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자 꿍꼬또? 산책 꿍꼬또?
오글거리는 건 정말 질색이다. 길거리에서 커플들의 애정 넘치는 대화라도 듣게 되면 ‘대체 왜 멀쩡한 성인들이 혀 짧은 소리로 대화를 하는 거냐’고 생각하며 최대한 빠른 걸음을 걷곤 했다. 꼬맹이들의 혀 짧은 소리는 귀엽다고들 하지만, 그리고 불가피한 일이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다지 귀엽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 꿍꼬또, 기싱 꿍꼬또”라는 유행어 앞에서는 정말, 정말 표정관리가 어려웠다. 당연히 나는 그런 말투를 잘 쓰지 않는다. 애교도 없고 무뚝뚝한 성격이라 더 그렇겠지만, 혀 짧은 소리와 가까워지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유자 앞에선 예외다. 전혀 의도한 바가 없는데도 자연스럽게 유자 앞에선 혀 짧은 소리를 내고 있다. 사료를 부어주며 “유자 배고팠쪄?”라고 묻거나, 나갔다 돌아왔을 때 반기는 유자에게 “큰누나 많이 보고 싶었쪄?”라고 말하는 식이다. 심지어 그렇게 싫어하던 ‘꿍꼬또’ 마저 내 입으로 말해버렸다. 낮잠을 자며 네 발을 휘젓다 깨어난 유자를 보고 너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어이구, 유자 산책하는 꿍꼬또?”라고 말을 걸었다. 아무리 유자 팔불출을 자처한다지만 어떻게 이렇게까지 됐는지 요새도 가끔씩 흠칫 놀란다.
그나마 엄마를 보며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엄마도 자주 갓난아이한테 말하듯이 유자에게 말을 건다. 그랬쪄요 저랬쪄요는 기본이다. 아기들한테 하듯이 까꿍 놀이를 하고 기차 놀이를 한다. 유자를 품에 안고 놀아주는 엄마를 보면 20년 전 남동생을 어르던 모습이 겹쳐 보인다. 가끔 유자를 남동생 이름으로 잘못 부를 때가 있는 걸 보면 엄마에게는 이미 귀여운 막내 아들인가 보다. 유자의 귀여움 앞에서 내 혀만 무장해제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이상한 안도감을 준다.
이렇게 또 한 가지가 무너졌다. 혀 짧은 소리를 싫어하는 나의 마음은 아주 견고한 성벽 같았는데, 언제 무너졌는지도 모르게 무너져 있다. 처음에는 참 당황스러웠다. 이름도 다양한 마음의 벽들은 전부 나름의 이유를 갖고 쌓아 올려진 것들이다. 나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역할도 톡톡히 해냈다. 강아지 한 마리가 마음속을 헤집고 다니기 시작하면서, 대체 몇 개의 벽이 무너졌는지 셀 수도 없다. 그렇지만 무너져 내린 벽의 잔해들을 보면, ‘이게 뭐라고’라는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혀 짧은 소리를 싫어하는 마음의 벽’ 따위는 있으나 없으나 별로 큰 차이도 없다. 그래서 지금은 마음속의 유자가 벽을 부수고 돌아다닐 때 ‘또 그랬쪄? 잘했쪄.’라고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