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idcat혜진 Jun 10. 2022

세계와 세계, 그 끝에서 끝까지

| 징조: 모든 것은 모르는 사이에 가까이

-




창공을 날다 내려오는 빛들 사이로 재희가 있었다. 오랜만에 도착한 공항이 낯설었지만, 익숙하지 않은 설렘에 기분은 들떠 있었다.




“날 여기까지 데리고 온 이유가 있어야 할 거야.”

“인턴 시즌도 끝났다며. 지금은 휴가도 괜찮잖아.”

“이렇게 멀리 올 줄은 몰랐지.”

“그래서 싫어?”




캐리어를 끌고 얼떨떨한 표정으로 옆에 서있는 안젤로가 입술을 내밀더니 재희의 웃는 얼굴에 고개를 저으며 결국 웃어버렸다.




“그럴 리가…, 비행기표도 네가 사주고, 호텔도 예약해 줬는데. 나 여기서 엄청 많이 먹을 거야. 여긴 내 고향이니까.”

“난 좋아.”

“그런데 여기는 갑자기 왜 온 거야?”

“전시회 때문에 계약할 일도 있고, 또….”

“또?”

“나중에 알려줄게. 너 깜짝 놀랄걸?”

“네네. 어쨌든 비즈니스 때문에 온 거니까, 계산은 확실하게 해 주세요.”




재희의 의미심장한 웃음에 이번에는 같이 웃지 못하고 안젤로는 그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재희의 밝아진 모습이 그냥 좋았다. 그래서 들어줄 수 있는 부탁을 했을 때 기꺼이 그러겠다고 했는데, 갑자기 비행기를 타고 타국으로 오고 보니 과하다 싶은 생각도 들었다. 아무리 친한 사이지만, 1등석에 5성급 호텔을 예약하는 것이 당연한 재희를 따라서 여기까지 와 보니 그녀가 나이에 비해 가진 사회적 지위와 재력이 실감 났다.




“이거 예쁘다, 그치?”

“사진 찍어줄까?”




그런 것과 상관없이 공항 일부 벽면을 가득하게 채운 그래피티 아트가 마음에 들어 한참 그 앞을 떠나지 못하는 모습은 오래도록 알고 지내던 그 ‘J’가 분명했다. 얇은 원피스 차림으로 환하게 웃으며 벽면 앞에 가지런히 선채 사진 속에 있는 그녀는 안젤로가 늘 걱정하는 동생 같은, 혹은 누나 같은 그녀였다.

 

아직 공항을 빠져나가지도 않았는데 흔해 빠진 관광객처럼 보이니 공항 근처에 호객꾼들이 모여들었다. 안젤로는 익숙한 본토 언어로 그들을 훑어냈고, 예약해 둔 렌터카를 몰고 공항을 빠져나갔다. 호텔은 도심 한 복판에 있었는데, 한 번도 써본 적 없는 층의 넓고 화려한 룸 안에는 두 사람이 나눠 쓰기 충분한 방이 서너 개나 있었다.




“룸이 없었어. 불편한 건 아니지?”

“과분하지. 근데 성수기도 아닌데, 방이 없었어?”

“유명한 가수가 콘서트 때문에 방문했다고 들었어. 그것 때문에 주변에 가까운 국가들에서 팬들이 온 모양이더라고.”

“누구? 누가 온 건데?”

“어…, 몰라. 나도.”




짐을 정리하던 재희가 말을 머뭇거리는 사이 안젤로는 창밖으로 보이는 야경의 시작을 보며 낮은 휘파람을 불었다.  인턴 생활이 바빠서 그동안 취미 생활을 즐기지 못했는데, 이렇게 가까운 곳으로 유명한 가수가 콘서트를 온 것도 몰랐다니. 역시 현실은 이상과 달리 너무 가깝다. 조금만 나가면 바다가 있었다. 재희를 데리고 저녁을 먹으러 가야 하는데…,라고 생각하는 찰나 재희의 휴대폰이 울리더니 방 안에서 조용히 통화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비즈니스 관련인 건가 싶어서 안젤로는 자리를 비켜주려고 했다.




“어디가?”

