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잡부] 이 숫자 실화냐?
식당에 가면 메뉴판을 찾는다. 백화점이나 마트에 가면 가격표를 본다. 제품과 가격(Price)을 보고 빠르게 의사결정을 하기 때문이다. 사실 왜 사야지? 꼭 필요한가? 이런 것이 더 중요한데. 세상은 욕망(want)의 시장으로 변한 지 오래된 것 같다. 그럼에도 필요(need)의 시장은 생존을 위해서 중요한 부분이다.
옛날이야기를 경험 삼아하면 매일 Price table을 만드는 동료에 대한 이야기다. B2B사업은 물량별로 가격이 변화하고, 연간 물량의 변화에 따라 가격도 변화한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내년, 내후년 가격과 물량을 논의하고 낸다. 결과적으로 딱 맞는 건 하나도 없다. 한 치의 오차가 없다면 조작에 가깝다. 그나마 일본 시장이 일명 forecasting이라고 하며 거의 준수하는 수준이다. 6개월만 forecating해도 안전빵을 위해 적중률 00%를 넣어서 오차를 극복하기보단 면피를 도모한다. 그럼에도 가격표를 요청 때마다 매일 만드는 동료를 보며 "야, 넌 영업이 아니라 아주 목수다 목수"라고 농담하던 말이 생각난다. Carpenter.. 어떨 땐 공방에서 목수 일을 배워 진자 멋진 탁자를 만드는 게 더 효과적일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다.
현재 운영하는 한 가지 사업은 경기에도 불구하고 그럭저럭 굴러가고 있다. 새로 하고 있는 사업은 전도유망한 전망과 현실의 궤리를 좁혀가는 중이다. 그래도 한 때 일 년에 3천 만불정도까지 혼자 관리해 보고, 5년에 1억 불 정도 사업도 해보고 하던 기억이 난다. 그땐 이런 개고생이 없다는 생각도 했지만 지나고 나면 별거 아니다.
새로 추진하는 분야는 수량이 많다. 백만 개짜리 견적을 한 번 내야 하는데, 하던 분야와는 조금 다르고, 견적은 정리해야 하고.. 농담으로 하던 목수 일을 열심히 하게 된다. 테이블을 만들어 놓고, 또 이게 괜찮을까 생각해 보고, 다시 한번 "나 같으면???" 이런 생각과 "어림반푼어치도 없지"라는 사이를 오간다. 그래도 "내 돈이면 살까?"라고 생각하는 것이 조금 현실적이다. 여기에 상대방의 상황과 입장을 잘 이해하면 더 좋다. 전략이 별거 아니다. 결국 '어떻게'할 것인가를 결정하고 실행하는 과정일 뿐이다. 고심 끝에 보냈는데, 승인 나고 견본이 나갔다.
가격협상은 지루하다고 생각한다. 지루한 가격협상은 불만족을 내포하고, 항상 드잡이질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가격은 한 번에 익스프레스 코스로 가는 것이 가장 좋다. 다른 협상은 지루할 수 있다. 주도권을 잡는다는 명목으로 시간을 버릴 때가 있다. 그런데 의외로 규모가 클수록 지루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준비는 길다. 오히려 시장에서 100원을 깎는 시간이 훨씬 말도 많고 오래 걸린다. 내 이야기가 다 맞는다는 것은 아니다. 내 경험이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고 얼마 지나서 신규 고객하고 사양과 모델을 이야기하게 됐다. 수량은 두 세배 늘었는데, 사업기간이 백만 개짜리 보다 두 배는 길게 늘어져 있다. 견적을 내라면 예측률 별로 수량의 증감과 연도별 배분이 되어있다. 그 말인즉 테이블을 깎는 게 아니라 인테리어를 해야 할 판이다. MSRP를 내도 이거보다 복잡하지 않다. 함수로 원가, 이익률, 물량에 대한 가중치를 돌려서 만들어 놓으니 그럴싸하다. 이런 기분이 들면 일단 잠시 시간을 갖는다. 그럴싸한 기분이 들 땐 차이점을 찾기 어렵다. 밥을 먹고 차 한잔 마시고 다시 테이블을 보니 세심하게 조정이 좀 필요한 것 같다. 전에 물량 가중치는 되어있지만, 연도별 물량 가중치를 보니 내가 구매자라도 잔소리를 할 것 같다. 물량가중치와 가격가중치를 더 해놓고 보니 가격이 높다 낮다 따질 수는 있겠지만 가격이 개판이란 소리는 면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만들어 놓고 퇴근했다. 다음날 다시 한 번 천천히 들여다보며 큰 이슈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2-3백만 개 견적을 복잡한 가격표로 만들어보니 오랜만에 재미있다. 메일을 작성하고 직원을 불러서 마우스 클릭(보내기)을 누르라고 했다. 뭔지 파악했는지 안 누른단다. ㅎㅎ 마우스를 내가 잡고 있으니, 내 손꾸락을 콕 누르고 갔다. 일주일 정도 시간이 지나서, 결과를 물어볼까? 오늘 안 오면 내일 전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퇴근을 했다. 달봉이랑 수영장에 가기로 한 날이기도 하다. 수영장에 먼저 도착해서 할 일도 없고, 메일을 보니 통과를 했다는 내용이 도착했다. 견적이 한 번에 패스한다는 것 무엇보다 기분 좋은 일이다. 내게 이런 일은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는가에 대한 한 가지 정보지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몇 줄 더 쓰여있는 게 견적 진행된 한 모델에 더해서 사양을 전체적으로 전달할 테니 다른 모델도 제안하라는 내용이 있다.
구체적인 내용이 없어서, 물량이 2-3배 정도 되면 꽤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 도착한 메일을 보니 내가 처음 받은 모델의 수량이 가장 적다. 전체 모델과 수량을 보니 듣도보도 못한 어마어마한 숫자가 쓰여있다. 이 정도 수량이면 김칫국울 벌컥벌컥, 아니 김칫국에서 수영해도 괜찮겠다. 물량예측 최저로 해도 내가 생각한 범위와는 완전히 다른 저 세상 숫자인데! 다음주엔 목수일을 혼이 나갈 정도로 혼을 담아서 해야 할 판이다. 다들 신이 나겠구나!
그럼에도 오더는 받아야 오더고, 선적하고 대금결제가 돼야 1 단위 사업이 95% 정도 진행된 일이다. 이후로 보증기간 동안 별 탈이 없어서 끝난다. 이런 일이 연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사업이란 생각을 한다. 뭐 오늘만 산다는 족속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각자 선택하고 매진하는 거지.
이 일이 잘되면 함께 일하는 브라서, 동생, 막둥이 등등등 노후대책까지 해볼 만하겠는데. 더 나이 먹고 마나님 하고 놀러 다니고.. 일이란 게 할 수 있을 때 열심히 해야지 뭐. 현재까지 회사 만들고 흑자유지 중이니 감사해야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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