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setta Sherwood Hall
요약
로제타 셔우드 홀(Rosetta Sherwood Hall, 1865~1951)은 조선에서 활동한 미국의 의료선교사이자 교육자로, 한국 여성 의학교육과 여성 의료 접근성의 토대를 놓은 인물입니다. 1889년 펜실베이니아 여자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1890년 조선에 와서 보구녀관에서 진료와 교육을 시작했고, 이후 평양과 인천 등지에서 여성병원, 맹아·농아 교육, 여의사 양성에 큰 족적을 남겼습니다.
생애와 배경
1865년 9월 19일 미국 뉴욕주에서 태어났고, 청년 시절 의학과 의료선교의 길을 택했습니다. 당시 여성의대 자체가 매우 드물었는데, 그녀는 펜실베이니아 여자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조선 선교를 자원했습니다. 조선에는 1890년에 도착해 본격적인 의료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조선에서의 의료활동
처음 맡은 일은 조선 최초의 근대식 여성병원인 보구녀관의 책임자 역할이었습니다. 당시 여성들은 유교적 관습 때문에 남성 의사 진료를 꺼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홀의 진료는 실제 수요가 매우 컸습니다. 고려대 의과대학 소개 글에 따르면 보구녀관 재직 3년 동안 환자가 1만 4,000명 넘게 병원을 찾았다고 합니다.
여성 의사 양성
로제타 홀의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는 조선인 여성 의사를 직접 길러낸 것입니다. 그녀는 박에스더를 비롯한 초기 여성 의사 양성에 기여했고, 1913년 평양 광혜여원에 여성의학반을 열어 현지에서 교육을 시도했습니다. 1928년에는 조선여자의학강습소를 설립해 여성 의학교육의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으며, 이 기관은 훗날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의 뿌리로 이어졌습니다.
특수교육과 사회사업
홀은 의료뿐 아니라 특수교육에도 큰 관심을 가졌습니다. 미국에서 익힌 점자 지식을 바탕으로 평양 점자를 만들었고, 이를 통해 시각장애인 교육을 도왔습니다. 또한 청각장애인을 위한 평양농아학교도 세워 장애아동 교육의 새로운 길을 열었습니다.
가족사와 개인적 시련
그녀의 삶은 헌신만큼이나 큰 상실도 포함합니다. 평양에서 의료활동을 하던 윌리엄 제임스 홀과 결혼했지만 남편은 청일전쟁 시기 사망했고, 딸 에디스도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홀은 조선으로 돌아와 의료와 교육 활동을 지속했습니다.
역사적 의미
로제타 셔우드 홀은 단순한 선교사를 넘어, 한국 여성 의료의 출발점에 선 개척자였습니다. 그녀의 활동은 여성 진료, 여성 의사 배출, 장애인 교육, 지역 병원 설립이라는 여러 층위에서 한국 근대 의료와 복지의 기반을 넓혔습니다. 오늘날에도 고려대 의과대학과 관련 기관들은 그녀의 이름을 봉사와 사회공헌의 상징으로 기리고 있습니다
19세기 말 한반도는 수천 년간 이어져 온 전통적 가치관과 서구에서 밀려오는 근대적 물결이 격렬하게 충돌하고 융합되던 거대한 전환기에 놓여 있었다. '은둔의 왕국'이라 불리며 외부 세계와의 접촉을 경계하던 조선이 개항과 함께 마주한 가장 시급한 과제 중 하나는 근대적 보건 의료 체계의 구축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 속에서 1890년 조선의 땅을 밟은 미국인 의료 선교사 로제타 셔우드 홀(Rosetta Sherwood Hall, 1865-1951)은 단순한 의료인을 넘어, 소외된 여성들의 인권을 보장하고 장애인 교육의 기틀을 마련하며 한국 근대 의학 교육의 초석을 놓은 독보적인 인물로 평가받는다.1 43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그녀가 보여준 헌신은 한국 사회의 의료와 교육 지형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으며, 그녀의 가문이 대를 이어 실천한 박애 정신은 오늘날 대한민국 보건 의료 시스템의 근간을 이루는 중요한 정신적 자산이 되었다.4
