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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dcat혜진 Feb 09. 2022

세계와 세계, 그 끝에서 끝까지

| 그늘: 맑은 날에 꽃은 만개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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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이에요, 사라.


이곳은 늘 한결같아요. 변화가 없네요. 네, 지난번에 말씀하셨던 대로 해 봤어요. 생각나는 일이 있으면 미루지 않고 하는 거요.


네, 따뜻한 차요. 감사합니다. 이야기하는 동안 이거 좀 써도 될까요?  


음, 그래서…, 일단 스타일에 변화를 줬어요. 헤어스타일을 바꿨는데 저를 못 알아보는 사람도 있겠죠? 할 때는 별생각 없었는데, 지금은 그랬으면 하는 마음이에요.


누군가가 절 찾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요. 아…, 안젤로는 가끔 만나요.


저한테는 너무 고마운 일이지만, 안젤로에게는 아닐 것 같아서. 그래서…, 예전처럼 자주는 못 봐요.


또, 뭘 했더라. 그림요? 계속 그려요. 생각나는 대로 틈틈이 작업을 하니까 오히려 예전보다 결과물이 많아졌어요.


네, 그래서 다시 전시회 이야기가 나와요. 이번에는 제 작품으로만 하는 전시회요. 글쎄요, 아직 잘 모르겠어요.


요즘은 그릴수록 더 모르겠어요. 마리아가 좋아하던 레몬 트리를 그렸는데, 노란색 위로 보라색을 덧칠하고 있더라고요.


다른 색으로 또 다른 색으로 자꾸 덧칠하면서 결국은 원래 뭐였는지 잊게 되는데…, 그게 마음에 들어요.


처음에 뭐였는지, 어떤 색이었는지, 내가 어떤 생각으로 시작을 했었는지…. 다 잊는 거예요.


해가 뜬 낮에 시작을 해서 달이 지는 밤에 끝이 나면 또 무언가가 남았구나 싶어서…, 대신 저는 사라지는 것 같은 그 기분이 좋아요.


컨디션요? 음, 먹는 건 잘 먹어요. 냉동실 안에 있던 마리아의 음식은 버렸어요. 쿠키는 아직…, 네. 그러고 보니 못 먹는 음식이 생겼네요.


잠은…, 그럭저럭 괜찮아요. 가끔 잠이 안 오는 날에는 정원을 산책하던가, 그림을 그리던가, 그도 아니면…. 아, 역시 잘 아시네요. 맞아요. 사실은 잠을 거의 못 자요.


꿈을 꿔요. 아주 생생한 꿈이요. 불꽃이 하늘에 퍼지고 그걸 바라보는 우리가 있어요. 그 사람 손이 차가운데, 그 손을 붙잡고 있는 꿈을요….


꿈에서 깨면 너무 행복해서 울고, 또 미안해서 울어요.


제 생일에 첫눈이 왔는데, 너무 행복했거든요. 불꽃놀이를 함께 봤고, 두 손 가득하게 그 사람을 안았어요. 매듭 모양의 목걸이를 받았을 때 정말 뭔가 단단하게 매듭을 지은 기분이었어요.


맞아요. 늘 붕 떠 있던 ‘나’라는 존재가 어딘가에 안전하게 안착한 것 같았죠.


그 사람이요? 연락은 가끔 해요. 제가 먼저 연락하는 일은 없어요.


…, 아직도 제가 꿈을 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꿈은 꾸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요. 현실이 아니었으면 하는 마음이 계속 들어요.


꿈을 꾸는 것 같으니 잠을 잘 수 없나 봐요. 현실인지 꿈인지 가끔은 헷갈려서….


내가 그렇게 행복해서 웃고 있는 동안 누군가는 나라는 사람을 생각하면서 죽었다는 생각을 하면…, 그러면…, 그런 생각이 들면…….


첫눈이 내리던 그날, 그 사람의 손을 잡고 있던 그때는 꿈이 아니길 바랐는데, 마리아의 일은 그냥 끔찍한 꿈이길 바라는 거예요. 모순되게도 말이에요.


아니요.


죽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해요. 전…, 어떻게든 살아야 해요. 버티고 살아야 한다는 걸 알아요. 그러니까…. 그런 생각은 절대로 못해요.


아, 어제 한국에서 친구가 왔어요. 친구…, 라는 말을 쓸 수 있는 사람이요. 그런데 보자마자 울어버렸어요.


사실 기대했거든요. 아니, 기대하는 줄 몰랐어요.


그 사람이 이곳으로 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혹시라도 저를 보러 오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하는지도 몰랐는데, 기대하고 있었나 봐요.


나는 연락도 먼저 안 하는 주제에, 그 사람은 저를 먼저 찾아와 주길 바라고 있었나 봐요.


올 사람이 없는 오후에 초인종이 울렸을 때, 아주 당연히 그 사람을 떠올렸어요. 그래서 정원을 뛰어가면서 계속 기대했어요.


그리고 그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저도 모르게 울음이 터져버린 거예요. 저는 또 누군가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했어요.


영문도 모르고 그 친구는 저를 위로했어요. 위로받을만한 상황도, 그런 걸 받을만한 일도 아니었는데 말이에요.


