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idcat혜진 May 19. 2022

어쩌다 이별 중

| 매일을 ‘우리’로 지낸다는 것은…

-




선물을 받은 승철의 표정이 묘했다.




“뭐야, 그 표정은?”

“어, 아니.”

“별로야? 커플 운동화로 산 건데.”

“아니, 아니, 좋아, 좋아. 예뻐, 예뻐.”




거짓말이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을 보니 당황한 것이 맞다.


민트색과 짙은 갈색이 예쁘게 디자인된 로고를 돋보이게 했다. 올해 신상품으로 아직 시중에 판매하는 곳도 많지 않았다. 처음으로 정산을 하고 받은 돈으로 뭘 할까 하다가 정한은 그동안 하고 싶었던 커플템을 선물하기로 했다. 시계, 옷, 따위를 생각하다가 문득 한강으로 같이 자전거를 타러 갔던 기억이 났고, 마침 그날 촬영도 스포츠 브랜드의 신발이어서 이것저것 둘러보다가 신중하게 고른 선물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신중하게 고른 자신의 선물을 들고서 있는 승철은 신어볼 생각도 없는지 그저 조용히 신발 박스만 만지작 거린다.




“왜, 뭐.”

“…….”

“야.”

“어, 아니. 사이즈가….”

“너 한 치수 크게 신는 거 알고 그 사이즈 맞춰 왔어. 안 신어볼 거야?”

“…….”

“아, 됐어. 마음에 안 들면 반품해.”




정한의 기분이 상한 줄도 모르고 계속 무슨 생각만 하는 건지. 결국 정한이 승철의 손에 들려있던 신발 박스를 빼앗아들자, 그제야 화들짝 놀란 얼굴이다. 아니야, 아니야,  반복하는 승철을 보다가 정한이 인상을  썼다.




“뭔데. 뭐가 문젠데.”

“아니. 신발이, 신발은….”

“신발이 뭐?”

“도망간다고 하잖아.”

“뭐?”

“신발 사주면…, 도망간다고 하잖아.”




진짜 빼앗아갈까 봐 신발 박스를 꼭 끌어안고 있던 승철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정한이 잠시 멍하게 있다가 ‘허!’하고 어이없는 웃음이 나왔다.




“너 도망갈 거야?”

“아니!”

“그런데 뭐가 문제야.”

“그래도….”

“선물 준건 나고, 받은 건 너잖아. 너만 아니면 되는 거지.”

“그래도…, 그렇지만….”




정한은 어느새 신발 박스에서 제 운동화를 꺼내서 신어보고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주춤거리는 승철을 보더니 살짝 미간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알지? 너 지금 그거 오버야.”

“미신이지만 그래도…, 내가 그럴 일은 없지만…, 그래도.”

“그렇게 받기 싫으면 내려놔. 반품하게.”

“…….”

“난 커플 운동화 신고 산책도 같이 가고, 데이트도 하고 싶었던 건데. 네가 정 싫으면 할 수 없지 뭐.”




서운함이 묻어나는 말투에 승철이 얕은 한숨을 쉬고는 허리를 숙여 신발 끈을 묶고 있는 정한의 앞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신발 박스를 내려놓고 정한의 운동화 끈을 다시 묶어주며 대꾸했다.




“내가 도망갈 일은 없지만, 그래도 가끔은 좀 서운해.”

“뭐가.”

“네가 너무 긴장감이 없는 것 같아서.”

“뭐?”

“넌 내가 도망가는 건 하나도 신경 안 쓰이는 거지?”




그제야 정한은 승철의 표정이 미묘했던 이유를 제대로 알았다. 지금 이걸 좋아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어이없어해야 하는 건지. 운동화 끈을 다 묶어주고서는 눈꼬리를 내리고 시무룩해진 표정의 승철을 보다가 정한은 두 손으로 그 말랑한 볼을 잡아 제 앞으로 끌고 왔다.


예상치 못했는지 순식간에 끌려와 다가온 얼굴에 승철의 눈이 살짝 커진 것이 좋았다. 그래, 가끔 이런 긴장감도 나쁘지 않겠다.




“뭐가 신경 안 쓰여. 나 엄청 신경 쓰여.”

“진짜?”

“응. 그래서 내 것도 같이 산거잖아. 혹시라도 너 도망가면 쫓아가서 다리라도 분지르려고.”

“야아….”

