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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난희 Oct 21. 2021

누군가를 기억하는 방식


“1961년 정월 초하루는 새해이자 내 생일이었다. 음력 동짓달 보름이 양력 초하루에 맞아떨어진 거다.(...) 나는 생일과 초하루를 축하하기 위해서 고깃국에 햇김으로 조촐한 아침상을 차렸다.”김향안의 에세이 <월하(月下)의 마음>을 읽다가 ‘햇김’으로 조촐한 아침상을 차렸다는 구절을 만났다. 서울의 60년대 초와 남편과 내가 태어난 시골의 1970년대 중반은 같이 흘렀던 것 같다. 서울 쥐와 시골 쥐의 격차라고 해야 하려나. 우리 시골에는 70년대 중반에도 김은 귀한 음식이었다. 귀한 만큼 참기름 발라 아궁이 석쇠에 구운 김은 정말 맛있었다. 그 당시에 맛을 알아 버렸으니 요즘 시중에서 사 먹는 김은 입에 맞을 리 없다. 길심씨의 불내 나는 김맛이 그립다.   


우리 길심 씨는 못 말리는 엄마다. 목소리는 크고 무뚝뚝하고 다정함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자식들 입에 들어가는 음식만큼은 무엇이든 당신 손으로 해야만 한다는 사명감을 가진듯하다. 요즘 조미되어 구워져 나오는 맛있는 김이 얼마나 많은가. 그럼에도 영암 오일장에 맛있는 김이라도 만나면 굳이 김을 사들고 온다. 그리고는 몇 년 전 새로 지은 황토집 아궁이에 장작불을 지핀다. 장작불이 사그라들고 벌겋던 숯불이 숨을 죽일 때쯤 당글개(고무래의 방언-아궁이의 재를 끌어당기는 도구)로 숯불을 아궁이 입구로 끌어당긴다. 손수 농사지어 갓 짜 온 참기름을 발라 두 장씩 맞붙여 놓은 김을 석쇠에 끼워서 숯불에 앞뒤로 돌려가며 굽는다. 쟁반에 산만큼 쌓인 김을 4등분으로 큼지막하게 잘라 봉지에 담아 큰딸, 작은딸네로 보낸다.  

   

때로는 설 명절에 가져오기도, 택배로 오기도 하는 길심씨 숯불 구이 김은 나에게만은 특별하다. 남편과 아이들은 모른다. 길심씨의 김구이 과정이 안 봐도 훤히 그려지기 때문이다. 부엌 한 켠에 쪼그리고 앉아 김에 참기름을 바르고 아궁이까지 몇 번의 높은 문턱을 넘고 또 넘는다. 간편하게 사 먹으면 될 걸... 길심씨가 이해가 안 가기도 한다. 나는 아이들이 맛있다고 해도 그렇게 귀찮은 일은 절대로 못하고, 안 하기 때문이다.     


가져온 김 봉지 옆을 지나기만 해도 숯불향이 코를 간질인다. 이러저러 아껴먹다 보면 바삭한 맛이 사라질 때까지 아껴 먹는다. 나는 항상 귀한 건 나중까지 아껴 먹는 습관이 있다. 좋은 것은 얼른 먹어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는데도 말이다. 엄마의 노고를 알기에 얼른 먹어버릴 수 없다. 어쩌면 엄마를 더 많이 음미하고 싶은 것일 수도 있다.    

 

남편은 김을 먹으며 어린 시절을 되뇐다. 김은 고급 음식이었다고 한다. 시어머님이 들기름 발라 구운 김을 아버님에게만 드렸다고 남편은 그때의 차별에 대해 또 이야기한다. 보리쌀에 쌀 한 움큼 넣어 밥을 지어 쌀밥만 똑 떠서 아버님에게 올렸다고. 쌀, 김 만으로도 그 시절의 문화와 상황을 알 수 있다. 요즘은 남편보다 아이들이 먼저다. 남편은 그때는 아버님에게 밀렸고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아이들한테 밀렸다. 지금은 나한테 밀린다. 음식이 시대를 대변하기도 한다.     


동생의 시어머님께서 만들어 주셨다는 김부각도 길심씨의 숯불 김구이와도 같다. 엄마손 맛이 들어간 음식은 그리움이다. 이제는 편찮으셔서 사돈 어르신의 그 맛을 볼 수 없게 되었다. 똑같은 맛이라도 우리의 정서상 엄마 음식은 엄마를 기억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누군가를 기억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중에 하나는 음식이 아닐까 싶다.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음식으로 기억에 남을까 생각해본다. 딱히 금세 떠오르는 음식이 없다. 큰일이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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