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가 쏘아 올린 脫위선 - 민낯의 폭력에 노출된 세상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26년 1월 8일 뉴욕타임스(NYT)와의 인터뷰에서 한 이 말은 나를 충격과 혼돈으로 몰아넣었다. 이것이 세계 최강대국 미국 대통령의 입에서 공식적으로 나온 말인가?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16년 처음 대선에 나설 때부터 그는 "The Failing New York Times" (망해가는 뉴욕타임스) "Fake News" (가짜 뉴스)라며 세계 최고의 레거시 언론을 사정없이 깔아뭉갰다. NYT를 악으로 규정지어 그들이 생산하는 뉴스의 신뢰도를 낮추겠다는 고도의 전략(프레임 전략)이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그랬던 트럼프가 NYT 기자 네 명을 갑자기 백악관으로 불러 이 세상에서 자신을 견제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한 것이다. 미국은 3권 분립 국가이고,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 견제와 균형의 공화국 아니던가?
시점이 공교롭다. 베네수엘라의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을 체포하고 미국의 직접 경영을 선포한 지 나흘 후였다. 아무리 엉망진창인 나라라 해도 엄연히 주권국가인데, 그 나라의 국가수반을 한밤중에 기습공격해 체포하고 헌정질서를 강제 종료시킨 것은 국제법을 정면으로 위반한 행위다. 국제사회의 비난 여론이 쇄도하기 시작한 그 시점에 앙숙인 NYT와 인터뷰를 잡은 것이다. 다음은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
- 국제법 = "미국의 군통수권자로서 세계 도처에서 휘두르는 권력에 어떤 견제장치가 있느냐"는 질문에 "나를 멈출 수 있는 것은 나의 도덕성, 나의 마음뿐이다"라고 답했다. 국제법이 있지 않느냐고 되묻자 "나에게 국제법은 필요 없다. 나는 사람을 해치려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국가 간의 충돌이나 권한 행사는 법과 조약이 아니라 힘이 결정 요인이 되는 것이라는 그의 세계관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라고 NYT는 해석했다.
- 그린란드 = 미군기지 사용권이 있는데도 굳이 우방인 덴마크를 겁박해 그린란드를 매입하려고 하느냐는 취지의 질문에 "소유권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성공을 위해 심리적으로 필요하다"라고 했다. 그는 심지어 그린란드 확보와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유지 중 어느 것이 중요하냐는 질문에 "선택의 문제가 될 수도 있다"고 했다. 자신의 뜻이 관철되지 않을 경우 미국의 가장 오랜 동맹인 나토 탈퇴도 검토할 수 있다는 얘기로 들렸다.
- 시진핑 = 미국이 베네수엘라를 공격한 것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에게 대만 침공의 명분을 제공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취지의 질문에 "무엇을 할지는 그가 결정할 일이다. 그러나 나는 그가 그것(대만 침공)을 하면 매우 나쁜 것이라고 그에게 얘기했다"고 말했다. 내가 하면 괜찮지만 네가 하면 나쁜 짓이라는 얘기다. 또 "다른 대통령이 재임 중일 때는 할지 모르나 내가 있는 동안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대만이 침공당하지 않으려면 계속 자신이 집권해야 한다는 얘기로 들릴 수도 있겠다.
- 노벨상 집착 = "나는 8개의 전쟁을 끝냈는데도 노벨상을 못 받았다. 오바마는 임기 시작 몇 주만에 상을 받지 않았나?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상을 받았다"며 강한 불만을 토로했다.
- 패밀리 비즈니스에 대한 비판 = 아들과 사위 등 가족 사업이 미국 대통령인 아버지의 덕을 크게 보고 있다는 비판에 대해 "1기 때 아들들의 해외사업을 막고 대통령 월급을 기부했는데도, 비판만 받고 아무런 공로도 인정받지 못했다"라고 되풀이해서 말했다. 그래서 2기 때는 아무런 제어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인지, 아니면 오히려 자신의 후광으로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지금 트럼프 패밀리의 비즈니스는 팽창 중이다.
- 과시욕과 가부장적 태도 = 41세의 JD 밴스 부통령과 54세의 마르코 루비오 국무장관을 "애들(Kids)"이라 부르며, 심지어 자신이 선물한 구두를 신게 한다고 자랑한다. 인터뷰 도중 잠시 들른 그들 역시 대통령이 사준 신발이라고 자랑스럽게 구두를 들어 보였다. NYT는 "트럼프는 자신의 야망을 채워줄 빈 껍데기 같은 인물들(팜 본디, 헤그세스, JD 밴스)이나, 트럼프의 개인적 권력욕과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강력한 이데올로그들(마르코 루비오, 스티븐 밀러)에 둘러싸여 있다"고 보도한 적이 있다.
