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추운 겨울밤, 엇갈린 손가락

by 순신


영하 10도. 옷깃을 아무리 여며도 찬 바람이 틈새를 파고드는 밤이었다.

거대한 탑처럼 솟은 빌딩 건너편, 화려한 백화점과 호텔의 불빛이 닿지 않는 건물 뒷길은 유난히 더 어둡고 추웠다. 저녁을 먹고 공유오피스로 돌아오는 발걸음을 재촉하던 참이었다.

건물 입구에 다다랐을 때, 맞은편 횡단보도 앞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말 좀 물읍시다. 2호선 탈라면 어디로 가야 해요?"

추운 날씨에 빠른 걸음으로 오래 길을 걸었는지 숨이 잔뜩 찬 목소리. 족히 일흔은 넘어 보이는 남자였다. 그의 시선이 가리키는 곳에는 젊은 여성 두 명이 총총걸음을 하고 있었지만, 추위 때문인지, 아니면 낯선 이에 대한 경계심 때문인지, 그녀들은 아무런 대꾸 없이 지나쳐 버렸다.

"허, 참!"

노인의 입에서 새어 나온 허탈한 탄식. 갈 곳 잃은 그의 시선이 이내 3미터쯤 떨어진 내게로 향했다.

"저, 말 좀 물읍시다. 2호선 탈라면 어디로 가야 해요?"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은 똑같은 질문이 내게 다시 날아왔다. 가까이서 마주한 노인의 모습은 생각보다 더 고단해 보였다. 두터운 오리털 점퍼에 귀까지 덮는 모자를 눌러썼지만, 추위를 막기엔 역부족인 듯했다. 거칠게 뿜어져 나오는 입김 때문에 뿔테 안경 하단이 하얗게 서려 있다.

뿌연 안경 너머의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마음 한구석이 저릿해왔다. 나 역시 머지않아 맞이할 저 나이의 쓸쓸함 때문이었을까?

"이 길을 따라서 쭉 가시면 사거리가 나오는데요…."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노인이 돌연 손을 내저으며 내 말을 가로챘다.

"아니, 이 길로 가라던데?"

노인의 거칠고 투박한 손가락이 내가 알려주려던 방향과는 반대편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마도 내게 묻기 전, 다른 누군가가 그렇게 일러준 모양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확신이 서지 않아 내게 재차 물었던 것이리라.

물론 노인이 가리킨 방향으로 가도 역은 나온다. 하지만 거대한 마트 건물을 끼고 돌아가든가, 복잡하기로 소문난 지하 통로를 지나야 하는 길이다. 이 동네에 오래 산 나조차 가끔 헷갈리는 그 미로 같은 지하도 길을, 이미 지칠 대로 지친 노인이 찾아가기란 쉽지 않아 보였다. 나는 그에게 가장 직관적이고 쉬운 길을 알려주고 싶었다.

"아니에요 어르신. 쉽게 가시려면요, 지금 이 길로 쭉 가시다가 저기 보이는 호텔을 끼고 왼쪽으로 도세요. 그럼 바로 역이 나옵니다."

내 말이 끝나자, 노인은 김 서린 안경 너머로 나를 멀뚱히 응시했다. 잠시의 정적. 이내 그는 몸을 홱 돌렸다. 그러고는 자신이 처음 가리켰던 그 반대 방향, 누군가 먼저 일러주었을 그 길을 향해 고집스럽게 걸어가 버렸다.

"허, 참!"

아까 노인이 내뱉었던 것과 똑같은 헛웃음이 내 입에서도 터져 나왔다.

'저럴 거면 왜 물어보셨을꼬.'

순간적으로 어이가 없었다. 사무실로 들어와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손에 쥐고서야 그 노인의 마음이 조금은 헤아려졌다.

우리는 살아가며 수없이 길을 묻는다. 비단 물리적인 길뿐만이 아니다. 삶의 기로에 섰을 때, 선택의 순간이 버거울 때, 누군가에게 답을 구한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는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내 안에 이미 정해진 답을, 내가 선택한 그 길이 맞다는 것을 누군가 확인해 주기를 바라는 것일지도.

그 노인에게 필요했던 것은 새로운 정보가 아니라, 자기가 믿고 있는 그 방향이 맞다는 타인의 동의였을지도 모른다. 비록 나는 그것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을지라도.

결국, 어떤 길을 선택하든 그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은 오롯이 자신이다. 그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창밖 나뭇가지가 바람에 심하게 흔들린다. 부디 그 노인이 자신의 고집대로 걸어간 그 길 끝에서, 너무 늦지 않게 따뜻한 2호선 역을 만났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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