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석하다. 생기란 찾을 데 없고 활기란 애초에 없었던 듯, 태초의 물기마저 메말라 보인다. 거친 들판에 뿌연 먼지처럼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서부영화의 둥그스런 건초더미 또한 오버랩된다. 한마디로 황량하다. 황량한 서부의 무법자. 얼굴이 무법천지다. 요즘, 거울에 비친 나의 얼굴을 보고 떠오른 느낌들이다.
시무룩하다. 겨울잠을 너무 잤나 보다. 지난가을 무렵만 해도 (위의 사진처럼) 홀쭉했던 뱃살이 D자 배퉁머리로 부풀어 올랐고, 가뜩이나 동그란 얼굴이 풍선처럼 커졌으며, 볼살은 찐 건지 부은 건지 호빵맨을 닮아있다. 먹고 땡, 자고 땡, 먹고 자고 땡땡만으로 기나긴 겨울을 줄기차게 살아왔으니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겠다. 그렇다고 제 멋대로 살아온 나의 게으름을 심하게 타박하지는 않는다. 매해 겨울의 끝자락에서 느끼는 이런 종류의 후회와 죄책감에도 이제는 이력이 난 탓이겠다. 타박해 봐야 의미 없고 후회해 봐야 소용없다. 나는 다음 해 겨울 끝자락에도 황야의 무법자처럼 건초더미에 먼지처럼 앉아 있을 것이며 푸석한 느낌과 시무룩한 감정을 여지없이 만날 거라는 예감은 아마도 정확할 것이다.
겨울의 매서운 추위도 이제는 별반 탓하지 않는다. 계절도 그저 제 일을 열심히 한 것일 테고, 그 열심을 탓하고 성질내봐야 겨울이 하던 일 멈추고 냉큼 물러서지 않을뿐더러, 하던 일 마무리해야 서서히 퇴장한다는 사실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계절이 그랬던 것처럼, 나 또한 그저 주어진 리듬을 따라왔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겨울은 멈추지 않았고, 나는 가라앉았다. 올 겨울은 그것으로 충분했던 제철 시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식으로, 천기운행의 법칙을 받아들이니 나도 이제 나이 먹어가나 보다. 이런 태도 또한 노화의 한 단면이라 한다면, 그런 노화라면 괜찮을 법도 하겠다. 매사에 신경질만 부리는 심술통 영감님보다는 제법 젠틀하지 아니한가.
새벽 공원길에 오른다. 에어로빅 댄스타임이다. 춘분이 지나자 거짓말처럼 동이 일찍 터온다. 월미도 머리 위에 비스듬히 걸치던 동해의 새벽빛이 어느새 광장 하늘 위로 가득하고, 어둠 속 달빛 아래 따라 하던 강사님의 동작들이 안개 걷히듯 훤히 보인다. 팔다리만 대충 펄럭이다 말던 춤사위가 달라졌다. 온몸이 쭉쭉 뻗는다. 빠른 템포의 동작을 쫓아가는 발재간마저 예사롭지 않다. 어라? 몸이 가볍다. 바야흐로 봄이다. 산수유가 첫 테이프를 끊었고 매화가 따라왔으며 목련이 기지개를 켠다. 곧 봄의 화려한 선수들이 와장창 입장하리라.
이런 모든 변화를 인식하고 인지하고 알아채는 건 무엇일까. 나의 의식일까 아니면 경험적 판단일까. 둘 다 이거나 둘 중 하나겠지 생각해 왔는데 선택지가 하나 더 있었다. "몸"이다. 의식하고 경험하기 전에 몸이 먼저 알아챈다. 먼저 반응한다. 그다음 순서가 인지 아닐까. 봄이 왔으니 운동해야지라는 의지도 사실은 몸의 명령 아닐까... 오늘 새벽만 해도 그렇다. 봄이 오자 몸이 가볍다. 정신이 번쩍 든다. 생각이 몸을 이끌고 단호한 의지가 헬스장으로 우리를 이끈다는 세상의 논리를 뒤집어, 몸이 생각에 앞선다는 새로운 학설?을 발견하는 순간이다.
오랫동안, 생각이 몸을 이끈다고 믿어왔다. 의지가 방향을 정하고, 결심이 행동을 만든다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반대일지도 모르겠다는 합리적 의심이 질문을 바꾼다. 몸이 먼저 반응하고, 생각이 그 뒤를 따라붙는 건 아닐까. 계절이 바뀌면 가장 먼저 움직이는 것은 감정도, 의지도 아니고 몸이 먼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 본다. 오늘의 나처럼,
"의식은 몸의 부산물이다." 라거나 “이성은 몸이 만든 도구일 뿐이다."라는 니체의 말처럼.
이런 걸 관능적이라 했으면 좋겠다. 관능이라는 단어는 성적인 끌림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오관 및 감각기관의 작용이라는 의미도 있듯이. 그러니, 나는 이 봄에 몸의 관능과 명령에 순순히 따르고자 한다. 남의 명령이나 지시를 지극히 싫어하는 나지만 이 한 문장이면 정리된다. "내 몸이 남이가?"
운동화 끈을 바짝 조여 매고 봄의 광장으로 나선다. D자 배퉁머리를 b자 모양으로 전환시켜야 할 때이다. 몸의 명령이다.
몸과 봄이 만났다. 몸이 봄에게 물어보았다. "봄아 너는 무얼타고 우리네 일상에 왔니?"
봄이 대답한다. "리듬 타고 왔지."
계절의 리듬에 올라타는 일. 계절마다의 제철 리듬에 내 몸을 맡기는 일. 작금의 나에게 필요한 일은 단지 그것뿐.
밖으로 나선다.
내 몸이 나를 봄으로 밀어낸다.
얼마나 어메이징 한 봄이 오시려는지,
몸이 설렌다. 맘이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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