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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넘는 것인지 요단강을 건넌 것인지.

황금종이

by khori

태백산맥을 읽기 시작하며, 한 권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시내 서점에 가던 때가 있었다. 그렇게 조정래라는 작가를 알게 됐다. 최근에 정글만리를 읽으며 "국가는 정책을 세우고, 백성은 대책을 세운다"라는 명문장을 되새기곤 한다. 황금종이에서도 "돈은 인간의 실존이자 부조리다"는 명문장이 아닐까?


세상에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 사고에 돈이 얽히지 않은 일이 없다. 모든 조직에서 작은 돈의 사용과 절차를 트집 잡아 사람을 못살게 구는 일이 많다.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책 속의 이야기는 이야기를 말하는 시대를 반영한다. 내가 걸으며 보고 듣고한 경험이 공감을 부르는 이야기가 많다. 영업이란 직종은 밖에서 보면 돈을 버는 일이지만 황금종이 실물을 보기 어려운 이상한 직종이 되어 가고 있다. 이젠 황금종이도 디지털화된 숫자의 시대가 되어 가고 있기 때문일까? IMF전에 사회에 진출한 세대를 황금열차 막차탄 세대, 열차가 떠나는 걸 본 X세대, 황금 열차의 존재를 모르는 지금 세대라고 부르는 내 생각과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명문장이라고 한 것처럼 돈은 인간에, 인간의, 인간을 통해서만 실존적 의미가 있다. 그렇게 사용되어야 가치가 높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의 운용은 화를 부르기도 하고, 복을 돋우는 일도 한다.


얼마 전 스스로 회계의 제1원칙은 "내 돈은 1원 한 장 안 틀린다, 남의 돈은 잘 안 맞을 뿐"이란 말을 블로그에 써놨다. 돈은 정확성을 요구한다. 이해관계가 덕지덕지 붙어있기 때문이다. 아주 선명하게 정수단위로 딱 맞아야 조용하다. 그런데 너무 선명한 정확성은 인간의 영역 속에 존재하나, 아주 비인간적이란 생각을 할 때가 많다. 도가 선명하면 시대의 변화를 담을 수 없다. 명확한 선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선이 없는 것도 아니다. 어쩌다 들러보는 화장실에 '바다에 길을 보이지 않지만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라고 도를 설명하는 것처럼.


그 선은 선명한 글자 그대로의 법과 제도와는 다르다.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규정이 아닐까? 그 선을 넘나들면, 변화가 생긴다. 좋게 변화하면 사람들이 좋아하고, 나쁘게 변화하면 사람들이 싫어한다. 그런 것들이 예의염치라고 부르는 범위에서 평가된다. 세상에는 그 선을 넘나들면 황금종이를 줍고, 황금종이를 베푸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문제는 이런 반복 과정 속에 선이 있었다는 실존의 인식을 잃어버리는 종자들이 생긴다. 선을 넘었는지, 요단강을 건넜는지 구분하지 못하는 지경에 다다른다. 도를 깨우쳤다는 말이 아니다. 자신은 선을 조금 넘었다고 하지만, 타인들은 요단강 건너편이라고 하는 일이 벌어진다. 법이 오면 그 선명함에 분함과 억울함, 감사와 통쾌함이 공존하는 이유다.


가장 낮고 천박한 합의 기준인 법이 등장하고, 법을 벗어나는 일이 벌어져 다시 법이 강제하게 된다. 칼이 난무하던 춘추전국시대나 돈과 법이란 이름으로 파렴치가 난무하는 시대나 차이가 있는가? 난 별차이가 없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최소한이라고 규정된 사회적 합의인 법과 제도도 너무 많아지고 복잡해지고, 사실 이게 좋은 것만 있는 것도 아니란 생각이 든다. 정확성을 위해서 인간성이 사라지는 줄 모르는 시대가 아닐까?


가축이 생식을 안 한다는 것이야말로 살기 편하지 않다는 말이다. 인간은 여기에서 자유로운가? 세상은 발전(?)하고 물질적 풍요, 법과 제도가 촘촘해져 가는 만큼 세상은 살만한가? 어쩌면 세상이 선을 넘는 것인지 요단강을 건넌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것 또한 너와 내가 만들어 가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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