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서랍에는 어떤 추억이 있나요?

가죽 시계를 차는 남자

by 달해슬


동아리 방의 문을 열고 들어설 때였다. 낯선 인영의 뒷모습이 보였다. 눈에 먼저 들어온 짧은 머리. 단정하고 무난한 체크무늬 셔츠와 진한 청바지를 입고 서서 동아리 사람들과 말하고 있던 이.

그는 어깨에 맨 가방이 흘러내리려 하자 끈을 추슬렀다. 움직이는 손에서 보이던 가죽으로 된 손목시계. 중앙의 큼직한 시계판 원 안에 숫자들이 시원하고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시계를 찬 주인을 닮은 듯이.


“저분 누구예요?”


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다른 일을 하던 명진 선배에게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살짝 물어봤다.



“차현호 선배인데 군대 갔다가 이번에 휴가 나왔거든. 학교 온 김에 여기도 들러본 거래.”


“아, 네..”


명진 선배의 이야기를 듣고, 현호 선배를 슬쩍 쳐다보다가 그와 눈이 마주쳤다. 얼른 고개를 숙이며 작게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했다.

본인 얘기한 걸 듣고 여길 쳐다본 건가.. 선배인데 인사도 안 하고 뒷담화 한 듯이 느껴졌을까..

답례 인사를 하듯이 살짝 고개를 숙인 뒤 곧 다른 이와 이야기를 시작하는 그를 보았다. 그의 손목에 있는 손목시계가 유난히 내 눈길을 끈다.

요샌 가죽 시계 차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 나만큼이나 유물급인 사람을 발견한 데서 온 동질감일까.

슬쩍 내 손목을 올려서 시계를 본다. 가늘고 섬세하고 여성스러운 디자인의 시계가 보인다. 원형의 숫자판도 작아서 선으로만 되어 있는 작고 아담한 내 시계.

가죽이라 불편해도, 날 아껴주셨던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내게 선물하신 시계라 꼭 차고 다니게 되었다.


내 시계와 선명히 대조되는 그 선배의 큼직한 시계에는 어떤 추억이 있는 걸까? 그의 시계를 흘끗 다시 쳐다봤다. 자꾸만 그에게로 시선이 머문다.







선배가 휴가를 나온 기념으로 그 방에 모여 있던 동아리 사람들과 다 함께 술자리를 갖게 되었다. 그의 휴가 기념은 그저 핑계일 뿐, 실은 다들 술을 마실 기회를 잡은 것이리라.​​


시간이 흐르고 테이블에 둘러앉아 술을 마시고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사람들에게 이미 선배의 존재는 무의미했다. 주변에 앉은 사람들끼리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나누며 누가 자리를 비웠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

나도 기분 좋게 한잔 두 잔 마시며 술술 달렸다. 키햐~ 오늘따라 술이 받는다. 늘어가는 잔으로 인해 얼굴도 점점 달아올랐다. 붉어진 얼굴을 식힐 겸 잠깐 밖으로 나가야지 생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랏, 선배가 보이지 않네?


​​​

밖으로 나왔을 땐 이미 주위는 어두워져 있었다. 시원한 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한껏 달아오른 두 뺨은 식을 줄 몰랐다. 술을 깨기 위해 편의점에라도 가야겠다 싶어서 걷는데, 저 앞에 선배가 앉아있었다.

​​


“저 여기 앉아도 되죠?”


말은 붙였지만, 허락의 대답은 듣지 않고 가만히 있던 선배의 옆에 앉았다. 선배는 그런 나를 보며 피식 웃더니 다시 고개를 정면으로 돌렸다.


​​

“왜 여기 나와 계세요? 술 더 안 드세요? 집에 벌써 가시려는 건 아니죠?”


쫑알쫑알 이런 말 저런 말 갖다 붙이는 내게 선배는 한 마디 대꾸도 하지 않는다. 민망하기도 할 상황이지만 이미 술에 취한 나는 그런 게 느껴지지 않았다.


​​

“어, 이 시계~ 오오~ 크다~”


선배의 한쪽 팔을 잡아 올리며 내 목소리가 살짝 늘어졌다. 힘 있고 단단한 팔뚝이 느껴졌다.


선배의 손목시계를 얼굴에 가까이 대고 본다. 내 시계보다 훨씬 크고 시원한 느낌이 드는 남성용 시계다.

​​


“좀 자세히 볼게요.”


말하며 선배의 손목에 있던 시계를 풀어냈다.


“내 시계는 이렇게 작은데~ 여기 봐봐요.”


내 손목을 들어 올리며 시계를 선배에게 보였다.


​​

“근데 선배 시계도 커서 좋은 것 같아요. 내 꺼도 예쁜데 선배 꺼도 맘에 들어요. 이거 저 주시면 안 돼요?”


시계를 쥔 채 배시시 웃는 나를 보며 선배는 어이없다는 듯이 잠시 쳐다보았다.



“까분다.”


말을 하는 선배는 피식 웃으며 내 머리를 부비거렸다.

정색하는 듯한 목소리가 아니어서 살짝 안심했다.

이왕 행동한 김에 더 뻔뻔해져야지, 어차피 뒤로 물러설 수는 없다!


​​

“아니~ 저, 시계 차고 다니는 거 좋아하거든요. 이거 잘 차고 다닐 수 있어요. 저 주시면 안 돼요? 네? 저 이거 가질래요~”


빼앗기지 않으려는 듯이 선배의 시계를 손에 꽉 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인사를 하고 걷기 시작했다.

​​


“시계 주고 가야지.”


선배는 그대로 자리에 앉아서 내게 말을 한다. 따라올 생각은 하지 않는 것 같다.



“저 주시는 거 아니었어요? 그럼... 내일 만나면 돌려드릴게요.”


싱긋 웃으며 다음을 기약하고 걸음을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