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부모, 한계 앞에 무력해지는
엄마의 그릇이 아이의 삶을 결정한다는 두려움
(2021년에 쓴 글입니다)
2020년은 코로나 때문에 온 세상이 뒤집히고 멈추었다. 회사와 집만이 세상의 거의 대부분인 워킹맘인 내게도 큰 변화가 있었으니, 복직 후 애정을 가지고 일하던 부서가 경영진의 결정으로 해체된 것이 그것이다. 보수적인 조직이므로 한 번 생긴 건 어지간하면 없어지지 않는데, 전체적인 환경이 급변하다 보니 효율성이 보수를 앞지르는 일이 더이상 남의 일이 아닌 상황이 되었다. 2019년 5월 발표 후 2019년 말까지 뒤숭숭하게 지내다가, 2020년 1월 2일자로 새로운 부서로 발령받았다. 그나마 젋은 축에 드는 직원들부터 뿔뿔이 짐을 싸서 달가와하지 않는 친척 집 살이를 시작하는 고아처럼 부서를 옮겼다. 유난히 서로 애틋하고 선후배 관계 끈끈하고 비전을 중시하는 분위기 좋은 조직이었기 때문에 아쉬움은 더 컸다. 새로 간 부서 사람들은 내가 발령받은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나름 내 일에 자부심이 있었는데, 생소한 부서에서 생소한 업무 문서를 보며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런 걸 '자기애 손상'이라고 한다던데.
그리고 코로나가 시작되었다. 학교도 멈추고, 회사는 계속 출근하는 속터지는 상황이 시작되었다. 아이는 오전에 혼자 집에서 게임을 하다가, 내가 아침에 후다닥 만들어서 전자렌지에 넣어놓은 볶음밥, 덮밥 같은 음식으로 점심을 먹었다. 오후에는 활동지원 선생님이 오셔서 돌봐주시니 그나마 나았다. 만약 1~2학년이었다면. 아니 미취학 상태에 이런 일이 생겼다면 어땠을까. 등골이 오싹한 일이었다. 오전에 방치되는 아이 때문에 신경이 쓰여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2020년 4학년인 아이는 아직 자기 표현이 미숙했고, 전화를 해도 "응", "알았어요", "좋아요", "점심 먹었어요" 등 간단한 단어나 짧은 문장으로만 답할 뿐이니, 별일 없으리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신경은 쓰이지만 아이에게 뭘 해 줄수도 없는 날이 점점 길어져갔다. 그리고 새 부서에서의 업무도 성에 차지 않았다. 나는 깊이 몰입해서 하는 업무를 좋아하는데, 여기는 전문성보다는 행정직에 가까운 업무여서 도무지 일하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몸은 편했지만 마음이 안팎으로 불편해지자 드디어 건강검진에서 빨간 불이 여러 곳 켜지기 시작했다. 여자나이 사십대 중반, 건강을 자부하던 내게도 드디어 정밀 진단을 받아야 한다는 코멘트가 진단보고서에서 여러 개 나오기 시작했다
갑상선, 가슴의 혹, 그리고 갑자기 커진 자궁근종. 답답한 마음에 새벽에 조깅해서 살이 빠진 줄 알았는데, 갑상선 기능항진증으로 빠진 것이란다. 가슴의 혹은 일단 추적관찰 하기로 했다. 자궁근종이 커지니 배도 나오고 무엇보다 생리 기간 중 출혈이 너무 심해서 기가 딸리는 느낌이었다. 생리 중엔 미친 듯이 먹어도 체중이 줄었다. 병원에 갔더니 수술하란다. 이런 거 가지고 무슨 수술까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여성호르몬이 줄어들어 저절로 근종이 사라지기를 기다리며 우선 관찰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가장 급한 갑상선기능항진증부터 치료를 시작했다. 다행히 수술보다 약물부터 시작하자고 해서 부담은 없었다.
그런데 이 약물이 문제였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열나는 증상은 가라앉았는데, 우울감이 소나기처럼 솨아 쏟아지면서 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꼼짝하기 싫어지기 시작했다. 갑상선 환우 카페에 보니 기능항진증의 약물치료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겪는 부작용이었다. 항우울제까지 같이 먹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나는 아침마다 눈을 뜨고 가만히 누워서 내 불행을 하나하나 짚어나갔다. 어렸을 때 사교육을 받지 못한 것, 원하는 대학에 원서를 쓰지 못한 것, 재수하고 싶었는데 하지 못한 것, 내가 전국 규모 백일장에서 상을 타서 서울에서 시상식이 열려 가고 싶다고 하자 그까짓거 뭐하러 가냐고 했던 아빠(결국 가기는 갔다) 말씀에 받았던 상처, 내게 이렇게 저렇게 상처 입혔던 사람들, 지금 직장에서 받았던 부당한 대우, 최근의 부서 이동. 나를 둘러싼 가족. 애증의 또다른 이름인 가족. 그리고 나의 아들. 자폐스펙트럼인 나의 아들.
우울감이 나를 안개처럼 감싸고 있으니 주변 모든 것이 평소와 다르게 보이고 다른 각도에서 생각하게 된다.
현우가 벌써 오학년이다. 진단받은지도 8년을 넘어갔다. 코로나 시국은 나름 안정을 찾고 학교에서는 돌봄교실을 꾸려 주어서 워킹맘들은 한시름을 놓았다. 오학년이 되기까지, 나는 남들보다 머리가 좋은 아이를 지켜보며 곧 정상범주에 들어올 거라는 못된 희망을 가슴 속 깊이 품어왔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현우는 변하지 않을 것이디. 소위 '꽂혀 있는 ' 주제나 이야기, 게임, 그것도 아니면 동영상의 어느 한 장면 등등 자기 머리 속에 달라붙어 있는 것들을 줄기차게 얘기하며 주변 사람을 당황하게 할 것이다. 필요한 거 요청하기, 도움 청하기 등 일상 생활에 필요한 대화의 기술은 수년간의 훈련을 통해 익혔다 하더라도 가까운 사람과 마음 속 깊은 곳의 감정을 나누지는 못할 것이다. 그 방법을 몰라 스스로 분노하다 슬퍼하다 우울해할지도 모르겠다.
아이들 사이에서 섬처럼 지내는 학교가 과연 의미가 있을까 싶을 때도 있다. 내 우울의 그늘은 아이의 미소마저 지워버렸다. 아이는 돌봄교실에서 소수정예로 지도를 받으며 원격수업에도 잘 적응해 나갔다. 변화가 어려운 아이여서, 출석수업이 조금씩 시작된 오학년에는 오랜만에 와글와글 왁자지껄한 교실에서 예민한 청각이 고통받았고, 높은 불안도로 인해 예측불가한 교실 내 여러 상황에 스트레스가 심했다.
사실 현우의 입장에서 그런 어려운 순간은 학교 생활에서 아주 일부였을 뿐이다. 이제 현우에게 익숙해진 선생님과 아이들이 현우의 불안함을 잘 다독여 주었고 현우도 점점 인내심이 커지고 마음이 자라면서 어려운 상황을 스스로 잘 넘기고 자신을 콘트롤하는 의젓한 모습을 보일 때가 많았다. 어려움을 부풀려서 크게 생각하는 내 마음이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