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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hori Aug 14. 2020

아무 데나 도장 찍으면 안 된다

도장찍고 나온 문제는 곤란하다고

  일반적으로 영업에서 공급계약서를 체결하고 거래를 진행하는 비중은 높지 않다. 하지만 개별 계약은 반드시 도장 찍은 발주서, 계산서, 송장 등 엄청나게 많다. 상투적으로 하고 있는 Purchase order(발주), 견적송장(Proforma Invoice)에 도장을 찍으면 계약이 체결된 것이고, 이것이 곧 계약서다. 문제가 발생하면 국제규칙, 거래조건, 개별 약정, 상관행을 갖고 다투기도 하고 법원에 갈 수도 있다. 그 목적은 피해가 발생했다는 주장과 피해 보상의 금액의 적정성을 따지는 논쟁을 통해서 피해를 원상 복구하는 것이 목적이다. 일반적인 일로 유사하다.


 현실에는 자신의 잘못을 순수하게 인정하는 소수의 사람이 존재하고, 자신의 위험을 얼렁뚱땅 타인에게 넘기는 사람도 존재할 뿐만 아니라, 타인의 위기를 틈타 이익을 취하려는 무리도 존재한다. 세상의 많은 사건, 사고에 관한 뉴스가 세상에 끊이지 않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세상은 촘촘한 듯 하지만 허술한 면도 있다. 또 인간이 기계처럼 촘촘한 것을 견디지 못하는 이유도 있다. 그러나 안 좋은 일이 나에게 다가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최대한 줄이는 노력은 필요하다. 지금은 전자결제에 서명을 통해 진행한다. 우리는 밥벌이 터전에서 알게 모르게 대충 도장을 마구 찍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3년 전 고객사에서 물품공급계약의 갱신을 요청했다. 규모가 크고, 역사도 오래된 업체일 뿐만 아니라 ISO관리 규정에 따라서 정기적으로 갱신을 한다. 내가 다니는 기업의 수명에 가까운 거래관계에 있는 업체다. 계약 갱신은 기술의 발전에 따라 사업 내용과 환경이 변화하고, 새로운 기술과 정책, 법률적 규제가 변경될 때 조정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대부분의 기업, 사람은 그렇게까지 부지런하지 않다.


 천천히 업체의 갱신 요구사항을 읽다가 부아가 났다. 계약은 상호 자치의 원칙에 따라서 합법적인 내용을 합의하는 것으로 결정된다. 아무리 좋은 거래조건이라도 마약밀매 합의는 불법이기에 계약이 성립되지 않는다. 문제는 상호 권리와 의무가 균형을 이루도록 노력해야 한다. 대부분 좋은 계약은 내가 유리한 것이 100을 만드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이런 노예계약은 생존과 바꿀 때도 피해야 한다. 잘 된 계약이란 6:4 정도로 유리한 것이 좋다. 그래야 오래 같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오래 같이 갈 생각이 없다면 상황에 따라 조정할 필요가 있다. 계약과 관련해 갑질이란 말도 있지만 을질도 없다고 할 수 없다. 세상은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독과점 업체에 거래 제의를 하면 알 수 있다. 다들 유튜브에 소문난 맛집에 돈 내고 밥 먹는데 그렇게 긴 줄을 마다하지 않고 기다리는 것도 즐겁지만 을질인 셈이다. 


 내가 부아가 나기 시작한 것은 과도한 책임의 전가, 고객의 면책 조항이었다. 사업에서 사후관리는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이 부분을 잘못 체결하면 거래가 끝나고 분쟁이 발생하거나, 비용이 많이 소요될 수 있다. 그렇다면 사업모델에 이 문제 반영되어야 하는데 갑작스러운 조정은 사업성에 심각한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말이 어렵지만 집주인이 갑자기 전세금 올려달라는 상황, 또는 밥벌이를 똑같이 열심히 하는데 급여 삭감과 같은 경천동지의 상황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판매자의 입장에서 "이런 계약 못하겠네"라고 하는 말을 하기도 어렵다. 아무리 밥벌이라지만 대표이사가 책임지겠지라는 생각으로 일하면 곤란하다. 매달, 매년 일정한 매출을 갖고 있는 고객에게 "이런 계약 못하겠네!"라고 한다면 본부장, 대표이사의 호출과 더불어 "네가 사업을 말아먹으려고 작정을 하지 않고서야", "누구 인생을 망치려고"와 같은 소리 듣기 쉽다. 내 입장과 기업의 입장을 같이 고민해야 하는 이유다.