“내가 사준 신발 신고 도망가기만 해 봐. 아주 그냥, 넌 그날이 제삿날이야.”

“야아, 너 지금 나 놀리….”




자신을 놀리는 것을 깨닫고 다시 억울함이 입술 밖으로 삐져나오려는 것을 얼른 다른 입술로 막았다. ‘쪽’ 소리가 나도록 몇 번이나 버드 키스를 하고, 말랑한 볼을 가볍게 두드리며 정한이 입술을 맞대고 웃다가 다시 그 얼굴을 숨 막힐 정도로 힘주어 끌어안으며 소리 내어 웃었다.




“아, 진짜. 별게 다 걱정이야. 그런데 너 진짜 도망가기만 해 봐.”

“안 가, 내가 너 두고 가긴 어딜 가.”




소파에 앉아있는 정한의 높이에 맞춰 무릎으로 선채 그대로 함께 끌어안으며 웅얼거린다.


그런 게 서운했구나, 그럴 수도 있겠네. 그런데 난 넌 믿으니까, 그런 건 생각도 안 했지. 알아, 아는데, 그래도 가끔은 너무 무신경한 것 같아, 너. 네가 너무 예민한 거야. 너한테만 자꾸 그렇게 되는걸, 어떡해….


그렇게 서로를 꼭 끌어안고 서로에게 자신의 마음을 보이고 있으니 가슴팍이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곧 이 기분으로 얼른 손잡고 산책 가고 싶어진 정한이 몸을 떼어내고 말했다.




“그럼 이제 운동화 좀 신어봐. 우리 오늘 커플 운동화 신고 산책 가자.”

“잠깐만.”

“왜?”

“너 새 신발 신으면 맨날 뒤꿈치에 상처 나잖아.”




구급상자에서 밴드를 찾아온 승철이 익숙하게 무릎을 굽혀 정한의 발을 새 신발에서 빼고 양말을 벗겨 뒤꿈치에 밴드를 붙여주었다. 정한이 정신을 차리고 어? 하고 보니 순식간에 다시 양말이 신겨지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운동화를 다시 신고 보니 그제야 조금 편한 느낌이다.




“네가 이러면 진짜 다리라도 분질러서 도망 못 가게 해야 할 것 같잖아.”

“어?”

“예쁜 짓만 한다고, 우리 승철이.”




별거 아니라는 듯, 당연한 것처럼 하는 이런 행동이 정한에게는 오히려 긴장감을 불러일으켜 없던 불안감마저도 생기도록 만든다는 사실을 아직 승철은 모르는 듯했다. 보상처럼 양볼을 붙잡고 입을 다시 맞추니 그저 좋다고 웃을 뿐이다. 승철이 제 운동화를 꺼내서 드디어 신어보려고 하자 이번에는 정한이 신발 끈을 묶어 주었다. 촬영장에서 배운 운동화 끈 예쁘게 묶는 방법이 오늘 제대로 진가를 발휘했다.




“짠, 예쁘지?”

“우와.”

“상 줘.”




조금 전과 반대로 이번에는 정한이 승철을 살짝 올려다보며 칭찬을 바라는 얼굴로 앉아있으니 그대로 똑같은 장면이 반복되었다. 닿아있는 코끝이, 다시 마주하는 입술이 따뜻했다. 누가 먼저인지 모를 정도로 피어오르는 웃음이 좋아서 한참을 끌어안고 있다가 결국 그날의 산책은 다음날로 미루어야 했다.

.

.

.




촬영장에서 새 신발을 너무 오래 신었다. 여러 켤레를 갈아 신기를 반복하고 몇 시간 동안 촬영을 했더니, 뒤꿈치에 상처가 나서는 어느새 피가 배어 있었다.




“아프네….”




어이없을 정도로 그 기억이 하나도 빠짐없이 재생되었다. 제 뒤꿈치에 밴드를 고이 붙이던 그 동그랗던 손끝이나 말랑거리던 볼의 감촉, 부드럽고 따뜻하게 마주했던 입술이, ‘신발 선물하면 도망간다던데 넌 걱정도 안 되냐’고 되묻던 그 서운함으로 포장되었던 애정까지도….


하나도 어김없이 또렷하게 떠올라서 정한은 일부러 뒤꿈치의 부풀어 오른 상처를 사정없이 손으로 떼어냈다.




“아….”




