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다리 헌 책방거리 <아벨서점>에 가서 책향기 맡고, <싸리재> 넘어 <신포시장>에서 장 보고, <꿈벗도서관> 들러 책 빌리고, <자유공원> 산책로 몇 바퀴 돌고 돌아오자'
주요 거점들 사이의 거리 계산과 이동 목적 그리고 가장 효율적인 동선을 야무지게 구상하고 나서야 비로소 문밖을 나선다. 맞다. 나는 INFJ다. 웬만하면 방구석에서 잘 벗어나지 않으니, 모처럼 나서는 한 번의 외출타임에 생활에서 요구되는 다양한 필요와 여러 일들을 원스톱 솔루션으로 해결해야 한다. To Do List를 돌돌 말아 괴나리봇짐에 넣고 출발하여 한꺼번에 처리하고 돌아오는 것이 휴일의 미션이다. 용의 주도는 아니고 짜임새있게 일상을 꾸려보려는 Smart Guy다.
일요일 아침에 이웃 동네 마실을 다녀왔다. 오랜만이다. 작년 환갑여행 때 며늘아가가 선물해 준 멋지고 귀여운 가방 메고 문밖을 나서는 발걸음은 신바람 춤바람이다. 지난한 겨울 버텨내고 여기저기 아팠던 고통의 계절 이겨낸 소년의 미소는 해맑고 투명하다. (어지간히 좀 하자. 이 정도면 자기애를 넘어 자아도취라 할 만하니, 독자님들이 짜증 내실라)
너무 이른 시간에 왔는지, 책방은 닫혀있다. 오픈시간까지 두 시간은 더 기다려야 하니 주변 사진 찍고 그냥 멍하니 햇볕 쪼인다. 햇볕도 여러 종류와 장르가 있는데 나는 책방 앞 햇볕이 제일 그윽하고 완전 맛있다. 휙. 웬 여인이 사진 찍으며 초연히 지나간다. 이 여인도 너무 일찍 왔나 보다. 자유로운 영혼인 나는 디오게네스처럼 또는 궁예처럼 '누구인가, 누가 내 햇볕을 가리는가'며 한바탕 장난스러운 호통을 치는 상상을 하는데 여인은 벌써 지나가 버렸다.
멋쩍은 나는 가볍게 일어나 싸리재로 향한다. 싸리재는 배다리와 신포동 사이의 고갯길인데, 청춘의 방황기에 친구들과 숱하게 넘나들던 고개다. 신포동에 즐비한 술집에 술 먹으러 가느라. 술 취해서 집으로 기어 오느라.
엄니의 고증에 의하면 니 아버지도 그러셨다 하니, 난 이 고개를 지날 때마다 아버지를 생각한다. 길가에 싸리나무 가득하다고 싸리재라고 아버지는 아주 오래전에 나에게 말씀하셨다. 고개 이름은 직감적이고 생애의 추억은 역사적이다. 그러니, 이 거리의 DNA는 선명하고 낭만지수는 예나 지금이나 언제나 치사량이다.
한없이 치솟은 물가에 한숨만 내쉬다가, 신포시장을 그냥 통과하는데 누군가 사진 찍고 있다. 아까 그녀다. '그저 동선이 겹치는 거겠지. 설마 나의 미모에 반하여 졸졸 쫓아올리는 아마 없을 거야 ' 참으로 어이없고 허당스런 혼잣말 하며 시장을 빠져나온다. 꿈벗도서관에서 책 빌리려고 자동기기에 올리니, 지난번 빌린 책 반납이 늦어져 대출불가란다. 결국, 가방에 아무것도 담지 못한 나는 털레털레 마지막 코스인 공원으로 향한다. 홍예문 꼭대기 창살 틈새로 살짝 고개를 내민 개나리가 반겨 맞는다. 한 줄기 여린 개나리가, 아직 눈도 못 뜬 아기 개나리가 세상 낡은 빈털터리인 나를 위로한다. 고마워 개나리야.
감사의 기념사진 찍는데 무언가 또 휙 지나간다. 또또또 아까 그녀다. 반복되는 우연은 필연이라 했던가. 그녀도 나를 힐끗 바라본다. '이쯤 되면 우리 통성명이라도 합시다'라고 말하려다 말고 쭈뼛거린다. 스무 살 버릇 환갑에도 환장한다더니 낯가리기는 여전하다. 역시나 INFJ다.
그러는 사이 그녀는 공원 가장 높은 곳 냥이동산으로 빠르게 올라선다. 사진 찍는 그녀 주변으로 아지랑이 피어난다.
따라가야하나 어떻게야하나 소년의 정수리에는 아찔한 현기증이 밀려온다.
두 시간 사이에 다른 공간에서 세 번이나 만나다니.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전도연 한석규 주연의 영화 <접속>이 스치듯 생각난다. 레코드가게 계단에서 스치듯 울려퍼지는 노래 <Lover's Concerto>도 기억난다. 참으로 묘한 경험이 아닐 수 없다.
통성명을 안 했지만 나는 알 수 있다. 그녀의 이름은 <새봄>이 분명하다. 성씨는 <이>씨 일거다. 그러니
<이새봄>이다. 이여름, 이가을, 이겨울 아닌 이새봄이다. 이로써 사시사철 춘하추동은 이씨 가문임이 밝혀졌다. 인천 이씨다.
오늘의 발견이요, 새로운 문중의 출발이다.
방구석에 들어오자 이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무엇으로 하루를, 일상을, 그리고 나를 채우고 싶은가.
빈 가방이면 어떠랴. 빈 손이면 또 어떤가. 누군가와 통성명을 하든 못하든 일러 무삼하리오.
계절을 담고 문장을 거닐며 나는 내가 사랑하면 될 터이다.
일요일 가방 안에는 봄이 봄 향기가 봄의 생명이 봄날의 햇살이 한아름 가득했다. 그 가방 속이 겨울철 고독 한가득 이어도 좋을 듯하다. 지난 날 후회없이 사랑했으니, 개나리 한 줄기 만났고 <봄의 고향> 문장 한 줄 얻었으니 기쁘지 아니한가. 껄껄껄.
이새봄과 가방이 함께 웃는다. 매해 새봄이 오면 참 일관성이 있게 설레는 건 좋은데, 제발 적당히 좀 하세요.
문학소년님아.
그런다.
아무리 봄이라도 어지간히 좀 설레자. 주책도 자주 부리면 습관된다. 말은 이렇게해도 나는 새봄이 좋긴 좋은가 보다.
봄바람이 살랑살랑 창문 턱을 넘어온다.
이를 어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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