“일 때문에 통화 중인 것 같아서. 안 비켜줘도 되는 거야?”

“응, 아니야, 괜찮아. 나가지 말고 있어. 이따가 같이 저녁 먹자.”

“어, 응.”




휴대폰을 든 채로 안젤로에게 가볍게 손짓을 하던 재희는 여전히 통화를 이어갔다. 대충의 내용도 알아들 수는 없었다. 그녀는 한국어로 이야기 중이었으니까.





“옆에 누구 있어?”

“응.”

“누구? 안젤로?”

“응. 어떻게 알았어?”

“…, 집에 같이 있는 거야?”

“집은 아니고, 이제 저녁 같이 먹으려고.”

“부럽네.”

“아직 저녁 안 먹었어?”

“아니. 그게 부러운 게 아니라. 아…, 됐어.”




낮은 목소리로 저 멀리서 퉁퉁거리는 모습이 그려진다. 재희는 소리 없이 웃다가 짐짓 모른 척하며 다시 물었다. 심장이 간질거리는 기분, 당장이라도 당겨 잡아주고 싶은 그 서늘한 손의 주인은 지금 생각보다 너무 가까이에 있었다.




“저녁 안 먹었으면 같이 먹을까?”

“뭐?”

“여기 룸서비스도 제법 괜찮다고 들었거든.”

“…, 뭐? 무슨 말이야?”

“27층 로비 엘리베이터 앞에 있을 수 있어? 내가 있는 층으로 오는 엘리베이터가 한 대 뿐이라서.”

“너 지금…, 여기 있는 거야?”

“안젤로한테 부탁할 테니까, 따라서 올 수 있겠어? 오늘이 무리라면 나중에….”




잠깐의 침묵 이후에 곧 무언가 우당탕 거리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옆의 누군가에게 두런거리는 소리가 잠깐 들리더니, ‘잠깐만 끊어봐. 잠깐이면 되는데, 암튼 이따가 다시 전화할게.’라는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통화가 끝났다. 문득 몇 년 전 제인이 사라지고 난 후 무작정 한국으로 향했던 그날이 떠올랐다. 아무런 계획도 없었지만, 무엇보다 보고 싶었던 누군가를 만나러 간다는 생각에 설렘으로 가득했었다. 비록 환영받지 못하더라도 괜찮다고 생각했던 그날의 ‘J’에 비하면 지금은 너무나 행복한 재희였다.


원래 계획은 콘서트가 끝나는 날에 연락을 하려고 했지만, 재희의 집에서 하루를 보낸 후의 원우는 시간이 날 때마다 연락을 해와서 요즘 거의 매일의 시간을 서로 공유하고 있었다. 말하지 않았다면 충분히 속일 수 있었지만, 목소리를 듣는 순간 보고 싶은 마음이 빠르게 번졌다. 고작 조금의 걸음을 옮기면 볼 수 있는 공간 안에 있으니 더욱 그런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건 자신의 욕심이었고, 스케줄이나 다른 여러 가지 이유로 어쩔 수 없다고 한다면 원래대로 미룰 생각이었다.


사실 이곳으로 왔지만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원우는 지금 그의 일을 하는 중이었으니까. 재희도 자신이 작업하는 동안 원우와의 만남을 미뤄야 한다면 그럴 수 있을까를 생각했지만, 자신과 원우는 다르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아주 당연히…, 재희와 통화를 한 원우는 지금의 만남을 미룰 생각이 없었다. 호텔방을 빠져나와 매니저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물론 먼 친척이 아주 어렵게 여기까지 왔다고 설명했지만…, 어쨌든 몇 시간 동안의 이동이 허락되었다. 그리고 재희가 말했던 27층의 로비 앞에서 사진 속에서 보던 그 남자를 드디어 봤다. 옅은 색의 셔츠와 반듯하고 편안한 바지를 입은 잿빛 눈동자의 라틴계 남자가 저를 보고는 한동안 눈만 깜박이고 있었다.


젠장. 급해도 신경 써서 입고 올 걸 그랬다.