로제타 셔우드 홀은 1865년 9월 19일 미국 뉴욕주 설리번 카운티의 리버티(Liberty)에서 농장을 운영하던 로즈벨트 렌슬러 셔우드와 피비 길더슬리브 셔우드 사이의 장녀로 태어났다.6 그녀가 성장한 시기 미국은 여성의 사회 진출과 전문직 참여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기 시작한 시점이었으며, 이는 로제타가 교육자로서, 그리고 의사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그녀는 1883년 오스웨고 주립 사범학교(Oswego State Normal School)를 졸업한 뒤 1년간 교사로 근무하며 교육적 자질을 기르기도 했으나, 그녀의 내면에는 더 넓은 세상을 향한 인도주의적 열망이 자리 잡고 있었다.6
그녀의 인생을 바꾼 결정적인 계기는 1886년 의료 선교사들의 강연을 접하면서 찾아왔다. 인도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을 통해 의료 서비스의 사각지대에 놓인 타국의 비참한 현실을 접한 로제타는, 질병 치료가 단순히 신체적 고통을 덜어주는 행위를 넘어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시키는 고귀한 사명임을 깨달았다.6 이러한 소명 의식은 그녀를 펜실베이니아 여자의과대학(Woman's Medical College of Pennsylvania)으로 이끌었고, 1889년 마침내 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며 전문 의료인으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6 졸업 후 뉴욕 빈민가에서의 의료 봉사 활동은 그녀에게 실질적인 진료 경험뿐만 아니라, 가장 낮은 곳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향한 공감 능력을 배양하는 소중한 수련의 장이 되었다.1
이 시기 로제타는 평생의 동역자가 될 윌리엄 제임스 홀(William James Hall)을 만났다. 두 사람은 의료 선교라는 공통된 목표를 향해 나아갔으나, 당시 미 감리회 여성해외선교회(WFMS)의 규정에 따라 파송 후 5년간은 결혼할 수 없다는 제약이 있었기에 로제타는 사랑하는 이를 뒤로하고 1890년 홀로 조선으로 향하는 긴 여정에 올랐다.6
로제타 홀이 1890년 8월 미국을 떠나 조선에 도착하기까지의 과정은 최근 대한민국 국가기록원에 의해 복원된 31.8미터 길이의 여행 편지 두루마리를 통해 세밀하게 재구성될 수 있다.8 94장의 영문 필기 편지를 이어 붙여 제작된 이 문서는 19세기 말 서구 여성이 동양의 낯선 나라로 향하며 느꼈던 경외감과 두려움, 그리고 조선이라는 국가의 사회상을 담은 귀중한 1차 사료이다.8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해 호놀룰루와 일본을 거쳐 태평양을 건너는 동안 로제타는 자신의 관찰을 꼼꼼히 기록했다. 1890년 10월 13일 제물포에 도착했을 때, 그녀가 마주한 조선은 빈곤과 질병, 그리고 유교적 폐쇄성이 공존하는 곳이었다.7 그녀는 기록에서 조선을 "세상의 끝"이라 칭하면서도, 자신이 이곳에서 수행해야 할 임무에 대한 강한 의지를 내비쳤다.9 특히 고종 황제의 청나라 사절단 접견 행렬이나 신정왕후의 국장 장면 등 당시 조선의 주요 국가적 사건들을 59장의 사진과 함께 기록한 것은, 당시 보건 환경뿐만 아니라 정치·사회적 의례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도 지대한 가치를 지닌다.8
조선에 도착한 로제타 홀은 정동에 위치한 스크랜턴의 집에 잠시 머문 뒤, 이화학당 근처의 한옥으로 숙소를 옮겨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7 그녀에게 부여된 첫 임무는 메리 스크랜턴이 설립한 한국 최초의 근대식 여성 병원인 '보구녀관(普救女館)'의 원장직이었다.1 당시 조선 사회는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유교적 내외 규범이 엄격하게 지켜지고 있었기에, 여성 환자들이 남성 의사에게 진료를 받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1 이러한 상황에서 로제타 홀이라는 여성 의사의 등장은 조선 여성들에게 단순한 치료자를 넘어, 자신들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해 줄 유일한 구원자와도 같았다.
