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진실과 함께 한다
블로그와 책 읽기를 2012년 1월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질풍노도의 시기가 기억나지 않을 때쯤, 역풍 노도의 시기와 함께 알 수 없는 허전함을 비워내기 위한 수단이었다. 7년을 넘겼는데 조금 좋아진 부분이 있지만, 내 속의 자아가 변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두운 자아는 저 깊은 동굴 속으로 깊이 들어가 좀처럼 나올 기회가 적어졌을 뿐이다.
시작의 이유는 읽고 난 후, 책의 내용이 아니라 내 머릿속에 떠올랐던 생각들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나를 스쳐가는 생각들을 기록해두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나의 생각이 항상 타인의 공감을 사는 것은 아니지만 나의 변화를 바라보는 것은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나는 것을 기록하는 것이 더 깊이 있게 바라보지 못하는 면이 있고, 지식과 경험으로 축적된 정보의 편향이 줄어드는 부분보단 더 편향되는 경향도 있다. 읽고 싶은 것과 조금씩 낯선 것을 대하지만 꼭 좋은 결과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글을 쓰고 정리하는 것은 조금 좋아진 것 같다. 업무에도 도움이 된다. 아직도 복문, 오타, 문맥의 오류가 산발적으로 발생한다. 머리의 생각보다 타이핑이 느리다는 핑계를 대지만 자판으로 쓰는 것은 오류가 많다. 되도록 복잡한 것은 짧게 쓰려고 노력 중이다. 사전을 자주 찾아보는 습관이 생겼다. 이런 일들을 나이 먹어서 하자니 쉽지 않다. 그래도 꾸준히 하는 것은 책을 읽고, 일상을 바라보며 그것을 세밀하게 요약하기보다, 나의 생각을 쓴다는 사실이 좋다. 미술품을 보며 타인들이 누구의 작품이고, 칭찬을 해도 우스꽝스러운 생각이 들었다면 그 우스꽝스러운 생각이 나의 생각이다. 그들의 생각을 들어볼 필요가 있지만 그것이 항상 정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책을 통해서 덕산 이오덕 선생이 지향하는 점이 공자님이 아이의 순수하고 때 묻지 않음을 부러워하는 심정 같다고 느낀다. 나이가 들어서 아이들처럼 있는 그대로, 내가 체험한 그대로의 감성과 사실을 진실되게 생각하고 쓸 수 있을까 하는 부러움이 들었다. 그 결과가 항상 좋다고만 할 수는 없지만, 살아있는 소리는 그렇게 다듬어진다. 그런 진심 어린 글은 나의 마음을 다 담아내지는 못해도 타인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된다.
책상머리의 논리와 타인의 지식을 통해서 쓰는 글이 갖고 있는 문제점을 잘 이해할 수 있다. 체험, 진실, 스스로에게 솔직한 감정을 이해해나가는 것이 궁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기록하는 일이다. 체면, 지위, 명예 같은 사회적 시선의 가면 뒤에 자신의 참된 모습을 숨기는 글은 결국 자기를 잃어버리는 길이다. 어린아이도 어른도 마찬가지다. 현학적이란 말은 더 넓게 사용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을 아이들의 글과 그의 해석을 통해서 끊임없이 말한다. 그 필요를 조금은 더 이해하게 됐다.
교육이란 가르치고 육성한다는 의미다. 아이들은 어른의 뒤통수를 보고 자란다. 아이들이 버르장머리가 없다면 그 결과는 보살피지 못한 결과다. 다음 세대가 불만족스럽다면 그들을 바라보는 앞 세대의 책임이 훨씬 크다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들을 구속하는 제도, 교육, 사회 시스템, 가풍은 앞 세대의 권력 앞에서 길들여진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좀 더 개선될 방향이 있다면 앞 세대부터 실천을 통한 모범을 보여야 한다. 이것이 과격한 진보적인 사고라면 나는 진보적인 사고를 선택할 것이다. 분명 덕산 선생의 바램이 사회적 제도와 시스템으로 정착되는 기회가 더디게 나아간다고 느낀다. 하지만 분명 조금씩 진전이 있다. 아이들이 아이답게 성장하고, 보다 바람직한 세상이 되어간다는 믿음은 중요하다. 그렇게 세상은 조금씩 균형을 잡을 수 있다. 이 책을 통해서 아이가 아니라 부모가 변화하고, 그 변화가 다시 아이들에게 퍼져나간다면 당연히 다가오는 세상은 조금씩 좋아질 것이다.
예전 국민학교 아이들의 글이다. 내가 학교 다니던 시절보다 오래된 것도 있다. 순순한 아이들의 생각이 글로 남아 있다는 것이 재미있다. 지금은 중년부터 노년이 될 아이들이 그때의 마음을 얼마나 갖고 이 세상을 살아왔을까 궁금하다. 마음속에 퍼져가는 느낌을 글로 완벽하게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물며 조금 전에 노을의 색을 글로 표현하는 것도 부족한 수단이다. 하지만 내가 느낀 감정을 진솔하게 기술함으로 그 느낌을 전달할 수 있다. 사진이란 좋은 기술이 있지만, 글로 전하는 맛은 다르다. 빠름과 느림의 차이만큼 살아있음을 체험하고 기술하는 세밀함의 차이가 살아있음의 차이를 만든다. 모두의 삶은 그렇게 건성건성 지나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진실을 말하는 글이 일상에서도 세상에도 폭넓게 자리잡기를 기대한다.
일고십 불량회원 그림자 회원이지만... 이런 스스로에 대한 자문자답을 해본다.
1) 살아 있는 글은 무엇인가?
내가 속속들이 이해하고 체감한 사실을 기초로 기록하고, 그것이 타인의 마음에도 같은 감동과 상상을 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글을 통해서 사람을 이해하는 앎이 넓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식과 정보도 사람을 통해서 배우는 것의 하나이지만 그런 지식과 정보가 어떻게 사람에게서 창조되는지 이해하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의 솔직한 글과 동화책이 가끔 어려운 철학책보다 쉽고 간단하게 세상의 이치를 알려주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2) 거짓 없는 진실된 글은 왜 중요한가?
존재했던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거짓은 존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소설과 같은 문학적 상상이 실상을 탈피하기 위한 정신적 대리 만족의 수단이다. 하지만 삶이 땅에서 발을 떼면 허공에서 헤맬 수밖에 없다. 그 삶이 땅을 밝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 진실이고 글은 진실을 표현하는 한 가지 수단이다.
3) 왜 이런 방식의 글쓰기를 가르쳐야 하는가?
세상이 좀 더 사람들이 살아가기 좋은 환경이 되어가기 때문이다. 요즘은 일상이 된 가짜 뉴스만 보아도 세상은 거짓에 의해서 오염되고 그 오염의 파괴력은 인간 스스로를 퇴보시킨다. 사람답게 살아가는 길이고, 그런 다양한 방식에 시금석처럼 남아 있는 기록이 되기 때문이다.
#덕산 #이오덕 #이오덕의글쓰기 #독서 #khori #일고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