리허설이 끝난 직후에 호텔로 올라온 거라서 샤워를 마친 후 침대에 누워 있었다. 재희의 연락을 받고 급한 마음에 안경을 대충 쓰고 손에 집히는 대로 편한 차림으로 온 것인데 얇은 반팔 티셔츠에 트레이닝 복 차림, 후드 집업을 뒤집어쓰고 얼굴을 대충 가리고 서 있다가 눈앞에 나타난 마주친 남자를 보니 떠오른 먼저 떠 오른 생각은 그것이었다.




“어…, 안녕…, 하세요.”




한편, 원우보다 더 당황한 얼굴로 서 있던 안젤로는 어설픈 한국어로 인사를 하더니 뻣뻣하게 굳은 어깨를 한 채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동안에도 한참을 멍하게 있었다.


재희의 부탁을 받은 후에도 사실 자신을 놀리는 줄로만 알았다. 자신이 재희의 방에서 유명한 가수의 뮤직비디오나 무대 영상을 볼 때도 재희는 옆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앉아만 있었으니까.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대 아닌 기대를 했는데, 세상에…. 숨을 겨우 내쉬던 안젤로는 제 옆에 나란히 서 있는 원우의 옆모습을 흘깃 보다가 다시 숨을 참았다.




“왔어? 주문은 내가 알아서 했어. 인사해. 서로 실물은 처음이지?”

“어떻게 된 거야?”

“이제 내가 갈 거라고 했잖아. 약속 지켰지?”




옅은 노란색의 반팔 원피스가 하늘거리고, 정말 눈앞에 재희가 있었다. 그렇게 예쁜 말을 하는 재희가…, 그것도 웃는 얼굴로 서 있다니…. 금방이라도 꼭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원우는 여전히 저를 바라보고 선 다른 남자의 시선이 거슬렸다. 아까부터 혼잣말처럼 낯선 언어가 반복적으로 나오고 있었는데, 감탄사인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자신이 어떤 기분이든 그래도 정식으로 인사는 해야 한다는 생각은 들었다. 힘들었던 재희의 옆을 자신과는 다른 형태로 지켜준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맙소사…, 진짜야…, 세상에….”

“원우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조금 전 문을 열고 들어온 두 사람의 모습이 너무나 비슷하면서도 상반돼서 재희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았다. 어쩌면 지금 자신과 가장 가까운 두 사람이었는데, 한쪽은 너무 긴장하고 있고, 또 한쪽은 너무 경계하고 있으니까.


원우의 인사를 제대로 전하자 안젤로는 그제야 참았던 숨을 겨우 내쉬고는 자신의 입을 막은 채 아직도 믿기지 않는지 J와 원우를 번갈아 보고만 서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J, 너….”

“그게…. 한국에 있는 내….”

“한국에 있는 너의 가족이 그럼….”




뭐라고 설명할지를 머뭇거리는 사이에 안젤로는 알아서 눈치를 챘다. 여전히 놀라움의 연속인 눈동자인데, 원우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그리고 무슨 생각인지 곧 아무 말도 않은 채 재희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나란히 섰다. 확실한 경계와 무언가를 선언하는 듯한 행동에 재희가 당황하는 사이에 안젤로는 또 더 커진 눈으로 저를 바라본다.




“뭐라는 건데.”

“아…, 사실은 안젤로 네 팬이야.”

“으응?”




음식이 오고 난 후, 식탁에 둘러앉은 세 사람은 그제야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원우는 자신이 없는 재희의 시간과 공간을 알고 있는 안젤로를 여전히 경계하는 것 같은 눈치였지만, 재희에게 안젤로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조금은 더 편안하게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래도 두 사람이 같은 룸을 사용하는 건 계속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다.




“어쩔 수 없었어. 너희 팀이 호텔을 거의 전세 내다시피 했던데?”

“다른 호텔로 갔으면….”

“오늘 못 만났을지도 모르지.”

“…….”

“같은 방도 아니고, 같은 침대는 더더욱 아니….”

“그런 말은 하지도 마.”




