 도덕적 의무이다. 법률과 형벌에 의하여, 사회적 선동과 토론에 의하여, 사회가 그 자체를 조정하고 형성해 나가는 과정은 다분히 비체계적이고 우연적인 것이다. 그러나 교육을 통하여 사회는 그 자체의 목적을 설정하고, 그 자체의 수단과 자원을 조직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이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확고하게, 또 경제적으로 그 자체를 가다듬어 나갈 수 있다.
I believe that when society once recognizes the possibilities in this direction, and the obligations which these possibilities impose, it is impossible to conceive of the resources of time, attention, and money which will be put at the disposal of the educator.
사회가 일단 이 방향으로의 가능성과 그 가능성을 실현하는 데에 다른 임무를 인정하면, 교육자가 시간과 주의와 금전의 자원을 자기 마음대로 처분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게 된다.
I believe it is the business of every one interested in education to insist upon the school as the primary and most effective instrument of social progress and reform in order that society may be awakened to realize what the school stands for, and aroused to the necessity of endowing the educator with sufficient equipment properly to perform his task.
학교가 사회의 진보와 개혁의 가장 중요하고 가장 효과적인 관심사임을 역설하여, 사회 전체가 학교라는 곳에서 하는 일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고, 교육자가 그 일을 적절하게 수행하는 데 충분한 장비를 갖추도록 할 필요성을 느끼도록 하는 것, 이것은 교육에 관심이 있는 모든 사람의 과업이다.
I believe that education thus conceived marks the most perfect and intimate union of science and art conceivable in human experience.
이런 의미에서의 교육은 과학과 예술이 인간경험으로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하고 긴밀한 관계로, 결합된 형태를 나타낸다.
I believe that the art of thus giving shape to human powers and adapting them to social service, is the supreme art; one calling into its service the best of artists; that no insight, sympathy, tact, executive power is too great for such service.
그리하여 인간의 힘에 적절할 형체를 부여하고 그것을 사회에 유용하도록 적응시키는 예술이 최고의 예술이요, 그것이 가지고 있는 유용성을 살리는 사람이 가장 훌륭한 예술가이다. 이 일을 위해서는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통찰과 동정심과 요령과 실행력이 필요하다.
I believe that with the growth of psychological science, giving added insight into individual structure and laws of growth; and with growth of social science, adding to our knowledge of the right organization of individuals, all scientific resources can be utilized for the purposes of education.
심리학적 연구의 발달로 개인 심리의 구조와 성장의 법칙에 대한 통찰이 증가함에 따라, 그리고 사회과학의 발달로 개인들의 올바른 조직체에 대한 지식이 증가함에 따라, 이제 우리는 모든 과학적 자원을 교육의 목적에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I believe that when science and art thus join hands the most commanding motive for human action will be reached; the most genuine springs of human conduct aroused and the best service that human nature is capable of guaranteed.
이와 같이 과학과 예술이 손을 잡을 때, 인간 행동의 가장 엄숙한 동기가 생겨나며, 인간 행위의 가장 순수한 원천이 솟아나며, 인간의 본성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봉사가 보장된다.
I believe, finally, that the teacher is engaged, not simply in the training of individuals, but in the formation of the proper social life.
교사는 단순히 개인들을 훈련시키는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올바른 사회생활을 형성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I believe that every teacher should realize the dignity of his calling; that he is a social servant set apart for the maintenance of proper social order and the securing of the right social growth.
교사는 누구나 그 직분의 존엄성을 깨달아야 한다. 그는 적절한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올바른 사회의 성장을 도모하는 특별한 일을 담당한 사회적 공복이다.
I believe that in this way the teacher always is the prophet of the true God and the usherer in of the true kingdom of God.
이리하여 교사는 언제나 신의 참 예언자요, 진정한 신의 왕국으로의 안내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