떼어낸 상처만큼 피가 더 많이 흐르고 있었다. 아픔만큼이나 잊을 수 있으면 좋은데, 아픈 만큼 더 그리운 건 또 뭐란 말인가.


한 달, 승철이 아프던 그날로부터 거의 한 달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아픈 건 어떤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다음 날 연락을 했었다. 다행히도 승철의 목소리는 그날보다 훨씬 편하게 들려서 정한은 안부만 묻고 끊으려고 했다.




“다행이다. 몸 관리 잘하고. 아프지 마.”

“언제 와?”

“…….”

“정한아.”

“…….”

“정한아.”

“…, 지금은 아니야.”

“알았어.”




당연한 것처럼, 마치 장기 출장이라도 간 애인에게 묻는 것처럼 그렇게 담담하게 묻는 승철의 목소리에 지금이라도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착각이 잠시 들었지만, 정한은 혼자 고개를 저었다. 제 이름을 연거푸 부르는 그 간절함이 자신에게는 여전히 무거운 미안함이 되어서 오히려 쉽게 돌아갈 수 없었다.


그래서 지금은 아니라고 대답했다.


지금은 아니라는 그 말에는 그럼 ‘언젠가’에는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뜻을 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승철은 그 말을 읽었을지도 모른다.


그날부터 하루에 한 장씩 사진이 왔다. 점심시간쯤 에는 사내 식당의 식판 사진, 오후에는 간단한 간식, 어느 날에는 야근 중인지 회사 데스크와 그 위에 놓여있는 정한의 사진, 잠잘 시간쯤에 오는 사진에는 침대 옆 무드등이 찍혀 있었다. 또 어느 날에는 늘 함께였던 포장마차의 술잔이 보이기도 했다.


고정된 시간이 아니라서 오히려 기다리지 않았고, 정한은 승철이 그렇게 보내주는 그 사진들이 부담스럽지도 불편하지도 않았다. 일부러 매일 같은 시간에 보내지 않는 것도 딱, 승철의 마음 같아서. 넌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고, 기다리는 건 내가 하면 되는 일이라고 하는 그 마음 같아서….


한 장씩 보내오는 그 마음을 사진첩에 보관하고 또 보관했지만, 정한은 한 번도 답장을 하지 않았다. 차마 답장을 할 수 없었다.


아직은 저에게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다. 어느 날 그렇게 갑자기 떠날 마음이 들었던 것처럼, 다시 스스로를 용서하고 돌아갈 수 있을 시간이.




-  




눈앞에 번쩍거리는 빛이 아직도 산란하는 느낌이었다. 거의 하루 온종일 촬영장에 묶여있으면서 잡지 지면 광고 촬영을 했는데, 환한 배경 덕분에 나중에는 눈이 시릴 정도였다. 잘 쓰지 않던 푸른색의 렌즈까지 착용하고 오랜 시간을 메이크업과 헤어, 착장까지 반복적으로 시달리고 보니 이 일을 왜 좋아하게 된 건지도 잊어버렸다.




“고생했어.”

“와…, 나 오늘 역대급이었다. 그쵸?”

“완전 잘 나왔어.”

“다행이다.”




그렇게 고생을 했지만, 만족스러운 결과물이 나왔을 때가 좋았다. 자신이 입고 있는 옷, 혹은 신고 있는 신발들이 분위기에 맞춰 돋보이는 그 한 컷이 좋았다. 자신의 손에 들고 있는 제품들과 패션 소품들이 지나가던 사람들의 시선을 고정시키도록 만드는 일, 화면 속에서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들이 저로 인해 더 돋보인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마음을 흔들었다.


누군가는 너무 늦은 선택이라고 했고, 마음에 바람이 들어서 그런 것이라고도 했으며, 그 외모로는 어림도 없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정한은 괜찮았다. 그냥 딱 한 사람만큼은 제 편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런 이야기들 쯤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무시할 수 있었다.

.

.

.




“너 예뻐, 완전 예뻐. 내 눈에만 그런 게 아니라는 건 좀 많이 문제지만, 그래도 예쁜 건 예쁜 거니까. 멋있기도 하고, 잘 생기기도 했고.”




언젠가 에이전시 여기저기에 지원서를 열심히 쓰던 정한을 보며 승철은 턱을 괴더니 심각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너만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진짜 어디 숨겨두고 나만 보고 싶은데, 내가 정말 큰 마음먹고 양보하는 거야.”

“고오맙네. 누가 들으면 내가 네 건 줄 알겠다.”

