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은 누군가의 첫사랑
/ 꿈에서 뭔가를 본 것 같은데, 눈을 뜨는 순간 사라지는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겁니다.
하루의 시작에서 그건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꿈이 당신의 영혼에 무언가가 깃들어 있는 순간을 표시하는 시작점일지도 모릅니다. /
“아, 졸려.”
“잠 못 잤어?”
“꿈을, 이상한 걸 꾼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나.”
“어차피 개꿈이야.”
“그런가.”
점심 급식을 너무 많이 먹었나, 더 졸리다.
운동장을 뛰어다니고 있는 기운찬 후배들을 보니 이제 이 학교를 떠날 시간도 곧 다가오는 것을 느낀다.
나 이제 늙었네, 늙었어.
“요즘 쟤 귀엽지 않냐?”
“금사빠 또 시작이야.”
“여름 방학 때 야구대회 나가서 우승했잖아. 그때 엄청 멋있었나 봐. 쟤 좋아하는 애들 진짜 많아졌어.”
“지훈이? 아, 쟤가 귀엽나? 난 잘 모르겠던데.”
“뭐야, 아는 사이야?”
“말 안 했나? 우리 학원 다니잖아, 쟤.”
“공부도 잘해?”
“우리 아빠가 운영하시는 학원이 공부 잘하는 애들이 다니던가.”
“아....”
“뭘 또 그렇게 빨리 수긍해 버리는 거야.”
금사빠 친구와 투닥거리는데, 담임선생님이 나타나서는 창문틀에 걸터앉지 말라고 잔소리를 시전 하신다.
아니, 저희도 이제 어엿한 고학년이고 졸업을 앞두고 있는 학생인데요, 위험한 행동은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따위의 말을 꾹 참았다.
졸업할 때가 다 되어가는 이 시점에 담임선생님이랑 적이 되어서 좋을 일이 뭔가.
착한 척 해, 착한 척.
오후 수업을 겨우 끝내고 하교를 하는 발걸음은 가볍고 좋지만 하교 길의 버스 정류장은 학생들로 미어터진다.
집까지 걸어갈 수도 있지만, 30분의 등산을 하는 건 별로 권하고 싶지 않다.
저 높은 언덕 아닌 언덕까지 올라가는 마을버스는 아슬아슬한 도로를 전문으로 하는 베테랑 기사님들이 운전을 하는데, 같은 마을버스를 타는 애들이 많으면 세 대는 정도는 보내야 한다.
아, 빨리 가서 숙제..., 아니, 자고 싶다.
결국 빼곡하게 차오른 조그마한 마을버스를 두 대 보내고 정류장 의자에 앉았다.
가을이라서 그런가, 어디서 단풍잎이 막 날아오네.
멍하게 지나가는 차만 바라보다가 신호가 어딘가에서 멈췄는지, 눈 앞 도로에 차들이 이제 많지 않았다. 맑은 하늘에 맞춰서 이어폰을 통해 흘러나오는 노래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곡이다.
단풍잎, 하나, 둘, 셋. 어...
“어, 머리에 단풍잎....”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귓가에 울리는 리듬에 맞춰서 누군가의 머리카락에 붙어있는 단풍잎을 가볍게 떼어주었다. 근데, 내가 지금 누구 머리카락에서 이걸?
“...어, 안녕하세요.”
“아, 어. 너였구나. 단풍잎이 머리에...”
이 누나 뭔데? 이런 표정인가. 미안하네, 내가 오늘 정신이 없다.
“.......”
“.......”
뭐지 이 어색함은.
하필 오늘 금사빠 친구가 말했던 이지훈이다.
평소에도 그냥저냥 아는 척만 하는 사이였는데, 그런 주제의 주인공이었다는 사실 때문인지 오늘따라 이상하게 더 어색하다.
나는 왜 넋을 놓고 단풍잎 따위를 떼어줬는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어색한 몇 초가 지나고 마침 마을버스가 왔다.
아, 다행이다. 아차, 아니지.
“... 여, 여기 앉아.”
“아, 네.”
하필 빈자리는 두 개. 옆자리에 앉았지만 할 말이 없다.
같은 곳에 내리고 탄다는 사실을 잠깐 잊었다.
얘도 우리 동네 사는데.
게다가 지금 시간이면 학원 가려고 이 버스 탔을 텐데.
숙제는 집에 가서 할까?.... 아니, 내가 왜?
여러 가지 생각이 오고 가다가 결국 서로 말 한마디 않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아빠가 운영하는 학원에 도착했다.
사실 말이 학원이지 동네에서 할 일 없는 애들이 와서 놀거나 숙제하는 쉼터 같은 느낌이다.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런데 우리 아빠지만 사업경영에는 영 재주가 없다.
오늘도 주인 없이 비어있는 원장실 탁자에 책을 대충 펼쳤다.
숙제가 뭐였지? 그런 생각을 잠깐 하다가 엎드려서 잤다.
-
그런데, 아까부터 자꾸 거슬리는 기타 소리.
저거 지금 코드는 맞는데, 뭔가 이상하네.
아, 조율이 좀 덜 된 거구나. 조율만 잘하면 완벽할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잠에서 깼다.
쉼터 같은 우리 아빠의 학원에는 악기도 많다.
기타, 피아노 외에도 클라리넷이나 플루트 같은 고가의 악기도 있다.
아무래도 집에 두면 사용 안 할 것 같으니까 가져다 두었는데 그걸 제대로 사용하는 학생이 있을 리 만무하다.
