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유자노트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현정 Oct 16. 2015

텔레비전이 없는 밤

살아있는 것에 집중할 수 있던 시간

텔레비전이 고장 났다. 처음에는 그저 전보다 좀 늦게 켜진다 싶었는데, 며칠 지나니 아무리 리모컨을 눌러도 화면이 나오지 않았다. 2006년에 산 텔레비전이니까 한 번쯤 고장 나도 이상할 건 없다. 고칠 수 있는지가 문제다. 바로 서비스센터에 전화를 걸어 수리기사를 요청했다. 상담원은 예약 날짜를 잡아주며 비용 발생과 부품 단종의 가능성을 고지해준다. 어쨌든 최소 하루는 텔레비전 없는 밤을 보내야 한다.

      

텔레비전의 부재를 가장 아쉬워한 건 엄마였다. 엄마는 제일 먼저 드라마 걱정을 했다. 새로 시작하는 드라마의 한 화를 놓치는 일이 못내 아쉬웠나 보다. 다음은 홈쇼핑 걱정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엄마에게도 쇼핑은 생존을 위한 일이 아니라 일종의 취미활동이다. 드라마도 홈쇼핑도 없다면 엄마의 즐거움은 현저히 줄어들 것이 분명하다. 그런 엄마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이, 아빠와 남동생은 쿨한 반응을 보였다. 아빠는 “그까짓 TV 없어도 책 있고 스마트 폰 있는데 무슨 상관이냐”고 호기롭게 말했다. 기왕  이리된 거 텔레비전 없이 살자고 했다.        


하지만 결정권은 내게 있다. 우리 집 케이블 요금은 내 통장에서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나는 TV를 많이 보는 편은 아니지만, 혼자서 밥 먹을 때는 어떤 채널이든 틀어두는 편이다. 동생은 그게 다 외로워서 그런 거라고 했다. 아니라고 부정하긴 했지만 아주 틀렸다고 할 수도 없다. 하루 종일 TV를 켜두는 사람이나 나나, TV를 찾는 본질적인 이유는 같기 때문이다. 사람은 혼자 있다는 느낌이 싫어서 TV를 켠다. 역시 수리 요청을 취소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TV가 아니어도 볼 건 많아

텔레비전을 어떻게 할지에 대해 유자의 의견을 묻진 않았지만, 유자의 대답은 아마 아빠나 남동생과 비슷했을 것이다. 한때 유자에게는 전용 채널이 있었다. ‘DOG TV’라는 케이블 유료 채널이었다. 국내 최초로 도입된 애견 전용 채널이라는 광고에도 혹했고, 신기하기도 했다. 개 전용 채널은 초창기부터 가입자 수가 가파르게 늘어 지금은 1만 5천 명이 넘었다고 한다. 집에 개가 있는 집이라면 눈여겨 볼 수밖에 없었나 보다. 우리 집은 DOG TV 개국 3일째에 가입 신청을 했다. 이틀 동안은 고민을 했다. 한 달에 8천 원이라는 추가 요금이 붙는 게 약간은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당시엔 유자 혼자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서 결국 가입을 했다. 유자의 외로움에 대한 면죄부라고 생각했다. 이때도 유자 의견은 묻지 않았다.     


DOG TV를 틀어두면 개들이 나오거나, 개의 눈높이만큼 낮은 위치에서 찍은 풍경이 주로 나왔다. 개의 입장에서는 볼만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유자가 그 채널에 집중하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집에 사람이 있다면 유자가 텔레비전 따위를 볼 이유가 없고, 사람이 없으면 현관문 근처에 웅크려있거나 길게 우는 소리를 냈다. 8천 원의 효용이 궁금해서 안 쓰는 휴대폰으로 동영상을 찍어 봤는데 괜히 마음만 아팠다. 전용 채널은 유자에게 전혀 소용이 없어서 결국 두 달 만에 DOG TV를 해지했다.      


텔레비전은 유자에게 소용없는 물건이지만, 사람에게는 꽤 많은 의미가 있다. 텔레비전은 장난감이자 선생이고 하인이자 주인이 된다. 스마트 폰에 밀려 옛 위상을 잃었다고 해도 여전히 강력하다. 텔레비전이 완전히 켜지지 않던 그날 저녁에, 우리 가족은 거실에 각자 편한 자세로 늘어져 있었다. 책을 보거나 스마트 폰을 붙잡고 있었지만 은근히 서로 대화가 오갔다. 평소에는 텔레비전에 귀를 열어 두다가 다른 사람의 말이 귀에 들어오니 적당히 대답도 하게 되고, 다시 다른 질문이 생겨나고 그런 식이었다. 신기하게 유자도 평소보다 더 부산히 움직였다. 텔레비전이 없으니 자기한테 집중해 줄 거라고 생각했나? 가족들 사이를 옮겨 다니며 아양을 떠는 유자를 보고 아빠는 역시 텔레비전을 없애야 한다고 다시 말했다. 정말로 유자는 오랫동안 이런 밤을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텔레비전은 다음 날 거금 4만 2천5백 원을 주고 고쳤다. 생각보다 비쌌다. 아마도, 우리 집 텔레비전이 다시 고장 난다면 살아날 기회는 없을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쓸데없는 보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