보구녀관 원장으로서 로제타 홀이 수행한 업무 강도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그녀의 기록에 따르면 진료 첫날 4명의 환자를 본 것을 시작으로, 불과 10개월 만에 2,000명 이상의 환자를 치료했으며, 3년의 재임 기간 동안 총 14,000명이 넘는 환자가 병원을 방문했다.1 이는 당시 조선 여성들의 의료 수요가 얼마나 잠재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로제타 홀이 얼마나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임무에 임했는지를 증명한다.
로제타 홀의 인술(仁術)을 상징하는 가장 유명한 사례는 화상 소녀에 대한 피부 이식 수술이다.1 과거의 화상으로 인해 오른손 손가락 세 개가 손바닥에 엉겨 붙어버린 어린 소녀가 병원을 찾았을 때, 로제타는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인 기술이었던 피부 이식 수술을 결정했다. 환부를 덮을 건강한 피부가 부족하자 로제타는 주저 없이 자신의 팔에서 피부를 떼어내 환자에게 이식해주었다.1 한 달 뒤 소녀가 회복되어 다시 나타났을 때, 이 사건은 조선인들 사이에서 서양 의학의 경이로움뿐만 아니라 서양 선교사가 보여준 그리스도교적 사랑의 정수로 회자되었다.
이러한 박애 정신은 단순히 질병을 고치는 행위에 머물지 않았다. 로제타 홀은 조선 여성들이 스스로를 구제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고 믿었다. 그녀는 진료를 돕는 소녀들을 눈여겨보았으며, 특히 영어와 생리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던 김점동(박에스더)을 주목했다.5 로제타는 김점동에게 기초 의학을 가르치고 미국 유학의 길을 열어줌으로써, 한국 최초의 여의사를 배출하는 역사적 과업의 설계자가 되었다.1
1892년 6월 27일, 로제타 셔우드와 윌리엄 제임스 홀은 조선에서 결혼식을 올렸다.6 이는 조선 땅에서 거행된 최초의 서양식 결혼식으로 기록되어 세간의 큰 주목을 받았다.7 두 사람은 평양 지역의 의료 선교를 위해 험난한 사역지로의 이동을 결정했다. 당시 평양은 외국인에 대한 배척이 심하고 위생 환경이 지극히 열악한 곳이었으나, 부부는 그곳에 가장 큰 고통이 있음을 알고 망설임 없이 발길을 옮겼다.7
평양에서의 삶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며 평양은 청나라군과 일본군이 격돌하는 최대의 전장이 되었고, 수많은 부상자와 전염병 환자가 발생했다.7 윌리엄 제임스 홀은 부상당한 군인들과 조선인들을 치료하기 위해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격전지에 남았으나, 결국 과로와 발진티푸스 감염으로 그해 11월 24일 34세의 젊은 나이에 순직하고 말았다.7
남편을 잃었을 당시 로제타는 두 살 된 아들 셔우드와 뱃속에 일곱 달 된 딸 에디스를 품고 있었다.7 그녀는 출산을 위해 잠시 미국으로 귀국했으나, 남편이 그토록 사랑했던 조선과 평양의 사람들을 저버릴 수 없었다. 그녀는 미국에서 남편의 사망 위로금과 모금액을 바탕으로 평양에 병원을 세울 준비를 마친 뒤, 1897년 다시 조선의 땅을 밟았다.11 그러나 평양에 돌아온 직후 사랑하는 딸 에디스마저 이질로 잃게 되는 참담한 고통을 겪었다.7 남편과 딸을 조선의 흙에 묻은 로제타 홀의 슬픔은 "평양 오마니"라는 호칭 속에 담긴 조선인들의 연민과 존경으로 승화되었으며, 그녀는 이를 계기로 더욱 헌신적인 의료 사업에 매진했다.2
로제타 홀의 업적 중 의학적 공헌만큼이나 비중 있게 다뤄져야 할 분야는 장애인 특수 교육이다.1 19세기 말 조선 사회에서 시각장애인은 교육의 대상이 아니었으며, 대부분 점술가나 무속인으로 살아가거나 가족에게 버림받는 비참한 처지에 있었다.2 로제타 홀은 이들이 신체적 한계를 극복하고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문자'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2
그녀는 1894년 평양에서 자신의 첫 신자였던 오형석의 딸 오봉래가 시각장애인임을 알고 그녀를 가르치기 위해 점자 연구를 시작했다.2 미국 체류 기간 중 '뉴욕 포인트(New York Point)' 점자 체계를 익힌 로제타는, 이를 한글의 음절과 자음·모음 구조에 맞춰 변형한 4점식 '평양 점자'를 독자적으로 개발했다.1 이는 1926년 박두성이 '훈맹정음'을 발표하기 전까지 약 30년간 한국의 유일한 시각장애인용 문자로 사용되었다.1