진심으로 정색을 하는 원우의 표정에 결국 재희는 어느 날의 소녀처럼 크게 웃어버렸다. 아무리 유치한 감정이라고 하더라도 이제는 그대로 드러내며 온 마음을 보여주는 원우가 좋아서 그만 웃음이 났다. 그리고 두 사람의 대화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안젤로는 샐러드 포크를 든 채 먹지도 못하고 두 사람만 빤히 보고 있었다. 재희가 상황을 간단히 설명하니 그제야 원우를 향해서 두 손을 내저으면서 억울한 표정을 짓는다. 원우도 알겠다며 이해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지만, 완전히 풀린 얼굴은 아니었다.


식사를 마친 후 가벼운 샴페인을 주문했다. 재희는 자신에게 더없이 소중한 두 사람 사이에 있어서인지 안정감을 느꼈다.


안젤로는 긴장감을 내려놓고 그동안 보여왔던 팬심을 여과 없이 드러내며 궁금했던 부분들을 질문했고, 원우는 자신을 좋아하는 그의 진심을 어느 정도 헤아리며 대답을 해주었다. 결국 지니고 다니던 앨범에 사인까지 받고 나서는 여전히 믿어지지 않는 얼굴로 한참 들여다보았다.




“영락없는 우리 팬이네. 내가 모르는 멤버 이야기까지 알고 있어.”

“그렇다니까?”

“확실히 한국보다는 남자팬도 제법 많은 것 같아, 여기서는.”




나란히 앉아서 맞은 편의 K-팝 팬을 바라보던 두 사람은 갑자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는 안젤로를 향해서 시선을 올렸다.




“나갔다가 올게.”

“어? 지금, 갑자기? 어딜?”

“친척들이 보자고 했어.”

“지금, 이 밤에?”

“응.”

“아니, 안젤로….”




갑자기 재희를 향해서 한쪽 눈을 찡긋하던 안젤로는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두 사람을 그곳에 두고 외출 준비를 하더니 순식간에 방에서 사라졌다. ‘아마 내일 아침에 올 것 같아! 혹시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라는 말을 남기자 재희는 갑자기 목에 열이 올랐다. 달칵,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함이 흘렀다. 얇은 샴페인 잔을 들고 있던 재희가 입술사이로 몇 방울을 넘기다가 문득 찾아든 갑작스러운 정적에 슬며시 잔을 탁자 위에 올려둔 후, 자리를 옮기려고 일어나는 찰나 원우의 손이 재희를 붙잡았다.




“저 친구 눈치가 빠르네.”

“어?”




어느새 재희의 허리를 감싸고 그대로 당겨 안으니 앉아있는 원우의 무릎 위로 얇은 몸이 안착했다. 순식간에 너무 가까이 밀착한 얼굴에 재희가 당황하여 상체가 뒤로 물러서는 순간 원우의 입술이 볼에 먼저 닿았다. 살짝 닿았다가 떨어지던 입술을 다시 따라붙어 여러 차례 입술도장이 찍혔다. 물러서려고 하던 재희의 몸도 그대로 꼭 붙잡아 제 품 안에 가뒀다.




“그만해….”

“싫은데.”

“…….”

“진짜 그만해?”

“…….”




진지하게 묻는 얼굴에 재희는 대답하지 못하고 있다가 무슨 생각인지 갇혀있던 품 안에서 손을 들어 원우가 쓰고 있던 안경을 천천히 벗겼다. 그리고 잠시 바라보다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그만하라고 해도 계속할 거잖아.”

“당연히.”




입술에서 입술로 웃음이 전달되었다. 샴페인 향이 은은하게 맺힌 입술 사이로 떨어져 있었던 그리움의 시간과 아쉬움을 주고받았다. 서로를 끌어안은 몸이 더 가까울 수 없을 만큼 점점 거리를 좁혔고, 지금 느끼고 있는 체온은 이제 누구의 것인지 모를 정도로 그렇게 한참이나 함께 했다.




-




“정말? 정말 한국으로 오는 거야?”

“네, 여기 전시회 준비가 끝나면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원우한테도 이야기했어? 원우도 너무 좋아하겠다.”

“네. 만났어요. 이야기도 했구요.”

“오기 전에 연락해. 데리러 갈게. 현우 씨랑.”

“정말 제가 같이 지내도…, 괜찮….”

“재희야.”

“네.”

“우리는 항상 환영이야. 언제나 여기는 네 집이니까.”