 결국 각 계약 갱신 조항에 빨간펜을 들고 'A는 이렇게 바꿔주세요', 'B는 요렇게 했으면 합니다',....'Z는 현재 사업과 거래조건과 맞지 않으니 재검토를 요구합니다', '최종 서명은 사업본부장이 할지 임원급으로 할지, 대표이사급으로 할지 검토 바랍니다' 등등. 조항의 7-80%에 해당하는 사항을 변경, 조정, 추가, 삭제 요청을 했다. 화가 난 고객 담당자가 다시 댓글을 달아서 왔다. 기업과 동료들의 밥벌이 수익에 관한 중대한 사항이라 엑셀에 요구사항, 회신, 답신을 정리해서 다시 보냈다. 


 일주일 정도 무소식이라 잊고 있었는데, 고객사 사장님이 "전엔 그냥 하더니 왜 그래? 무슨 일이야?"라는 메일이 왔다. 분명 내가 일일이 검토하고 있었지만 "회사 자문 변호사가 얼마나 촘촘하게 지적을 하는지 저도 힘드네요.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정중하게 부탁했다. 고객사에서 전문 법무담당과 변호사를 붙여서 주셨다. 젠장. 


  내가 일하기 전부터 거래하면 거래처였다. 양사에 존속하는 모든 유효한 계약을 확인 요청했다. 고객사에서 보내준 30년이 다된 아주 좋은 개발 계약서를 찾게 됐다. "이 계약서에 근거해서 보면 고객사에서 약속 이행을 많이 안 지키셨다는 판단입니다. 이 계약 내용을 신규계약에 추가하라는 법무팀의 의견입니다"라고 보냈더니 난리가 났다. 일상 용어로 말하자면 "뭘 또 그렇게까지, 하던 대로 하자"라는 말과 다름이 없었다.


 가을에 시작한 계약 갱신이 크리스마스, 설날이 지나도 계속 월드시리즈 탁구대회가 됐다. 사실 피곤한 일이다. 그러나 피곤하다고 너무 불합리한 것을 수용하면 당연한 줄 알는 것도 문제지만 회사와 동료들에게 피해가 가중된다. 동시에 내가 그 일을 하라고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이유라고 생각했다. 공급사가 발로 차면 동전 떨어지는 고장 난 자판기도 아니고 카드 쓱 넣고 두들기면 돈 주는 ATM도 아니다. 발주처와 공급사는 서로에게 필요한 가치를 제공하고 상호 대가를 얻는 일이며, 그 약속을 문서로 기록하고 이행하는 것으로 신뢰를 쌓아가는 것이다.


 고객사는 내부 규정과 현지 ISO 규정을 들며 계약 합의가 안 되면 옛날 것으로 계속 유지하겠다는 일방 통보가 왔다. 이런 통보에 답을 안 하면 또 다른 분쟁이 된다. "현재 지속되어온 계약은 00년 0월 이후 유효기간이 만료되었고, 새로운 갱신 계약은 지속 협상 중입니다. 따라서 현재 거래 조건에 적용할 실질적이고 유효하면 합의된 계약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라고 보냈다. 아주 건조한 회신에 "합의 계약이 존재하지 않으면 상호 혼란이 야기됨으로 12개월간 기존 계약을 존중하도록 합시다"라는 답변을 거래처 법무담당의 최종 회신으로 접수했다.