- 결정적인 순간의 연출 = 인터뷰 도중 콜롬비아 대통령의 전화를 받았다. 콜롬비아는 좌파가 집권하고 있는 국가로 트럼프가 군사행동을 하겠다고 압박하고 있는 서반구 나라들 중 하나다. 트럼프는 오프 더레코드(비보도)를 전제로 NYT기자들 앞에서 수십 분간 통화했다. 외국 정상과의 통화는 대통령의 중요한 스케줄이다. 사전약속됐을 가능성도 크고, 그 자리에 기자가 배석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트럼프는 손가락을 입에 대고 '쉬'라고 한 뒤 태연하게 통화를 했다고 한다. 콜롬비아 대통령이 전화를 걸어온 자체가 그의 베네수엘라에 대한 군사적 강압 정책이 통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순간의 연출일 것이다. '봐라. 겁에 질려 나에게 애원하는 저들의 모습을.'
트럼프는 자신의 뜻대로 세계가 굴러가고 있음을 적대적 언론 NYT를 통해 미국인들에게 과시하려 했던 것이리라.
- 건강에 대한 독특한 논리: 8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체력과 인지 능력이 건재함을 증명하는데 필사적이었다. 전임인 조 바이든을 "노인들에게 일어난 최악의 사건"이라고 비난하며, 자신은 40년 전과 똑같은 체력을 가졌다고 주장했다. 2시간가량의 인터뷰 직후 "9시간도 더 할 수 있다"라고 으스대기도 했다. 혈액을 묽게 유지하기 위해 매일 325mg의 아스피린을 복용한다면서 다른 혈압약에 대해서는 "그거 먹은 사람들은 다 죽었다"라고 했다.
NYT와의 인터뷰 내내 트럼프가 쏟아낸 말과 행동은 우리가 흔히 미국 대통령에게 기대하는—적어도 흉내라도 내주길 바라는— 품격이나 가치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오직 섬뜩할 정도로 투명한 '나르시시즘'과 '힘의 과시'뿐이었다.
이 글을 써 내려가는 동안 더 기막힌 소식이 들려왔다. 마두로 대통령의 오랜 정적이었던 베네수엘라의 야당지도자 마리아 코리나 마차도가 16일 백악관을 찾아가 지난해 자신이 받은 노벨평화상을 트럼프에게 상납했다는 것이다. 마두로가 제거되자 사람들은 당연히 마차도에게 기회가 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두로에 대항해 수십 년을 싸워온 그녀였고, 부정선거만 아니었다면 베네수엘라의 지도자가 됐을지도 모르는 인물이다. 그 공로로 노벨평화상까지 받았으니까. 그러나 트럼프는 마두로 체포 후 마차도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자신이 축출한 마두로의 측근인 현직 부통령에게 권력을 넘길 것처럼 말해왔다. 자신에게 돌아왔어야 마땅할 노벨 평화상을 그녀가 받은 것에 대한 분노와 자신에 대한 충성의 표시로 수상을 거부하지 않은 것에 대한 앙심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왔지만, 나는 그것을 믿지 않았었다. 호사가들이 퍼뜨리는 말이라고 무시했었다.
그런데,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트럼프는 그녀에게서 노벨상을 상납받은 지 몇 시간 만에 소셜미디어에 “마리아는 내가 한 일(베네수엘라 침공) 때문에 노벨평화상을 나에게 주었다. 상호 존중의 멋진 제스처다. 고마워, 마리아.”라고 했다. 직후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평화상은 다른 사람에게 양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아... 내 얼굴이 왜 화끈거리는가? 이 소식을 듣고 나니 마두로가 최근 공식선상에서 춤을 추는 모습이 자신의 주먹 춤을 흉내 낸 것 같아 트럼프가 불쾌해했고, 마두로를 축출하기로 결심한 결정타가 됐다는 보도 내용도 사실일 개연성이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트럼프는 마치 "짐이 곧 국가다"라고 외치던 절대왕정의 군주처럼, 혹은 카지노의 룰을 자기 마음대로 바꾸는 포식자처럼, 미국의 국익을 자신의 사적인 감정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터뷰를 읽어 내려가며 나는 묘한 기시감과 함께 서늘한 공포심을 느꼈다. 그것은 단순히 그가 뱉어낸 거친 언사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지난 수백 년간 쌓아 올린 문명의 마지막 보루, '위선(Hypocrisy)'이라는 속옷을 그가 보란 듯이 찢어발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위선을 혐오한다. 겉과 속이 다른 표리부동(表裏不同)은 도덕적 타락의 상징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냉혹한 국제정치의 게임판에서, 그리고 복잡다단한 인간 사회에서 위선은 가끔 긍정적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17세기 프랑스의 작가 라 로슈푸코는 "위선은 악덕이 미덕에게 바치는 경의(Homage)"라고 했다. 위선자도 미덕의 가치를 알기 때문에 그것을 흉내 내는 것이라는 뜻이다.
