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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hori May 01. 2019

협상가를 위한 감정수업

현실의 협상은 이것만 갖고 안된다. 

 책을 읽기 시작하며 옛 추억이 생각나다. 20세기 대학원 시절에 짜증 나던 게임이론과 그 과목을 수업하던 품격 쪼잔한 교수와 한 바탕한 기억이 난다. 지금도 교수님이란 권위로 학생을 존중하지 않는 점에서는 나의 의견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게임이론을 강의하셨지만 협상에서는 내가 이기고, 학점에서는 그 정도면 정신승리법상 충분히 대우를 받았다고 생각한다. 교수님의 분풀이로 100점 만점 기준에서 대학원 전체 학점 평균이 5점이나 가라앉는 대참사가 발생하고, 크리스마스이브에 시험 보는 고난이 있었지만 그래도 최악인 졸업 못할 수 있는 필수과목 이수는 완료했기 때문이다. 21세기가 되어서는 가끔 이젠 노년이 되었을 교수님을 한 번 뵙고 싶기도 하다. 못된 건 못된 거다.


 사실 나는 게임이론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이고 인간의 심리와 전략을 전개하는 탁월한 추정방법이지만 신봉하지 않는다. 아주 달가운 방법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에겐 더 이익보다 소중하게 시켜야 할 가치가 훨씬 많기 때문이다. 변수가 너무 단순한 책상의 이론이다. 야생에서 벌어지는 협상에는 더 많은 계량화하기 힘든 요소가 많고, 이론을 만들어 대응할 만큼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 당장 북미협상만 봐도 그렇다. 그러나 세분화된 이익을 놓고 계산하는 작은 범위에서는 아주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조금 동떨어진 이야기지만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라는 책이나 공자, 노자와 같은 사람에 대한 인문학을 읽어보는 것도 훨씬 세상의 게임을 잘 이해하는 방식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죄수의 딜레마, 내시 이론, 감정 이론 등 뭔가 있어 보이는 이론은 제시된 조건의 확률과 확률에 따른 배분될 이익의 측정 성격이 있다. 그리고 그 결과가 계산적으로 맞아 최적화의 값이 존재하지만 그렇지 못한 부분을 선택하는 인간의 현명하고 아둔한 결과를 비교한다. 그렇지만 세상의 협상은 이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요인이 존재한다. 


 나는 고객이 인하를 요구할 것을 예상해서 가격을 내고 버텨서 이익을 본 적이 있고, 고객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진심 어린 가격과 조건을 제시함으로 내가 예상한 것의 몇 배나 되는 사업의 혜택을 입은 적도 있지만, 여태껏 안 깎아주고 이익을 더 취했냐고 취조와 깽판을 받아야 하는 상황도 거쳤다. 서로 최선의 선택을 합의해서 추진하며 온갖 고생의 터널을 지나기도 하고 아주 좋은 결과가 나오기도 한다. 이런 케이스를 전부 이론에 넣어서 수식을 계산하고 일반화해서 정리할 수 있을까? 나는 게임이론의 대표적인 예만큼 인간은 이성적이지 않다는 것을 믿는다. 하루에 아주 가끔 이성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안에 존재하는 감정이란 부분과 이성적 머리 굴림의 조우는 대단히 중요할 수밖에 없다. 실제 협상에서는 규칙보다 힘의 균형, 이에 따른 의도, 시간의 순서, 지워지지 않는 과거의 기억, 그려가야 할 미래의 약속 등 고려해야 할 사항이 더 많다. 왜냐하면 사람이 유일하게 말을 하고, 유일무이하게 말대로 하지 않는 독특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론의 규칙을 엎을 수 있다면 이론이 무슨 이익을 보증할 수 있는가? 


 삶과 실전의 협상은 이 책에서 말하는 부분의 여집합을 포함한다. 인간의 다양성만큼 더 복잡하다. 수학적 계산만으로 사람을 설득할 수 없다. 왜냐고? 기분이 나쁘거든. 연애를 해봤으면 다 아는 것 아닌가? 협상장에 누가 와야 게임이론이던 협상이던 적용할 기회가 있다. 매일 계산하고 약싹 빠르고 신의가 없다고 평판이 형성되면 머리를 맞대고 주판이나 계산기를 튕겨볼 기회도 갖지 못한다. 위에서 동양의 인문학을 언급한 이유는 책의 소제목처럼 '분노와 신뢰의 행동경제학'이란 말과 같은 의미일 수 있다. 책을 읽고 책대로만 하면 과거 속에 사는 것이고, 책을 읽고 현실 속에서 미래를 향해가면 그것을 작은 토대로 활용할 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이에게 사과 한 개를 놓고 가위바위보를 하라고 해보자. 대부분 나눠먹는 것이 익숙할지 모른다. 혹시라고 혼자 먹으려다가 성깔 있는 친구에게 된통 물린 경험이 있다면 경기의 규칙과 달리 냉험한 현실의 이익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다. 어른이 되어 바이어한테 선물 받은 술 한 병을 내가 차지하면 이익이지만, 특히나 그 술을 좋아하는 속 좁은 상사가 있다면 판단은 더럽고 치사하지만 바뀌게 되어 있다. 싫어하는 발레 공연을 끌려가며 권투시합에 가지 않으면 차 안에다 오줌을 싸겠다고 파투를 놓으면 권투시합에 갈 확률은 훨씬 높다. 예전 너무 한국화 된 고객처럼 1달러를 안 깎아준다고 전시회 회의실 의자를 모아서 누우시면 안 깎아줄 수도 없다. 결혼식장에 애 안고 들어오는 사람은 반드시 이익을 볼 수 있을지 모른다. 이익을 얻는 것이 항상 좋은 결과와 삶을 갖고 오는가? 단순화된 모형에서 최고의 이익이 아니라 그 아래 언저리를 택하는 것이 부족함이 아니라 현명함 일지 모른다. 꽉 찬 것은 비워야 쓸모가 생기고, 기우는 시작점이기 때문이다. 


 분명 이런 확률적 계산과 계산에 기반한 행동은 논리적인 경향이 존재한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예를 통해서 이익을 얻는 것과 삶의 입장에서 이익 외에도 우리가 잃어가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이 삶에 있어서 중요한가? 도 생각해 봐야 한다. 그곳에 지켜야 할 사람들이 있다면 더욱 그렇다. 지켜야 할 사람이 없더라도 이성적 이익과 인간이 사회적 동물로 살아가기 위해서 추구해야 할 계량화되지 않는 가치의 소중함도 무시할 수 없다. 그 선택에 따라서 우리는 파렴치한과 성인군자 사이에서 삶의 가치를 결정해야 한다. 그 가치가 내가 그리는 삶의 크기만큼 달라질 수 있다. 그리고 게임이론으로 살신성인의 투혼으로 자신의 소중한 것을 지켜내는 인간의 정신은 인공지능의 시대에도 계산하기 어렵다고 믿는다. 다만 참고할 만한 효과적인 기술적 수단이라고 믿는다.     


 결국 삶은 이성적 계산과 품격 있는 감성과 감정의 조화가 있어야 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게임이론 #진화론 #행동경제학 #막무가내_잃을_것이_없는_자가_제일_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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