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답게

by KH

“동서, 애를 왜 이렇게 잘못 키웠어? 저래서 사회생활이나 할 수 있겠어?”


1년에 한 번 할아버지, 할머니 합동 제사를 위해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였다. 제사상을 모두 차린 후 절을 올리기 전 식사를 하고 있었다. 고등학생이었던 나와 막 중학교에 입학한 동생은 평소처럼 묵묵히 밥을 먹고 있었다. 사촌 언니, 오빠들은 어른들에게 붙임성 있게 미주알고주알 이야기를 나누고 웃음꽃을 피우는데 우리 자매는 조용히 있으니 오히려 눈에 띄었을 것이다. 그런 모습이 퍽 답답해 보였는지 둘째 큰어머니가 엄마에게 쓴소리를 하신 것이다.


‘제사’를 올리는 이유는 불교의 영향으로 선조의 넋을 기리는 데 있지만, 깊은 뜻은 부모가 세상을 떠나더라도 그 자식들만은 정기적으로 모여 서로의 안부를 묻고 다정히 이야기를 나누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즉 ‘제사’라는 핑계를 들어 가족의 화합을 바라는 의미이리라. 그런 깊은 뜻을 무시한 채 말도 없이 가만히 앉아 있는 조카들이 곱게 보일 리 없었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하지만 예의를 갖춰 인사를 했으며, 사고 하나 치지 않았는데도 ‘조용하다, 붙임성 없다’라는 이유만으로 엄마가 욕을 먹는 건 이해하려야 할 수가 없었다.


엄마는 난감한 표정만 지으시곤 말을 아끼셨지만, 나는 엄청난 분노와 상처를 받고 눈물을 꾹 삼켰다. 이런 나의 성향을 인정해주지 못하는 어른들이 미웠고, 내 딸이 특이한 게 아니라 당신의 잣대로 판단한 그 행동이 잘못이라고 말해주지 않는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매년 같은 이유로 부모님은 자녀 교육 실패자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으며, 나와 동생은 그 순간만큼은 불효자가 되었다.


제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우리가 정말 저 녀석들을 잘못 키웠을까?”라고 심각하게 고민하시는 모습을 방문 넘어서 훔쳐보며 다짐했다. ‘그렇게 원한다면 거짓으로라도 보여주마. 나답지 않게 살겠어.’ 대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척’을 하기 시작했다. 평생 꼴도 보기 싫은 사람 앞에서도 반가운 ‘척’, 나를 위해서 조언해주는 형식적인 어른들의 말에 감사한 ‘척’, 제삿날에 술잔치를 벌이는 어른들 사이에서 즐거운 ‘척’.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던가. 어느샌가 모든 행동이 자연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지만, 겉으론 웃음을 흘리며 그들의 말에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약간의 실없는 이야기를 흘리자 이제야 사람이 됐다는 친척 어른들의 칭찬이 줄을 이었다.


인간이 한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눈에 띄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김영하 작가의 산문집 『여행의 이유』의 한 문장이 기억에 남는다. ‘우리의 정체성은 스스로 확인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타인의 인정을 통해 비로소 안정적으로 유지된다. (p.165)’ 나를 거짓으로 치장하자 친척들로부터 인정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그에 따른 부작용 또한 존재했다. 십년지기 친구에게 자주 듣는 말이 있다. “넌 어째 티가 안 난다.” 화가 나도 힘들어도 웃겨도 술을 잔뜩 마셔도 시종일관 담담한 표정이라는 거다. 처음엔 포커페이스의 소유자가 된 것 같아 우쭐했지만, 정작 내가 괴로움에 몸부림칠 때 아무도 알아주지 않자 외로웠다. 너무 힘들어 ‘힘들다’고 말을 하면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더라는 말이 되돌아왔다. 결국 ‘가면’ 속에 숨어 괜찮은 척 살던 나는 전혀 괜찮지 않았다. 직장생활에도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사람 좋은 웃음만 내비치자)“○○씨는 속을 알 수가 없어 불편하더라.”, (상사 의견에 전혀 토를 달지 않자)“자기는 다 이해하지?”


어릴 적 치기로 자아를 버리고 사회적 인정을 얻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의 병은 깊어만 갔다. 사근사근한 겉모습을 얻음과 동시에 진심을 표현하는 방법을 잃어버린 것이다. 친척들과의 왕래가 줄어들고 나이가 들며 가치관이 나름 확고해지자 의문이 들었다. 한 번뿐인 내 인생을 눈치만 보고 살다 가는 것은 억울하지 않겠느냐고. 언제 떠날지 모르는 인생에서 나답게 산다고 감히 누가 무어라 훈수를 둘 수 있겠냐고.


서른 살이 넘어서야 진정한 나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겠다고 다시 다짐했다. 마음의 짐을 조금 내려놓자 나를 알아봐 주는 사람이 생겼다. 아니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요즘은 그들과 진심을 나누기 위해서 나를 조금씩 내보이고 있다.


어릴 때부터 늘 같은 의문을 가진 채 살아왔다. ‘인간은 왜 사회적 동물이어야만 하는가?’, ‘온전한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은 정말 없는 것일까?’, ‘사회와 어울리지 못하는 나는 부적응자인가?’ 주체가 없는 허공에 외치는 울부짖음은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았고 부정적 자아 형성만 부추기는 꼴이었다. 자아를 좀먹는 짓은 그만하리라 마음먹으니 인생 별거 있냐는 쿨한 결론에 이르렀다. 혹자는 험난한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겉과 속이 달라야 하며 온전한 나를 보여주는 것은 위험한 행위라고 조언한다. 존중과 배려의 부재로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가치 없는 그들의 행동으로 인해 나를 방어하고자 가면을 쓰다 보면 영원히 자아를 잃어버릴 것만 같다. 나답게 살며 그들에게 대응할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다.


이젠 소중한 나의 인생을 위해서 마음의 짐을 덜어놓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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