게임이론의 대가 로버트 액설로드는 그의 저서 《협력의 진화》에서 반복되는 죄수의 딜레마 게임을 해결하는 가장 강력한 전략으로 '팃포탯(Tit-for-Tat,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을 제시했다. 상대가 선의로 대하면 선의로, 악의로 대하면 악의로 대응하는 단순한 전략이다. 이 전략의 핵심은 첫 수(First Move)에 있다. 상대가 누구든, 속마음이 어떻든, 일단 첫 번째 만남에서는 '협력(Nice)'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 이론과 연관된 미국의 대외 전략에 대해서는 추후에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정치에서 '위선'이 바로 이 '첫 수의 협력'이다. 미국은 지난 70년의 패권 역사 동안 이 위선의 미학을 가장 잘 활용한 국가였다.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그랬고, 케네디의 진보 동맹이 그랬으며, 심지어 레이건의 보수주의조차 '자유 세계의 수호자'라는 명분으로 포장되어 있었다. 물론 그 이면에는 냉혹한 미국의 국익 계산이 있었음을 우리는 안다. 미국의 아시아 전략, 중동 전략, 유럽 전략은 모두 미국의 글로벌 패권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1980년대 서울 거리에서, 그리고 지금도 중동과 남미 등지에서 '양키 고홈' 같은 반미구호가 나오는 이유일 것이다. 미국 대통령이 카메라 앞에서 "우리는 민주주의와 동맹의 가치를 믿습니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겉으로는 방긋 웃었지만, 속으로는 씁쓰레했다. 위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위선에는 결코 의심할 수 없는 '협력의 신뢰'도 함께 있었다.
그 '위선' 덕분에 한국은 안보를 보장받아 경제개발을 이뤄냈고, 유럽은 재건되었으며, 세계는 혼란 속에서도 예측 가능한 질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즉, 미국의 위선은 국제 사회라는 거대한 게임판이 나쁜 행위자의 배신으로 인해 파국으로 치닫지 않고 '무한 반복 게임'으로 유지되게 만드는 일종의 접착제였으며, 서로가 서로를 안도하게 만드는 '미래의 그림자'였다.
그런데 트럼프는 이 거추장스러운 예복을 벗어던지고 있다. 그는 민주당 정권의 위선을 '가식'이라 비웃으며, 자신의 탐욕을 '솔직함'과 '위대함'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 전시한다. 그는 동맹국에게 "돈을 내지 않으면 보호도 없다"라고 협박하고, 국제 조약을 휴지 조각처럼 구겨 버린다. 세계 최강국의 지도자가 위선마저 포기하면, 국제 정치는 야생의 정글로 변할 것이다. 트럼프가 쏘아 올린 이 '탈(脫) 위선'의 화살은 전 세계 지도자들에게 "이제 눈치 보지 말고 각자의 이기심을 드러내라"는 신호탄이 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 '위선의 시대'가 가고 '야만의 시대'가 도래하는 변곡점에 서 있다. 위선마저 사라진 정치, 그 벌거벗은 욕망들이 충돌할 때 우리에게 닥칠 미래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홉스가 말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혹은 게임이론이 경고하는 '모두가 패배하는 파국'일 가능성이 크다.
나는 30여 년간 국내외 정치를 근거리에서 구경했던 관찰자의 한 사람으로서 깊은 우려를 담아 이 글을 시작한다. 앞으로 이어질 글들을 통해, 나는 위선을 밀어내고 들어서고 있는 트럼프주의의 본질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트럼프라는 '나쁜 행위자'가 어떻게 게임의 판을 깨뜨리고 있는지, 그로 인해 우리 삶이 어떻게 각자도생의 비극으로 내몰리게 될지, 그리고 과연 우리는 이 야만의 폭주가 멈추는 것을 목격할 수 있을 것인지를 치열하게 고민해 보고자 한다. 위선마저 사라진 세계의 디스토피아, 그 낯선 풍경 속으로 여러분을 초대한다.
<알려드립니다>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How are You, Mr Trump' 연재를 기획해 이미 두 건의 글을 올린 바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냉소적인 내용일지라도 그에게 안부 인사를 하면서 글을 쓰는 것이 부담스러워졌습니다. 이해하시죠? 고민 끝에 '정치에서 위선마저 사라진다면'으로 제목을 바꾸고, 글의 스타일도 달리해 보았습니다. 혹시나 하는 분들이 계실까 싶어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