로제타 홀은 두꺼운 기름종이에 바늘로 구멍을 내어 한글 교리서, 십계명, 성경 등을 점역하여 교재로 만들었다.2 1903년 설립된 평양맹아학교에서는 점자뿐만 아니라 산수, 음악, 뜨개질, 안마 등 실용적인 기술을 가르쳐 학생들이 사회의 일원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왔다.2 또한 그녀는 장애인 교육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 1914년 '제1회 동양 맹아 교육 관계자 대회'를 평양에서 개최하는 등, 한국의 특수 교육을 국제적 수준으로 끌어올리려 노력했다.2
로제타 홀의 궁극적인 비전은 조선인 여성들이 스스로 의료 체계를 운영할 수 있도록 전문 의학 교육 기관을 설립하는 것이었다.1 그녀는 1912년 평양 광혜여원 안에 의학 강습반을 열어 본격적인 여성 의료 인력 양성에 착수했다.1 그러나 당시 식민 지배 하의 일제는 여성들의 전문직 교육을 억압했으며, 선교사들이 세운 기존의 의학 전문학교들조차 유교적 관습과 운영상의 이유로 여학생의 입학을 허용하지 않았다.11
이러한 난관 속에서도 로제타 홀은 굴하지 않고 조선인 지도자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여성이 여성을 치료하는 '자주적 의료권'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모금 활동을 전개했고, 마침내 1928년 60여 명의 조선인 유지들과 함께 '조선여자의학강습소'를 창립 발기했다.1 이는 한국 역사상 최초로 설립된 여성 전용 전문 의학 교육 기관이었다.
이 학교는 로제타 홀이 1933년 은퇴하여 귀국한 후에도 김탁원·길정희 부부에 의해 계승되었으며, 이후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로 승격되었다.1 해방 이후 이 기관은 수도여자의과대학, 수도의과대학, 우석대학교 의과대학을 거쳐 최종적으로 고려대학교와 통합되어 오늘날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의 모태가 되었다.1 로제타 홀이 척박한 땅에 심은 여성 의학 교육의 씨앗이 오늘날 한국 최고의 명문 의대를 탄생시킨 거대한 뿌리가 된 것이다.
로제타 홀의 한국 사랑은 그녀의 아들 셔우드 홀(Sherwood Hall, 1893-1991)을 통해 대를 이어 계속되었다.12 평양에서 태어난 셔우드 홀은 어린 시절 자신의 유모이자 가족 같았던 박에스더가 결핵으로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는 모습을 목격하며, 이 땅에서 결핵을 몰아내겠다는 다짐을 했다.12 그는 캐나다 토론토 의대를 졸업한 뒤 아내 마리안 홀(Marian Hall)과 함께 1926년 다시 조선을 찾았다.12
당시 조선에서 결핵은 신의 형벌이나 불치병으로 여겨졌으며, 환자들은 격리된 채 미신적인 치료에 의존하다 죽어가는 실정이었다.17 셔우드 홀은 1928년 해주에 한국 최초의 결핵 요양원인 '해주 구세 요양원'을 건립하고 서양식 전문 치료를 도입했다.12 또한 결핵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개선하고 치료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1932년 12월 3일, 한국 최초의 '크리스마스 씰(Christmas Seal)'을 발행했다.15
첫 번째 씰은 남대문을 형상화한 디자인으로 제작되었으며, 발행 첫해에만 49,000엔의 수익을 올리는 등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12 셔우드 홀 부부의 결핵 퇴치 운동은 단순한 의료 활동을 넘어, 일제 강점기 억눌린 조선인들에게 보건적 자긍심을 심어준 민족적 운동으로 평가받는다.12 이들은 1940년 일제에 의해 간첩 혐의로 강제 추방될 때까지 조선의 하늘 아래서 병든 이들을 돌보았으며, 이후 인도에서도 결핵 사역을 이어가며 평생을 인류애 실천에 바쳤.16
로제타 홀은 1951년 4월 5일 뉴저지주 오션 그로브에서 85세를 일기로 별세했다.6 그녀는 평생을 바친 조선 땅에 묻히기를 원했고, 현재 서울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역에는 그녀와 남편 윌리엄, 딸 에디스, 아들 셔우드, 며느리 마리안이 함께 잠들어 있다.6
