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없는 일이 발생하거나,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상황 앞에서 하는 말이 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가 그 문장이다. 닥친 일이 오죽이나 황당했으면 귀신마저 곡을 해댈까. 상황의 특성이 품고 있는 섬뜩함과 그에 비례하는 헛웃음을 세밀히 버무려 한 문장에 깔끔히 담아낸 우리네 선조들의 혜안과 놀라운 아포리즘을 만날 때마다 문학소년은 그저 감탄할 뿐이다.
아침밥을 차려 먹는데 젓가락이 안 보인다. 숟가락은 있는데 젓가락이 없다. 분명히 어제저녁밥 먹을 때만 해도 있었는데, 방구석을 아무리 뒤져 보아도 없다. 밤새 도둑이 들거나 귀신이 들어왔다가, 훔쳐 갈 것이 너무 없는 허름한 살림살이를 보고 한바탕 곡을 하다가 젓가락이라도 쌔벼 갔는가? 흠칫 섬뜩함이 밀려오다가, '근데 숟가락은 왜 안 가져갔지?'라는 생각에 이르자 헛웃음이 밀려온다.
나도 모르게 하는 말. 전자동으로 떠 오르는 한 문장.
"참으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로다."
질곡한 삶을 긴 설명 필요 없이 한 문장으로 찰지게 살아 낸 대한민국 조상님들께 경의를 표한다.
1인분의 방구석에 여분의 젓가락은 없다. 숟가락도 하나. 밥공기도, 국그릇도 하나다. 찾아 올 손님도 없고 친구들도 올라오기 힘들어서 외면하는 달동네 옥탑방의 사계절 살림살이에는 고독마저 철저한 1인분이다.
숟가락만으로 밥을 먹는데, 반찬을 숟가락으로 뜨자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군대 시절처럼 3분 내로 와구와구 식판째로 쏟아 마시자니 이젠 청년도 아니다. 더구나, 21세기 문화교양인으로서의 자부심과 품위가 시퍼렇게 살아 있으니 손가락만큼은 허용하지 않는다. 원시에서 최첨단 문명사회로 인류가 얼마나 피눈물 나게 쌓아 올린 '탈 원시'인데 보는 사람 없다고 냉큼 원시로 돌아갈 순 없다. 그럴 순 없다. 신독!
밥 먹다 말고 동네마트 가서 물어보니 "쇠젓가락은 안 팔아요." 그런다. 쇠젓가락은 도대체 어디 가서 사야 하는가. 환갑이 넘어도 모르는 게 이렇게나 많으니 세상 앞에 겸손하여라.
1인분의 비애? 혼술 혼밥 혼생만이 아닐 터. 그건, 아는 사람만이 안다. 마트 사장님이 그 걸 알아차리신 걸까? 문 밖을 나서는 나를 붙잡는다. 그녀의 손에는 나무젓가락이 한 보따리 들려 있다. 카운터에 늘 비치되어 있던 무료 제품. 달랑 세 개만 집어 든 나에게 마트 사장님은 한 보따리를 안긴다. "아휴. 어쩌다 쇠 젓가락을 잃어버리셨어요. 이거, 너무 많아 처치 곤란인데 마침 잘 됐네요. 가져가세요."
대한민국이 이렇다. 남의 일상에 무심한 듯 보여도 알게 모르게 서로의 속사정을 보듬고, 상대방의 처지와 기분 살피며 한마디 말도 문장도 배려 넓고 사려 깊다. 문학이 뭐 별 건가. 마트 사장님의 한 문장이 곧 문학이다. 사랑 많고 품 넓은 자에게 녹아든 말의 습관이요 삶의 태도다. 허름한 일상도 난감한 가난도 잔잔한 감동의 순간으로 승화시키고 기꺼이 다시 먹고 살아내게 하는 문장의 쓸모. 철학이 냉정해서 쓸모 있듯, 문학의 쓸모는 단언컨대 다정이다. (그냥 오늘의 내 생각이니, 문학의 선배님들이여, 초보 주제에 문학 운운하는 저를 너무 타박하진 말아 주소서)
잃어버린 분모보다 얻는 게 더 많은 분자다.
보려고 노력해야 보이는 우주다.
무심한 척력보다 힘센 인력이다.
인생이 맛있다.
오늘은 젓가락을 잃고 우주의 섭리를 얻었다.
복 받으소서. 사장님.
문학이 가르쳐 준 문학의 마음은 우리네 일상에 널려있다.
다정한 사람들한테만 보인다. 아마 그럴 것이다.
방구석으로 돌아오며 생기를 되찾은 나는 오랜만에 한 문장 길어 올린다.
"세상에 다정할 지어다. 그게, 쓰는 자의 쓸모다."
밥이 이제야 맛있다.
#젓가락 #배려 #다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