“진짠데.”

“…….”

“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 건, 멋진 것 같아. 그리고 너랑 어울려.”

“진짜? 정말 그렇게 생각해?”




제법 많은 지원서가 거절당하고 난 후 조금 지쳐있을 쯤이었다. 자신이 하려는 이 길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지금이라도 전공이나 살려서 다른 길을 가야 하는 건가 싶었다. 그 길도 딱히 쉽지는 않은 길이었지만, 그래도 하고 싶은 일을 놔 버릴 수 없었고, 이렇게까지 놓지 못하는 자신이 미련한 것은 아닐까 싶어서 의심하던 순간이기도 했다.


그래서 제 앞에 턱을 괴고 심각한 얼굴로 저를 보는 단 한 사람에게 물었다. 오로지 제 편일 것이 분명한 사람.




“응. 너무 잘 어울려서 솔직히 좀…, 부러워.”

“…….”

“난 하고 싶은 일이 딱히 없어서 취직 준비하는 건데. 넌 아니잖아.”

“왜, 너도 가고 싶은 회사 있잖아”

“그거야 당연히 연봉이나 복지 좋은 회사 가고 싶은 거고. 그렇다고 내가 그 일이 싫지는 않을 것 같지만, 그렇다고 막 미친 듯이 가슴이 뛰는 일은 아니니까. 너처럼.”

“…….”




큰 눈동자가 살포시 웃으며 그런 말을 해 주었다. 괜히 저보다 더 제 마음을 잘 말하고 있는 것 같아서 머쓱한 기분에 시선을 돌리고 마지막 지원서 제출 버튼을 누르며 안경을 벗었다. 그리고 다시 승철을 바라보니 정한의 그 무슨 마음을 읽은 건지 아니면 어떤 기분을 느낀 것인지, 천천히 손이 다가와 볼을 감싸고는 입을 맞춰준다.


자연스럽게 아랫입술과 윗입술이 차례로 맞물리고, 숨을 나누는 것이 일상처럼 자연스러웠다. 그럼에도 여전히 두근거리며 뛰는 가슴이 곧장 느껴질 정도로 이 감정이 식지 않았다는 사실이 늘 짜릿하게 좋았다. 이 짧은 순간만큼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맞물려 있던 입술이 떨어지며 정한은 승철의 볼을 두 손으로 아프지 않게 꼬집으며 물었다.




“뭐야, 갑자기.”

“내가 불안해서. 갑자기 네가 막 미친 듯이 유명해져서 나 떠나면 어쩌나 싶어서.”

“막 미친 듯이 유명해지면, 그때 가서 생각해보자.”

“어, 야!! 뭘 생각해? 그런 걸 왜 생각해?!”

“아하하하.”



.

.

.


깔깔거리는 정한의 어깨를 꼭 부여잡아 안고는 ‘빨리 그런 생각 취소하라’고 말하던 그날의 승철은 지금 제 옆에 없다.


꺼내도 꺼내도, 끝도 없이 계속되는 기억들이 그리고 또다시 이어지는 감정의 파도가 오늘도 정한을 순식간에 뒤흔들고 지나간다.


메이크업을 지우다가 거울 속에 있는 자신의 얼굴이 낯설어서 한 참을 보았다. 어느 날에는 너무 피곤해서 그대로 대충 모자만 뒤집어쓰고 귀가를 하면 승철이 제 얼굴을 살살 어루만지며 메이크업을 지워줄 때도 있었다. 섬세한 손은 아니라도 도톰한 손 끝이 살살 제 볼을 아프지 않게 어루만지려고 노력하던 그 순간이 간지러울 정도로 좋아서 자꾸 웃음이 났었다.


끝도 없이, 정말 끝도 없이…. 너무 깊게 박혀있는 모든 기억 속의 승철을 자꾸 꺼내서 하나씩 소진하면 언젠가는 사라질 수 있을까.


오피스텔 앞의 편의점에 잠깐 들려서 도시락을 사고, 맥주도 한 캔 샀다. 지칠 대로 지쳐서인지 어떤 생각이나 감각도 없는 얼굴로 그대로 현관문을 통과하여 들어갔다. 식탁 위에 사 온 것들을 대충 올려두고 잠시 휴대폰의 화면을 확인하고 서 있었다. 그리고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하다가, 샤워 부스 안에서 결국 혼자 주저앉아 버렸다. 뜨거운 물의 열기에 상처가 난 뒤꿈치는 쓰라리고 여전히 아물지 않아서 피가 났다.