오랜 시간 역사 속에 묻혀 있던 로제타 홀의 공적은 21세기 들어 활발히 재조명되고 있다. 2024년 4월, 대한민국 정부는 그녀가 한국 근대 의료와 교육, 장애인 복지에 끼친 지대한 공헌을 인정하여 사후 73년 만에 '국민훈장 모란장'을 추서했다.3 이는 정부가 외국인 선교사에게 부여하는 최고의 경의 중 하나로, 그녀의 인술이 시대를 초월하여 한국 사회에 깊이 뿌리내렸음을 공식적으로 확인한 사건이었다.3
또한 2021년 인천 기독병원 내에 개관한 '로제타 홀 기념관'과 2025년 고성 화진포에 건립된 '셔우드 홀 문화공간'은 홀 가문의 박애 정신을 현대인들에게 전하는 중요한 문화·역사적 거점이 되고 있다.21 특히 국가기록원이 18개월간의 정교한 보존 처리를 거쳐 복원한 그녀의 여행 편지 기록물은 디지털 고해상도 데이터로 공개되어, 구한말 조선의 모습과 한 선교사의 고뇌 어린 내면을 연구하는 데 무궁무진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8
로제타 셔우드 홀의 43년은 한 인간이 타국을 위해 보여줄 수 있는 헌신의 정점이었다.1 그녀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혹은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사회적 그늘에 가려져 있던 이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팔에서 피부를 떼어주었고, 보이지 않는 이들을 위해 점자를 만들었으며, 배울 수 없는 이들을 위해 학교를 세웠다.1
그녀가 구축한 의료 기관과 교육 체계는 오늘날 대한민국이 세계적인 의료 강국으로 우뚝 서는 밑거름이 되었으며, 그녀가 배출한 제자들은 한국 근대 지성사의 주역이 되었다.1 로제타 홀이 보여준 '공감과 실천'의 리더십은 오늘날 갈등과 소외가 만연한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윤리적 이정표가 된다. 32미터의 긴 편지 두루마리에 담긴 그녀의 첫 마음은 이제 대한민국 곳곳의 병원과 학교, 그리고 장애인 시설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쉬며 인류애의 위대한 유산으로 계승되고 있다.8
1. 시대를 밝힌 여인, 조선인 여의사 양성 씨앗 뿌리다 로제타 셔우드 홀 - 고려대학교의료원, 4월 20, 2026에 액세스, https://www.kumc.or.kr/seasonPress/KUMM_vol21/kumm42.jsp
2. 로제타 셔우드 홀(Rosetta Sherwood Hall)의 선교사역이 한국 시각 ..., 4월 20, 2026에 액세스, https://www.worldview.or.kr/library/article/download/2316/10408/%5B%EB%8C%80%ED%95%99%EC%9B%90%EC%83%9D%20B%5D%20%EC%9D%B4%ED%98%95%EC%A7%84%20%EB%A1%9C%EC%A0%9C%ED%83%80%20%EC%85%94%EC%9A%B0%EB%93%9C%20%ED%99%80%28%EB%B0%9C%ED%91%9C%EC%9A%A9%29.pdf
3. 43년간 약자 돌본 선교사 로제타 홀, 사후 70년만에 훈장 - 조선일보, 4월 20, 2026에 액세스, https://www.chosun.com/national/welfare-medical/2024/04/05/IUM2L6F3ABCP3HFIKN5SZFZBYQ/
4. 로제타 셔우드 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4월 20, 2026에 액세스, https://ko.wikipedia.org/wiki/%EB%A1%9C%EC%A0%9C%ED%83%80_%EC%85%94%EC%9A%B0%EB%93%9C_%ED%99%80
5. 시대를 밝힌 여인, 조선인을 위한 여의사 양성을 꿈꾸다 - 고대신문, 4월 20, 2026에 액세스, https://www.kunews.ac.kr/news/articleView.html?idxno=40494
6. Rosetta Sherwood Hall - Wikipedia, 4월 20, 2026에 액세스, https://en.wikipedia.org/wiki/Rosetta_Sherwood_Hall
7. 로제타 셔우드 홀 선교사(Rosetta Sherwood Hall) - 자료 --- 신앙도움 자료 - 김해양문교회 - Daum 카페, 4월 20, 2026에 액세스, https://cafe.daum.net/kymch/TVFH/1792
8. 136-year-old letters by US missionary glimpse Joseon-era Korea, 4월 20, 2026에 액세스, https://www.koreaherald.com/article/10710928