“…, 네.”




소녀처럼 좋아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혜숙은 오기 전에 선물을 준비해 두겠다고 했다. 지난번보다 치수가 변한 건 없는지 물어서 또 새 옷을 지어줄 모양이라도 생각했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그녀가 만들어준 옷을 입고, 함께 외출이나 산책을 하고, 저녁이면 하루를 이야기하는 자신의 모습이 상상되었다. 그런 평온하고 안온한 분위기의 삶이, 따뜻한 누군가의 저녁이 자신에게도 있을 수 있겠구나, 싶어서 재희는 갑자기 말을 잊었다.




“선 너머에 있는 건 뭔가요?”

“글쎄요. 뭐든 될 수 있겠죠. 자신이 가장…, 경계하는 무언가가 아닐까요?”




작은 전시회장은 상류층이 주로 방문을 하던 예전 장소와는 거리가 멀었다. 어딜 가도 흥겨운 음악소리가 나는 길거리와 그와 비슷한 분위기의 화려한 색채가 벽면에 가득 있는 거리. 그 골목들을 지나 한편에 자리 잡은 전시회장은 직원들조차 친근한 분위기로 업무를 했다. 조명을 확인하고 걸려 있던 그림을 보던 직원이 질문을 했을 때, 재희는 자신이 그린 그날의 감정을 떠올렸다.

 

재희의 시선에 있는 푸른 선 너머에는 행복이 있었다. 그리고 행복은 언제나 경계선 너머에 있었다. 그 경계를 넘어올 때는 항상 무언가가 뒤따라 와서 재희를 괴롭혔다. 이제는 그 불안함마저 떨쳐버리기 위해 확실하게, 아주 멀리 경계선을 넘어오는 것들을 허상이라고 주문처럼 되뇌었다.


이미 해리가 서류와 관련한 부분들은 처리를 해둔 상태였고, 안젤로는 근처에 두었던 차를 가지러 간 사이에 재희는 원우와 통화를 했다.




“일은 다 끝났어?”

“응. 이제 마무리만 하면. 넌?”

“난 이제 곧 시작.”

“잘해.”

“아쉽다.”

“뭐가?”

“네가 와야 되는데.”

“미안, 나도 일 때문에 온 거라서. 그리고 지난번에 한번 갔었잖아.”

“그때랑은 또 차원이 다르지.”

“시호도 그때 보다 더 멋있겠네?”

“그런 말 할 거면, 끊어.”




원우의 대답에 재희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밤에 다시 연락하겠다는 말을 끝으로 통화를 마치고, 다시 전시회장을 둘러보고는 밖으로 나오려는데.


펑!


어디선가 큰 소리가 났다. 재희는 자신도 모르게 그 자리에 주저앉으며 귀를 막았다. 순간, 한참 잊고 있던 꿈이, 아니 어릴 적 기억이 떠올랐다. 피비린내가 나던 그날 밤의 기억이. 제인이 죽을 때까지 가지고 있던 팔의 상처. 화약 냄새와 뼈까지 울리던 그 생경했던 소리. 그리고…, 또 마리아까지. 총을 맞고 자리에서 쓰러지던 그 순간 마리아는…, 마리아는 자신을 떠올렸을까.




“J!”

“…….”

“그냥 폭죽이야. 괜찮아? 놀랐어?”




저를 부축하는 안젤로를 보는 순간. 재희는 조금 전까지 웃고 있었던 자신이 견딜 수 없었다. 눈물까지 맺힌 재희를 보고 안젤로는 급히 차로 옮겼다.




“많이 놀랐어? 이 근처에서 작은 축제가 계속 있어서….”

“안젤로….”

“응. 뭐가 필요해?”

“내가…, 대체 뭐라고 사과하면 좋을까.”

“응?”

“난 왜…, 왜 이렇게 쉽게 또 행복해지려고 할까….”

“…….”

“나 때문에…, 내 주변에 있어서…, 그래서 죽…. 우읍….”