욕실로 들어오기 전에 확인한 승철이 보낸 사진들이 떠올랐다. 연차를 쓴 건지 휴일도 아닌데 갈색 운동화를 신은 가지런한 발이 야외에 나와 있었다. 그리고 그다음 사진은 언젠가 함께 걸었던 익숙한 산책길이었다. 오늘은 사진뿐만이 아니라 문자도 있었다.




‘같이 오고 싶다.’

‘보고 싶다.’

‘정한아.’




마지막 누군가가 불러주는 그 이름이, 정한을 주저앉게 만들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정말 뻔뻔했다. 멋대로 이별하고, 어설프게 그리워하고, 아직도 끝내지 못한 이별을 그대로 붙잡은 채 뭘 하고 있는 건지. 어쩌다 이런 이별을 시작하게 된 건지. 돌이켜보면 예의 없는 이별을 무책임하게 시작했던 자신의 행동이 먼저였고, 너무 익숙한 모든 것들에 감사할 줄 몰랐던 제 자신을 탓해야 하는 것이 분명한데, 그렇게 모든 것이 제 탓이지만, 그렇지만…. 주저앉은 채 한 참을 있어도 가슴이 너무 아렸다. 울지 않으려고 했지만, 뻐근하게 계속 두근거리는 가슴 때문에 눈물이 계속 고였다.


더는 안 될 것 같았다.


이런 상황임에도 여전히 ‘우리’라는 말을 입에 올리며 ‘보고 싶다’고 말하는 단 한 사람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언제나 같을 거라고, 이 세상의 모든 단어들을 끌어내 이 관계의 당연함을 말하고, 몇 마디 되지 않는 단어들로 온 세상을 말하는 그런 사람이 보고 싶었다. 자신도 그 이름을 계속해서 불러주고 싶었다.


그래서 더는 안 될 것 같았다.


젖은 머리카락을 대충 정리하고, 떠날 때처럼 가볍게 다시 짐을 쌌다. 올 때 가져왔던 캐리어는 이상하게도 들어올 때 보다 더 비어져 있었다. 정리된 마음, 아니, 그 보다 몹시 허기져 채우기만을 기다리는 자신의 마음 같았다. 문을 열고 나서려다가 승철이 저에게 주었던 보라색 우산도 보여서 챙겨 들었다.


택시를 타고 올 때 까지도 떠날 때처럼 실감이 나지 않았다. 꿈을 꾸는 것처럼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와 호수가 적힌 문 앞에 서자 그제야 화들짝 놀라며 자신이 무슨 생각으로 이곳까지 온 것인지 깨달았다.




“뻔뻔한 새끼….”




혼잣말을 했다. 만약에 승철이 뻔뻔한 자신을 탓한다면, 그대로 받아들일 마음이었다. 그렇지만 막상 또 그런 말을 들으면 그 미안함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대비하지 못했다.


마른침을 삼키며 초인종에 손을 댔다가 누르지도 못하고 떼기를 두어 번 반복하는데, 갑자기 뒤에서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 편의점 봉투를 들고 선 승철이 있었다. 문 앞에 저를 발견하고 멈칫하고 서 있다가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닫히려고 하자 얼른 다시 버튼을 누르고 내린다.


여전히 얼어있는 정한의 어깨와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캐리어를 발견하고, 승철도 입술을 다물었다.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갔으면 싶을 정도로 정적이 계속되었다. 멍하게 시선을 내려 승철의 갈색의 운동화를 바라보던 정한이 더는 참지 못하고 캐리어의 손잡이를 잡으려는데, 승철의 손이 더 빨랐다.


캐리어를 잡으며 정한의 손 끝이 스치자 승철은 그날 떠나던 정한의 어깨를 잡아주지 못했던 것이 가장 멍청이 같은 짓이었다는 것을, 어떤 식으로든 제 옆에서 뭐든 말하도록 해야 했다는 것을 오늘에서야 깨달았다.

 



“오는 거야? 아니면 다시 가는 거야?”

“그게….”

“오는 걸로 해.”




분명히 오늘은 그날과 같지 않았다. 승철도 정한도, 그 누구도.


