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나는 나의 길을 걸어가겠다
훤하게 자란 소나무 주변은 메마르고, 이쁜 꽃은 홀로 아름다울 뿐이다. 이는 재주와 같이 돋보인다. 이런 모습은 10~30대의 학습과 이성을 통한 성취일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이성적 성취와 더불어 성품과 안목이 필요하다. 누구 하나 팽개치치 않고, 빈틈없이 채우는 물과 같이 메워주고 또 흘러가는 성품이 있어야 한 그룻의 나무가 아니라 숲이 될 수 있다. 이를 통해 인간이 타고나 외로움의 굴레를 벗어나야 한다. 이것을 아는데 참 길고긴 삶의 시간을 보내고 뒤늦게 알게 된다. 이런 또한 삶의 한 부분이다. 비록 이해했다고 하더라도, 항상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안다는 것은 참 어려운 듯 하다. 읽어가는 책을 보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왕이 아닌 참모의 대표적 상징이 나에겐 제갈량이다. 재주의 한계를 알았다고 생각하고, 그는 유비를 통해서 자신의 꿈을 실현하려고 노력했다. 죽어서도 사마위를 물리치듯 그는 내가 없어도 돌아가는 조직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했다. 한편 측은한 삶을 산것 같지만 나를 믿어주는 군주를 만나는 것이 그 시대에는 큰 기쁨이었을 것이다. 그 다음으로 대표적인 참모라면 내가 아는 범위에서는 위징이라고 생각한다. 죽어서 이름을 남기는 이유가 곧 군왕의 부족함과 어리석음을 남기는 충신이 아니라 상생하는 양신을 지양했다는 것, 그리고 큰 치세의 시대를 열었다는 것은 제갈량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서 풍도라는 인물을 읽다 보니 조금 심심한 면도 없지 않다. 하지만 또 다르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을 본다. 공자가 재주가 있되 덕이 부족한 소인의 한계를 말했다면 풍도는 용인과 관련하여 그것을 어떻게 현명하게 사용해야 하는 지를 말하고, 양신과 유사하지만 자신의 안위도 잘 지켜나가는 현신이 되고자 했다.
대단히 이상적이도 마음의 도량이 잘 수양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나와는 성정이 많이 달라서 내가 이것을 따라 할 수 있는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사소한 일이며, 사소한 일의 여파를 감당할 수준이라면 지나칠 수도 있다. 하지만 부당하거나 부정한 일을 더 긴 시간의 안목 속에서 운용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짧은 시간의 속도에서 운용해야 하는가를 고려한다는 것이, 이해하는 것처럼 감내하거나 실행하기 쉽지 않다. 가슴 위에 머리가 있고, 그 30센티미터 정도의 거리가 세상의 어떤 거리보다 멀다. 나의 것도 그러한데 남의 가슴과 머리를 나의 가슴과 머리로 균형을 맞춘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머리로만 이해되면 신뢰가 떨어지고, 마음만 맞으면 안타까움이 발생할 수 있다. 서로의 머리와 마음이 동상이몽이나 아등바등되는 시절을 보내는 원인도 된다. 함께한다는 것은 머리와 마음, 이성과 감성의 조율이 함께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을 요즘 세상에서 보고 있다.
그의 고사를 보면 무릇 공자류의 학문과 노자류의 학문이 함께 교차한다. 9개 장으로 이루어진 그의 말 한마디가 세상을 겸손하게 살아가며, 적을 만들지 않는 법이다. 그것이 중요한 이유는 망하도록 누구나 힘을 쓸 수 있지만, 성공시키는 과정은 힘을 쓴다고 항상 장담할 수가 없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적힌 장락 선생 풍도의 비결이 경구와 같이 다가오는 이유지만 나는 아직 이해하지만 행동하지 못하는 즉 앎이 부족한 부분이 많다. 그 하나는 옳지 못한 일이 이루어지는 과정에 모두들 이유가 있다. 납득이 가는 이유도 있고, 그렇지 못한 이유도 있으며, 왜 그런지는 알겠지만 그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발생한다면 이를 방치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살아오는 동안의 기초교육과정도 그렇게 나에게 가르쳐왔다. 당장 집을 나서서 소속된 조직, 사회, 국가가 항시 그렇게 책처럼 돌아간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책도 안 읽는다면 문제가 더 커지겠지만, 책이 항상 옳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일의 성취야 자신의 실력과 재주, 안목에 따라서 결정되니 불평할 일이 없다. 이는 이성적인 범주의 것이 많다. 어려운 것이란 옳지 못한 여건 속에서 살아가야만 한다는 명제다. 이때 나에겐 살아가야만 하는 명제가 굴욕을 감내하는 대가가 될 때, 그런 상황이 어려운 것이다. 그것이 목숨이 될 때 고사리를 캐먹으로 산으로 가는 비참한 삶도, 물고기의 배속에 장사 지내는 굴원과 같은 용기도 없는 나에게 무작정 참아야 한다는 그런 여건이 가끔 마음을 다스리는 어려움이다. 무기력감이 좌절을 주기도 하지만 깊은 분노를 만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는 항상 때와 장소, 지위에 맞춰야하기 때문인데, 그 결과가 나의 소신과 성정과 얼만큼 부합하는가는 큰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동양고전들의 재미는 이렇게 저렇게 읽다 보면 교차하는 부분이 많아 읽을수록 재미가 있다. 하지만 내가 갖고 있는 고민에 대한 선택이란 결국 자신의 몫이다. 동양문화 속의 순종적이고, 말도 안 되는 상황일지라도 그것을 상수로 보고 그것까지 감안해서 해 나가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나는 가끔 부당하다고도 생각한다. 봉건제도와 민주주의를 택한 공화정의 차이가 사람들이 생각해 나가는 방식의 변화를 이끌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예것이 무조건 옳다고 그대로 적용하는 무지와 무모함은 없어야 한다. 옛 선인들이 삶을 살아가는 지혜를 보고, 어떻게 지금의 방식으로 현재에 구현하는 지혜를 발휘할 것인가가 책을 읽는 이유가 되어야 한다.
명리를 다투지 않으면 번뇌가 없겠지만 자본주의 시스템 하에서 명리에 밝지 않으면 번뇌가 생기는 세상에 살고 있다. 마음을 다루는 선인의 모습에서 하나를 배우고, 그 시대와 다른 환경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그의 지혜를 현재에 맞게 사용하는 깨달음을 생각해 보기로 했다. 스스로를 지키는 것이 능사인 시절이 있고, 지키는 것이 부족한 시대도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