안젤로는 그제야 재희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눈물이 가득하게 고인, 패닉에 빠져서 제 팔을 꼭 붙잡고 있는 자신의 눈앞에 있는 그녀는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제 입을 한 손으로 틀어막으며 빠져나오려는 저주 같은 단어들을 구겨 넣고 있는 그 얼굴을 보며 안젤로는 마리아의 걱정스러운 표정이 먼저 생각났다.




“아니야, 진정해. 그런 거 아니야.”

“이렇게 쉽게…, 쉬우면……, 안….”

“쉿…, 쉿…. 괜찮아. 천천히 숨 쉬어 봐.”






재희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겨우 진정시키려는 안젤로의 손을 재희는 꼭 부여잡고 있었다. 눈물이 맺힌 커다란 갈색 눈동자를 바라보던 안젤로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곧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다.




“J.”

“나…, 나 때문에…. 내가 행복하면, 혹시 또 그러면….”

“J, 진정하고, 잘 들어.”

“안젤로…, 미안해, 미안…, 내가….”

“J!”



조금 크고 낮은 목소리에 재희는 조금씩 떨던 손을 놓지 않은 채 더듬거리던 말을 멈추었다.




“폭죽이 터진 것뿐이야.”

“…….”

“아무 일도 아니었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

“…….”

“이미 너무 많은 일을 겪었어. 그러니까….”





어제 잠깐 호텔을 나서며 그녀의 나이에 비해 가진 재력이나 사회적 명성을 잊고 있었던 자신이 생각났다. 하지만 그 보다 더 큰 많은 사건과 사고를 겪은 그녀를 이어서 생각했던 자신도 있었다.


제 키보다 한 참이나 작은 여자 아이, 여전히 소녀 같은 눈동자를 하고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몸집을 한 채. 불안함을 견디며 매일 밤을 견디며 사는…, 모르는 이들은 그녀가 가진 모든 것들을 부러워하겠지만, 사실은 아무도 부러워할 수 없는 사연을 가진…, 자신의 친구.




“그만 불행해.”

“…….”

“마음껏 행복해도 괜찮아.”

“…, 안젤로.”

“기뻐할 때는 기뻐하고, 슬플 때는 울어. 그리고 이제 모든 걸 네 탓으로 돌리지는 마.”

“하지만.”

“‘하지만’은 없어.”



우리 삶에서 ‘하지만’은 너무 많지 않은 게 좋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랑하고 살아가야 하니까.


네가 불행하게 지낸다고 해도, 그들은 살아오지 못해. 네가 죄책감을 가지고 평생을 지낸다고 해서 그들은 기뻐하지도 않을 거야. 그건 내가 장담해. 과거는 변하지 않고, 모든 것들에 후회가 뒤따른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은 이제 어쩔 수 없는 일일 뿐이야. 우리는 그래도 앞으로 나가야 하고, 살아가야 마땅하니까.



“그러니까, 제인과 마리아가 원하는 건 네가 불행하게 사는 게 아니야.”

“…….”

“어떻게든 행복해야 하는 거야.”




다독이는 손길과 다정한 말들이 재희를 감싸 안았다. 자신의 하나뿐인, 핏줄이 다른 형제. 어쩌면 뱃속에서 함께 하다가 불행하게도 태어나지도 못했던 자신의 또 다른 형제의 영혼이 그녀가 된 것은 아닐까…. 안젤로는 그런 생각을 하며 재희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꼭 안아주었다. 이제 떨리던 몸은 진정이 되었는지 재희는 얕은 숨을 내쉬며 안젤로의 팔을 꼭 붙잡고 있었다.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리고 그런 너의 행복에 분명히 나도 있을 거야.”

“…응.”




다시 울먹이는 목소리에 안젤로는 이제 정말 그만 울라고 말했다. 자신의 단 하나뿐인 특별한 친구 혹은 형제가 더 이상은 슬프지 않았으면 싶었다. 마리아도 분명히 그런 J를 바라고 있을 테니까.


다시 폭죽이 터졌다. 이번에는 재희도 크게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안젤로를 함께 꼭 끌어안아 주었다.




.

.

.


또 한 번의 징조가 지나갔다. 분명히 누군가의 선의가 그 징조를 앗아가 버렸지만, 일어날 일은 정확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

매거진의 이전글 세계와 세계, 그 끝에서 끝까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