잡고 있던 캐리어와 보라색 우산을 빼앗듯이 들고 정한의 어깨를 붙잡아 문 안으로 밀어 넣는다. 정한은 얼떨결에 함께 집안으로 발을 들였다. 내리깐 시선이 자신이 두고 갔던 민트색 운동화에 가서 닿았고, 그제야 진짜로 돌아왔음을 실감했다.


캐리어와 우산, 그리고 승철의 손에 있던 편의점 봉투가 바닥으로 제자리를 찾듯이 떨어졌다. 바뀐 것도 없는 공간이 이상하게 낯설다고 느끼는데, 같이 현관 앞에 서 있던 승철의 손이 먼저 정한의 허리를 뒤에서 감싸 안았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숨을 참았다가 이제야 다시 숨을 쉬는 것처럼, 깊이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이 느껴졌다.


정한이 미처 대비하지 못했던 미안함이라는 감정이 밀려들기도 전에 승철의 감정이 먼저 쏟아져 내려 버렸다.




“남겨지는 건 이제 싫어.”

“… 응.”

“이제껏 너 좋을 대로 했으니까, 이번에는 나 하자는 대로 해.”

“…….”

“싫어도…, 일단은 견뎌봐. 나도 그랬으니까.”

“싫을 리가…, 없잖아.”

“그리고 그 후에는….”




나지막한 중얼거림을 이어가던 승철이 정한의 어깨에 입술을 묻은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익숙했고, 그리웠던 체향이 그대로 느껴졌다. 비어있던 마음의 공간이 무언가로 가득하게 차곡차곡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느릿느릿 가던 승철의 시간이 드디어 제 속도로 움직이는 듯했다.


여기 그대로 있겠다고 했지만 기약 없는 시간 동안 자신이 과연 그것을 견딜 수 있을지 승철 자신도 장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이 그뿐이라서 견디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안도감이 들었다. 많은 시간의 공백이 아니어서, 다시 채워지는 정도의 시간이라서. 너무나도 다행이었다.


그렇게 자신의 허리를 감싸 안은 승철이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그대로 있으니, 그 손을 곱게 덮으며 정한이 그 말을 이었다.




“그 후에는, 나 가야 되는 거야?”

“아니.”

“그럼 이번에는 네가 가는 거야?”

“아니, 그것도 틀렸어.”

“그럼?”

“그건 나중에…. 아주 아주 나중에 생각해. 지금은 그냥….”

“그냥, 뭐….”

“같이 밥 먹자.”

“그리고?”

“같이 못 본 영화도 보고.”

“또?”

“같이 자자.”

“그럼 내일은?”

“그건 내일 생각해.”




금방이라도 다시 뒤돌아 가버릴 것 같아서 꼭 붙잡고 있던 승철의 손은 한참 만에 겨우 떨어졌다. 여전히 손을 부여잡은 채 뒤돌아 본 그 얼굴이 너무 오랜만인 것 같아서 한참을 멍하게 보던 정한은 울컥 눈물부터 쏟아냈다. 기어이 ‘미안’이라는 말을 꾸역꾸역 꺼내려고 하자, 축축해진 두 볼을 동글한 손끝으로 꼭 쥔 채 승철의 입술이 먼저 그 말을 빼앗아가며 답했다.


난 괜찮아, 미안해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만큼 더 채우고 사랑하면 되니까. 넌 미안해하지 마. 절대로.


어떤 미안함도 절대로 둘의 사이에 끼어들 수 없도록, 따뜻하게 맞닿은 입술 사이로 계속해서 다정한 말들이 새어 나왔다.




“미안…, 으흑…, 내가….”

“네가 그런 생각하도록 만든 건 내 탓이니까. 그러니까 정한아, 그러지 마. 이제 우리….”




사랑만 해.


어느 날의 두 사람처럼 두근거리는 가슴이 여전해서 정한은 더 눈물이 났다. 새어 나오는 울음 사이로 계속되는 승철의 다정함이 좋아서 또다시 울컥했고, 맞닿은 입술이 또 짜릿하게 좋아서 어느 순간에는 웃음도 났다. 다정한 말들도 새어 나오던 미안함도 어느새 사라지고 두 사람은 현관 앞에서 한참이나 ‘이별 후의 사랑’을 음미하듯 나누었다.


인생은 반복적으로 벌어지는 모순적인 일상을 잘 버티는 것이라고 누가 그랬던 것 같다.  


…, 아주 모순되게도 이별 후에 더 열렬히 사랑하게 되었다.




-

매거진의 이전글 어쩌다 이별 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