“아, 너구나.”
오랜만에 제대로 된 기타 소리를 따라서 문을 열었더니, 또 이지훈이다. 아, 나 오늘 얘랑 뭐 있나.
“그거 조율 좀 덜 된 것 같은데.”
“아, 네. 조율이 좀 어렵네요.”
“오래돼서 그래. 근데 제법 잘한다, 너.”
그러고 보니 여기 악기실은 오랜만이다.
기타 소리 때문에 왔지만 역시 피아노가 먼저 보였다.
3년 전에는 저 피아노가 우리 집에 있었다.
그때는 제대로 치는 사람이 집에 있었으니까.
“방금 했던 거 다시 연주해 줄 수 있어?”
“네? 아, 네.”
피아노 앞에 앉으니 새삼 나도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건반을 누르는 손가락이 낯설다. 내가 연주하는 속도에 맞춰서 기타가 천천히 연주되었다.
뻣뻣하던 손가락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곧 제 자리를 찾아갔다.
음악은 참 좋은 거라고, 엄마가 그랬다.
초등학생이 보기에는 그냥 피아노 앞에 앉아있는 엄마가 멋있어 보일 뿐이었지만,
그럼에도 그 기억이 너무 좋아서 한 참을 그리워해야 했다.
이제는 절대로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나버린 엄마, 그래서 더는 존재할 이유가 없었던 피아노.
지금도 어른들은 내가 어려서 걱정된다고 말하지만, 확실히 그때보다는 많이 좋아졌다.
이렇게 피아노 앞에 앉아서 연주도 하고, 또.... 또....
“누, 누나? 왜 그래요?”
남들 앞에서 한 번도 보인 적 없었던 눈물이 나는 것을 보면 말이다.
피아노는 다시금 정적을 얻었고,
나는 3년 만에 처음으로 울음을 터트릴 수 있었다.
-
“너 어디 가서 말하면 안 된다?”
“.......”
“대답 안 해?”
“아, 말 안 해요. 어디 가서 이런 걸 말해.”
“너 지금 나한테 짜증 낸 거냐?”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좀 괜찮아... 요?”
건네주는 곰돌이 그림의 티슈를 받아 들고 보니 현실이었다.
한 참을 울고 나니 마음이 가라앉았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이렇게 많이 울었던 기억이 없다.
그런데, 나 오늘 진짜 좀 이상한 것 같다.
왜 얘 앞에서 이렇게 편하게 울고 있었지?
“너 저기 좀 보고 있어.”
“예?”
“코 좀 풀 거니까.”
“아....”
훌쩍거림이 멈추고 나니 저 꼬맹이 앞에서 펑펑 울어버린 것이 좀 창피하다.
다 저놈의 기타 소리 때문이다.
뭐에 홀린 듯이 와서는 몇 년 만에 피아노 앞에 앉아서 연주하다가 울어버리다니.
나 오늘 진짜 뭐 있나.
미간을 찡그리며 세차게 코를 풀다가 나를 빤히 쳐다보는 녀석과 시선이 마주쳤다.
“뭘 봐. 저리 보고 있으라니까. 창피하게.”
“코는 그렇게 우렁차게 풀면서.”
“아....”
“이제 좀 괜찮아 보이네.”
“절대로 말 안 하는 거다?”
“안 해, 안 한다고.”
“그런데 너.”
“.......”
“지금 은근슬쩍 반말한다?”
꼬박꼬박 하던 존대가 사라져 있었다.
이제 내가 만만한 거냐? 울보 누나라 이거야?
그것보다 이 녀석 조금 전과는 자세가 달라진 것 같기도 하고,
뭔가 분위기가 달라진 것 같기도 하고.
“... 반말하면 안 되나.”
“혼잣말한 거야 아니면 물어본 거야?”
지그시 바라보던 눈을 살짝 내리깔더니 작게 투덜거리며 입술마저 삐죽거린다.
분명히 아직 어린애가 맞다.
맞는데, 좀 귀엽기는 하네.... 어머, 나 뭐래.
“누나 운 거 얘기 안 할게. 그러니까 이제부터 반말할래.”
“뭐야, 그 맥락은.”
분명 몇 시간 전과는 다른, 상당히 도전적인 눈빛이다.
얘 원래 이런 성격이었나. 수줍은 ‘소년 미’ 아니었나?
아냐, 난 금사빠랑 다르지. 달라.
저 쪼그만한 녀석을 내가 몇 년째 봤는데, 그러니까...
“그리고 나 누나 좋아해도 되지?”
내가 얘를 갑자기 좋아하는 건 아니라는 말씀이다.
맞다, 나 그렇게 쉬운 사람 아니라고.... 그런데 뭐, 뭐라고?
“나 그냥 누나 좋아할래.”
“야. 너....”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는 일방적 고백 앞에 할 말이 없다.
“그러니까 내 앞에서는 울어도 된다고. 절대로 말 안 할 거니까.”
“........”
기타를 고쳐 쥐고는 조율을 하는 뽀얀 손이 조금 떨리고, 귀 끝이 빨개진 것 같지만 모른 척했다.... 근데, 나 방금 뭔가 심장이 내려앉은 것 같기도.
“좋아하는 사람이 싫어하는 짓을 누가 하겠어. 안 그래?”
조율을 다 했는지, 다시금 시작되는 기타 선율은 처음 드는 곡이었다.
아니, 곡명을 굳이 붙인다면. 그건....
첫사랑,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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