전 평생 그런 슬픔과 불행이 끊임없이 계속되고 또 누군가에게 걱정을 끼치거나 위로를 받아야 하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문득 들더라고요.


주변 사람들의 불행과 슬픔과 죽음을 받아들이고 결국 버티고 살아야 하는 그런 삶이라도…, 그래도…, 살아야죠.


살아야 마땅하겠죠….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요. 이건 선물이에요.


뭘 그리려고 했던 것 같은데, 그게 뭐였는지는 잊어버렸어요.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저를 그리려 했던 것 같은데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선물이에요. 나중에 비싼 값에 팔 수 있을지도 몰라요.




“눈동자네요.”




사라는 재희에게 받은 그림을 받아 들고서 잠시 보다가 그렇게 말했다. 누군가의 눈동자 속에 바다가 있었고, 곧 사라질 것 같은 배와 그 위로 날리는 매듭 모양의 불꽃이 그려져 있었다.




“너무 많은 생각을 하려고 하지 말아요. 지금은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니까.”




제인도 같은 말을 했어요. 그냥, 사랑하고 살아가라고,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라고. 예전에 마리아도 그 비슷한 말을 했죠. 어려운 일은 그저 내가 만들어낸 생각일 뿐이라고.


하지만 지금 그들은 제 곁에 없어요. 아무도 없어요.


그래서 지금 그 말을 하는 당신도 사실은 실제가 아닐까 봐 좀 걱정되네요. 악수 한 번 하고 헤어질까요? 웃지 말아요. 전 지금 좀 심각하거든요.


…, 아니요. 괜찮아요. 울지 않아요. 우는 거 아니에요.


상담 시간이 남았으니까 조금만 더 있다가 일어나도 괜찮죠?




-




시호가 가져온 꽃은 화병에 꽂아두었고, 이튿날이 되자 만개하여 제법 한 참 동안 아름답게도 그 자리를 지켰다.


그날의 차는 재스민이었고, 정원의 날씨는 구름   없는 맑은 날이었다. 함께 노을이 지는 것을 바라보다가 시호가 문득 생각난 것처럼 정원이 예쁘다는 말을 꺼내고서야 재희는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잘 지냈냐는 말을 꺼낼 타이밍도 자신의 울음으로 지나가 버렸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기에는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눈이 마주치면 먼저 싱긋 웃어주는 시호가 그렇게 한참 자신의 앞을 지켜주었는데, 고맙다는 말조차 꺼내기가 어려웠다.




“나 꽃다발 처음 사봤어.”

“응. 고마워.”

“내 꽃다발 처음으로 받는 사람이 너야.”

“영광이네.”

“알면 다행이다.”




고맙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그리고 이내 시호의 말에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재희는 그런 시호의 장난스러운 말과 배려 가득한 마음이 진심으로 고마웠다.




“정말이야. 고마워. 바쁠 텐데 직접 찾아와 준 것도.”

“보고 싶은 사람이 먼저 와야지.”

“…….”

“이렇게 직접 보니까 정말 좋다.”

“…….”

“우는 모습만 보고 가는 건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고.”




시호는 마시던 찻잔을 내리며 다시 웃었다. 하지만 시선을 마주하지는 않았다.


밝은 색으로 염색한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렸다.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여러 가지로 신경 쓴 건데 지금 재희의 눈에는 하나도 안 들어올 것 같다.




“응. 아까는…, 너무 놀라서 그랬어. 생각지도 못했는데, 네가 와서.”

“반가워서 그랬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것도 있었고.”

“그럼 됐어.”

“…….”

“혼자 울지는 마.”




어디선가 작은 새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뒤를 이어 재희는 아주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응’이라고 대답했다.


시호도 고개를 여러 번 끄덕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충분했다. 누군가의 첫사랑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으며 언젠가는 끝날 테고, 또 누군가의 미안함과 고마움은 영원할 테니까.




“다음에 공연하러 다시 올 테니까 그때는 꼭 와줘.”

“알았어. 꼭 갈게.”




꽃은 시들겠지만, 그날의 마음은 저물지 않은 채 머무를 것 같았다. 돌아가는 시호의 뒷모습을 보던 재희는 저도 모르게 그를 불렀다.




“무대 위에서도 멋있지만 지금도 멋있어.”

“당연하지.”




재희의 말에 무대 위의 공연을 하듯 멋진 척 포즈를 취하던 시호가 곧 자연스럽게 손을 흔들었다.


언제까지나 멋진 웃음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시호의 웃음을 볼 수 있는 자신의 오늘이 다행이라고도 생각했다. 다행이라는 지금의 생각마저 위로가 되는 시간이었다.


시호의 손에 들려있던 꽃은 아름다웠고, 그날 그의 웃음은 멋있었고 노을 속으로 사라지던 긴 그림자마저 느리고 깊게 각인되어 잔상처럼 남았다.


…, 유난히 맑은 날이었다.


그날의 차는 재스민이었고, 화병에 꽂아둔 장미꽃은 만개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창문으로 흘러들어온 바람에 꽃잎 한 장이 날려 바닥으로 내려앉았을 때,


재희는 아주 짧은 잠이 들었다.


그리고 제법 긴 꿈을 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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