 물론 고객사 대표님께서 "너 다음에 부르면 여기 와서 2박 3일 동안 계약서 마무리 못하면 집에 못 가는 줄 알아. 그리고 그 회사 변호사 꼭 데리고 와!!!"라는 메시지를 받았다. 분명 "I'm your borther"로 시작하는 일장 연설을 들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더욱 곤란한 일은 변호사를 어떻게 해야 하지? 궁여지책으로 "변호가 이름이 Charlie인데, 출장 가면 비용이 너무 많이 나와서 같이 방문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라고 회신했다. 이후로 우리 회사에 고스트 찰리가 생겼다. 어쨌든 일의 균형과 사업 유지를 잘 유지했다는 점의 시작은 아무거나 도장을 찍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끔 도장 찍고 나서 사후에 정리하는 일은 엄청난 문제를 야기한다. 그것은 일상의 일에서도 마찬가지다.


  더 황당한 일은 동료 중 한 명이 자기 집 텔레비전이 고장 났는데 제조사에서 수리를 안 해준다며, 이걸 해결해달라고 왔다는 것이다. 내가 변호사도 아니지만 서로 이런 일을 하겠다고 약속을 한 적도 없는데 말이다. 직원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상사가 되어야 한다, 일 끝나면 동생 같은 사람인데 이럴 수가 있느냐, 우리 회사 최고의 컴플레인 마스터다(이건 비난인지 칭찬인지 아직도 의문)와 같은 시달림은 참 뭐라고 말하기 곤란하다. 한 번하면 권리가 된다고 전시기획 출장에서 비행기 취소 사태가 발생하고 문제 해결까지 전담반이 되니 팔자려니 한다. 밥벌이와 상관없는 일이지만 또 어쩌다 발생한 1인 2 역인 셈이다.


 그렇게 차일피일 미루고 한 해가 지나갔다. 다음 미팅에서 계약서 끝장을 보겠다는 메일이 다시 왔지만 코로나로 무산되었다. 거래처에서 요청한 유예기간도 끝났지만 거래는 지속됐다. 그렇게 마무리되는 줄 알았는데, 우리나라의 실정법과 현지 법률의 차이로 고객사에 비용이 발생하는 문제가 생겼다. 고객 전문에 의하면 "체결된 계약에 근거하여 일금 000을 지불하시오"라는 요청이 접수되었다.


 "사장님, 계약이 과거에 존재했었고, 유예기간도 지났고, 새로운 계약은 논의 중인 걸 아시죠?"라고 했더니 태도가 180도로 변했다. 온갖 증명과 자신이 처한 어려움이 어마어마하게 올 것으로 예상한다. 그렇다고 고객의 피해를 방관해서는 안 된다. 고객의 피해를 줄이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진행했다. 정보통신 기술의 발전, 데이터 처리 기술의 발달의 이면에 보안 문제와 정보 제약의 문제가 갈수록 많았지며 내용도 복잡해진다. 대표이사께 요약 보고했더니 "찰리한테 시키면 되겠네"라고 하신다. 누가 일러바친 거지?


 내가 배우고, 배운 것을 사용해서 살면서 아무리 어렵더라도 너무 사리에 맞지 않은 일을 요구하거나 요구받을 땐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 특히 모르는 것에 도장을 찍는 일은 조금 뒤로 미뤄도 된다. 그렇다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거나 자신의 이익과 욕심을 위해 옳지 못한 일을 해서도 안된다.  그런 이익은 장기적으로 삶의 큰 위험을 만들기 때문이다. 여러 상황이 겹쳐서 운이 좋은 경우라고 할 수 있고, 그간 사람과의 관계가 많은 도움을 받는 이유가 됐다. 계약과 관련해서 큰 사고가 난 적도 없다. 그 사실이 앞으로 살아가며 사고칠 확률이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항상 겸손하고 스스로를 경계하며 밥법이를 하고 있다. 연봉계약서, 근로계약서도 마찬가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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