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치국수와 아바

멈춤을 멈추려 합니다.

by 김호섭

동네 어귀에 [후루룩]이라는 가게가 있다. 예전에는 화려하고 멋진 간판에 눈길이 먼저 가곤 했는데, 이제는 이런 소박하고 직관적인 이름이 좋다. 긴말이 필요 없다. 국숫집이다. 가끔 들러 해장도 하고, 집 나간 입맛도 찾아보려 주문하는 메뉴는 ‘잔치’다. 소박한 국수에 잔치라는 판타지를 곁들였으니 ‘잔치국수’다. 지루한 일상에 잔치라는 단어는 잊고 산 지 오래되어서, 애써 한 그릇 끼니로나마 잔치 비슷한 끈이라도 붙잡아 보려는 얄팍한 애잔함도 숨길 수 없다. 언제 잔치나 파티를 했는지 기억은 흐릿하고 추억은 아련하다. 그래서 국수의 그림자는 길고 긴지도 모르겠다. 나 잡아봐라 하면서.




한 그릇 후루룩 뚝딱.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면치고 잔치를 마치고, 방구석으로 돌아오던 길에 라디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니 이건 전설적인 팝 그룹 아바(ABBA)가 아니던가?’ 기쁜 마음 한구석과 생소함이 어우러져 스쳐 간다. 아바의 어지간한 노래는 청춘 시절에 모조리 섭렵했는데 이 노래는 낯설다.

다소 느린 리듬이지만 아바다움은 여전히 잔뜩 녹아든 노래다. DJ는 이렇게 말한다.


“아바가 40여 년 만에 신곡을 발표했습니다. I still have faith in you. 본격적인 활동을 재개한다기보다는, 오랫동안의 멈춤을 멈추고자 발표한 신곡입니다.”


‘세상이나, 살아생전에 아바의 신곡을 다시 듣게 되다니.’ 신비로움마저 감도는 짜릿하고 묘한 감동의 순간이다. 잔잔하고 청명한 노래도 노래지만 DJ의 짧은 문장이 오랫동안 가슴에 남아 메아리친다. 지금은 70대 중반쯤 되었을 아바 멤버들이 멈춤을 그만 멈추고 신곡을 발표하다니. 음악이 흐를수록 그들의 시도와 도전이

노래보다 멋지다는 생각에 이른다. 문득, 마음의 시선이 꽤 오래도록 무기력에 빠진 나의 멈춤으로 향한다.

언제부터 인지도 가물가물하다.


잠깐의 무기력 상태라면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하겠지만, 헤어질 기약 없이 끝없이 가라앉기만 하는 무기력. 이 앞에서는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명언도 잘 통하지 않는다. 그저 멀거니 방구석 천장과 바닥만 쳐다보고 있는 대책 없는 시절이여. 이 멈춤을 멈추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무기력에 빠졌다면 빨래를 하거나 청소를 하거나 뭐라도 하면서 몸을 바쁘게 움직이라는 말이 있다. 아마도, 무기력이 자리 잡지 않게 차단하려는 의식적인 시도 이겠지. 축 처진 거북목을 펴고, 천천히 눈을 뜨자 동네 야트막한 산이 눈 앞에 펼쳐진다. 그저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했던 산꼭대기에는 작은 공원이 하나 있다. 오래도록, 원래 그 곳에 있던 산과 공원이 그제야 선명해진다. 아바의 음악에 이끌려 멈춤을 멈추려 한다는 단 한 문장을 품어 본다.


어두운 천정, 낡은 방구석에서 시선을 산으로 향한다. ‘이 망할 놈의 상심과 무기력에서 어떻게 하면 자유로워 질 수 있을까? 조금이라도 걸으면 다른 내가 보이려나? 다시 살아갈 길이 보일까?’ 무작정 길 위에 섰다. 산을 오른다. 공원으로 향한다.

‘몸도 마음도 성치 않은데 걸을 수 있을까? 그래도 그냥 할 수 있는 만큼 걸어보자. 잠깐이라도 잔치를 벌여보자.’ 전설의 팝그룹처럼 거창하고 근사한 창조나 발표가 아니더라도, 개인의 소소한 도전, 작은 시도, 당장 뭐라도 하면서 한없이 답답했던 멈춤을 멈추고 싶은 바람이 물결처럼 일렁인다. 더 이상, 상심과 무기력으로 일상을 먼지처럼 날려버리고 싶지 않았다. 아프지만 담담하게, 소소하지만 기어코 멈춤을 멈출 수 있다면 이 어찌 마다할 일인가.


들국화 전인권은 이런 노랫말로 사람들의 마음을 적신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 그런 의미가 있죠 / 떠난 이에게 노래하세요 / 후회 없이 사랑했노라 말해요 / 그댄 너무 힘든 일이 많았죠 / 새로움을 잊어버렸죠.”

그래 맞다. 새로움을 잊어버렸을 뿐이다. 그냥 그뿐이다. 새로움을 다시 찾아보자. 잔치가 별건가? 국수 한 그릇의 감사와 노래 한 곡의 감동이면 이 또한 충만한 잔치이고 쨍한 새로움 아니던가.

아무런 계획도, 대단한 다짐도 없이

막막함을 벗으려는 마음 하나로

빨래를 하거나 설거지하는 마음으로

멈춤을 멈추려

어느 봄날

그렇게 길 위에 섰다.


땡큐! 후루룩!

땡큐! 아바!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