9. The Life of Rev. William James Hall, M. D: Medical Missionary to the Slums ... - Google Books, 4월 20, 2026에 액세스, https://books.google.com/books/about/The_Life_of_Rev_William_James_Hall_M_D.html?id=iB8FswEACAAJ
10. Hall, Rosetta Sherwood (1865-1951) | History of Missiology - Boston University, 4월 20, 2026에 액세스, https://www.bu.edu/missiology/2020/02/21/hall-rosetta-sherwood-1865-1951/
11. 22-2- Rosetta S. Hall (로제타 셔우드 홀) 선교사 편 ② - 재미고신총회, 4월 20, 2026에 액세스, https://kosinusa.org/_chboard/bbs/board.php?bo_table=m4_6&wr_id=107589&page=8
12. Dr. Sherwood Hall - 한국캐나다학회 KACS, 4월 20, 2026에 액세스, https://www.kacs.kr/index.php?hCode=PEOPLE_04_05
13. “Far away in heathen lands” -Rosetta Sherwood Hall & Pyong Yang Deaf School (1909), 4월 20, 2026에 액세스, https://blogs.ucl.ac.uk/library-rnid/2017/07/07/far-away-in-heathen-lands-rosetta-sherwood-hall-pyong-yang-deaf-school-1909/
14. 로제타 셔우드 홀 선교사, 한국 첫 “맹아학교”(1898년) - 당당뉴스, 4월 20, 2026에 액세스, https://www.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41222
15. KNTA report - 셔우드 홀 일가(一家)의 한국 사랑과 결핵퇴치 사업 ..., 4월 20, 2026에 액세스, https://koreascience.kr/article/JAKO201354840930321.page;?&lang=ko
16. Marian Bottomley Hall - Wikipedia, 4월 20, 2026에 액세스, https://en.wikipedia.org/wiki/Marian_Bottomley_Hall
17. The Sherwood Hall Family: 73 Years of Dedication to Medical Missions in Korea - YouTube, 4월 20, 2026에 액세스, https://www.youtube.com/watch?v=TfvA2tvr9mk
18. 우리나라 최초의 크리스마스씰은? | 서울대학교병원 - Daum, 4월 20, 2026에 액세스, https://v.daum.net/v/uGz7aqBE5f?f=p
19. 로제타 홀 의료선교사, 사후 73년만에 국민훈장 모란장 [GOODTV NEWS 20240408], 4월 20, 2026에 액세스, https://www.youtube.com/watch?v=eAyNMggwcRI
20. 故 로제타 홀 선교사, 사후 73년 만에 '국민훈장 모란장' : 선교 - 크리스천투데이, 4월 20, 2026에 액세스,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60909
21. 로제타홀기념관, 4월 20, 2026에 액세스, https://rosettahall.org/
22. 의료선교 어머니 '로제타 홀' 업적 기린다, 4월 20, 2026에 액세스, https://rosettahall.org/%EC%9D%98%EB%A3%8C%EC%84%A0%EA%B5%90-%EC%96%B4%EB%A8%B8%EB%8B%88-%EB%A1%9C%EC%A0%9C%ED%83%80-%ED%99%80-%EC%97%85%EC%A0%81-%EA%B8%B0%EB%A6%B0%EB%8B%A4/
23. 고성 화진포에 생긴 새로운 명소…'크리스마스씰' 셔우드 홀 문화공간 ..., 4월 20, 2026에 액세스, http://christian.nocutnews.co.kr/news/6358178
24. 크리스마스 씰 만들어 결핵퇴치 헌신, 셔우드 홀 선교사 (김인애) ㅣCTS뉴스 - YouTube, 4월 20, 2026에 액세스, https://www.youtube.com/watch?v=j9mfS08qB-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