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나쁜 계약서도, 계약서가 없는 것보다는 낫다.
어느 날 부모님께서 소일거리로 농사를 지을 땅을 매수하겠다고 하셨다. 몸도 성치 않으시면서 무슨 농사를 짓는다고 하냐면서 핀잔을 주었지만, 부모님께서 노년에 몸을 움직이면서 활기차게 생활하시는 것을 막을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 부모님께서 이상한 말씀을 하셨다. 눈 여겨 본 땅을 단독으로 매수하기에는 돈이 부족해서 친척과 공동으로 매수하고자 하는데, 농업인에게 지급되는 보조금을 받기 위하여 땅의 소유자는 친척 단독 명의로 하겠다는 것이었다(자세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땅이 공동 소유이면 보조금을 받지 못하는 것 같았다). 쉽게 말해, 땅 매매 계약과 등기는 친척 명의로 하고, 부모님께서는 일부 대금만 지급하는 이른바 '계약명의신탁'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부모님을 뜯어 말리기 시작했다. 명의신탁을 한 자는 부동산실명법에 따라 처벌될 뿐만 아니라, '계약명의신탁'에서 신탁자(부모님)는 향후 기 지급한 대금의 반환만 청구할 수 있을 뿐 매수한 땅의 지분을 주장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즉, 향후 위 땅의 지가가 상승하여 높은 값에 팔리더라도, 신탁자(부모님)은 판매금액에 대한 지분을 청구할 수 없고, 과거 지급한 매입대금만 반환받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수탁자(친척)이 명의신탁을 인정하여 위 땅의 지가에 대한 지분을 임의로 지급한다면 큰 문제가 없겠지만, 혹시라도 수탁자(친척)이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지가 상승으로 인한 모든 이익은 수탁자(친척)에게만 귀속되는 것이었다.
결국 나는 고민 끝에 '투자계약'을 체결할 것을 제안했다. 부모님이 친척에게 땅매입 대금 중 일부를 투자하고, 향후 지가 상승에 따라 땅이 판매되는 경우 판매대금의 일정 비율을 지급하는 내용으로 투자계약을 체결한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이었다. 부모님은 나의 제안에 따라 친척에게 '투자계약'을 체결하자고 제안하였는데, 돌아온 답변이 황당했다. "언니네 애들 무섭다. 무슨 계약서를 작성하자고 해."
'사회인을 위한 계약의 기초'로서 가장 처음으로 강조하고자 하는 내용은 '계약서를 작성하라'는 것이다. 계약을 체결할 때 계약서를 작성하라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현실에서 계약서를 작성하는 것은 허들이 매우 높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계약서를 작성하는 것을 상당히 꺼린다. 거래 내용이 어느 정도 합의된 후 '계약서를 작성하자'고 하면, 상대방은 마치 자신이 매우 무례한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는다. 심지어 계약 내용을 잘 협의하다가도 '계약서를 작성하자'는 말에 거래가 무산되기까지 한다. 이러한 경향은 거래 당사자들이 매우 친밀하거나, 거래상 지위가 낮은 자(소위 "을")이 거래상 지위가 높은 자(소위 "갑")에게 계약서 작성을 요구할 때 특히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을은 계약서를 작성하지도 못한 채 갑의 요구에 따라 일만 하다가 아무런 대가를 받지 못하기도 한다.
계약서 작성을 꺼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지금까지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 번째 이유는 '계약서 작성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법을 잘 알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자신이 법을 잘 알지 못한 상태에서 자칫 계약서를 작성했다가 불이익을 입을 수 있다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즉, 자신은 계약을 성실하게 잘 이행하겠지만, 상대방이 계약서를 빌미로 무리한 요구를 할 수 있다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다. 혹자는 갑이 계약서 작성을 거부하는 이유가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언제든지 말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할지 모르겠지만, 내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대부분의 계약당사자들은 자신은 계약을 잘 지킬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나쁜 짓을 하기 위해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나쁜 짓을 할까봐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는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계약서를 작성하는 것이 정나미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서로 친밀한 관계에서 함께 일을 하고 있는 와중에 갑자기 누군가가 계약서를 내밀면, 둘 사이의 관계가 갑자기 '친밀한 관계'에서 '차가운 비즈니스 관계'로 바뀐다는 것이다. 그 전까지는 서로 좋은 마음으로 서로 양보하며 일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계약서를 작성하려면 그 동안 느슨하게 협의해 왔던 내용을 구체적으로 엄격하게 작성해야 한다. 이로 인하여 계약 당사자들은 서로 거리감을 느낄 수밖에 없게 된다. 쉽게 말해, '나는 너를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너는 나를 사업 파트너로 생각하고 있었구나'라는 배신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계약서는 상호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더욱 필요하다. 계약서는 형식이 정해져 있지 않고, 양 당사자가 합의한 내용을 알기 쉽게 풀어 쓰면 그만이다. 계약서를 작성한다고 하여 불이익을 입을 이유는 없다. 오히려 계약서를 정확하게 작성함으로써 거래 조건을 명확히 할 수 있어서 예측하지 못한 불이익을 방지할 수 있다. 또한 계약서를 작성하면 계약 체결 당시의 양 당사자의 의사를 명확하게 알 수 있기 때문에, 거래 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서로에 대한 오해도 방지할 수 있다. 이로 인해 계약 당사자들 사이의 친분 관계가 틀어지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즉, 계약서를 작성하는 것이야말로, 사람들이 계약서 작성을 꺼리는 위 2가지 이유를 타개할 수 있는 해결책인 것이다.
사건 상담을 하다 보면 상당수의 쟁이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음으로써 발생한다. 더구나 계약서가 없는 경우 변호사도 사건을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난감한 경우가 많다. 물론 민법, 상법 및 각종 특별법이 계약 내용 중 일부를 대신하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분쟁은 아주 사소한 계약조건에서 발생하는데 법률은 그러한 세부적인 사항까지 채우고 있지 못하다. 아무리 나쁜 계약서도, 계약서가 없는 것보다는 낫다.
결국 부모님은 친척과 함께 땅을 매입하는 것을 포기했고, 친척은 단독으로 땅을 매입했다. 부모님과 친척은 여전히 잘 지내고 있다.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은 채 공동으로 땅을 매입했다면 그 전과 같은 관계를 유지하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사회인이라면 요구하자 "이제 계약서 작성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