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업무 수행
신, 절대자, 창조주 등등.
인간 세계에서 그를 뭐라고 부르든 상관없다.
내가 봤을 때 이 곳에서 0 번의 그 혹은 그녀는(뭐든) 그저, 꼰대다.
‘꼰대’라는 말을 처음 알았을 때, 내가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0 번이었으니 확실하다.
‘신이 어디든 존재할 수 없어서 어머니라는 존재를 만들었다’고 했던가.
아니다.
분명히 말하는데, 0 번은 업무를 (미루기) 위해 우리를 양성했다.
인간 세계가 의식주만 해결되던 그때는 혼자서 업무를 처리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보시다시피 그럴 수가 없다.
그래서 만든 것이다. 우리, 바로 ‘대리’, 수많은 ‘대리자’.
대리라는 직급을 나타내는 말은 인간 세계에도 있지만, 우리가 쓰는 ‘대리’는 말 그대로다.
0 번의 업무와 책임을 나눠지고, 그가 할 법한 일들을 ‘대신해서 수행’한다.
인간 세계는 제법 복잡해지고 발전(퇴보)이라는 것을 거듭했는데,
그에 따라서 우리가 할 일도 많아졌고, 부서도 세분화되었다.
‘부서’라는 말이나 ‘팀’이라는 말을 쓰는건 인간 세계와 비슷하게 보이기 위함이다.
사실 0 번은 자신이 만들어 둔 인간 세계를 너무 좋아(집착)한다.
숫자, 기호, 기본적인 언어 체계까지 우리가 연수를 하면서(졸면서) 보고 듣던 모든 것들은 인간 세계를 더 이해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런 조직 체계까지 비슷해질 필요는 없었는데.
불필요한 요식행위까지 버젓이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을 보면 0 번은 정말이지 인간 세계 따라 하기에 진심이다.
0 번이 혼자 업무를 처리할 때는 인간 세계가 기근일 때 함께 굶고,
전염병이 돌 때는 자신에게 비슷한 고통을 줘가며 업무를 했다는 것을 자랑삼는데, 그건 그때의 일이지 않은가.
소위 요즘 인간들이 말하는 ‘라떼 이즈 홀스’를 시전 하면서 대리들에게도 그런 업무 수행을 강요한다.
그러니까, 확실히 0 번은 꼰대가 맞다.
“첫사랑 예비자가 아니라, 그러니까....”
“상대자에게 깃들 겁니다.”
“그런 적은....”
“없었으면 지금부터라도 하면 되죠. 업무의 효율을 위해.”
[첫사랑 전형]과로 부서를 이동하고 처음 수행하는 업무에서도 방향을 수정해서 보고서를 올렸더니 역시 바로 윗선의 연락이 왔다.
“상대자에게 깃든다고요? 예비자가 아니라? 그렇게 진행한 적은 없었는데요.”
“이미 관계도 및 성향 파악을 해 둔 상태입니다. 예비자는 상대자를 첫사랑으로 마음에 둘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냥 확실한 뭔가가 필요할 뿐이죠.”
“그렇게 자신한다면, 뭐. 부서 이동 후 첫 업무 수행이니 기대하겠습니다.”
윗선은 흥미롭다는 듯이 나를 보더니 곧 어딘가로 다시 연락을 했다. 그리고 곧 업무 시작이 승인되었다.
/ [첫사랑 전형]과 기획팀 171713 대리 님의 업무가 시작됩니다.
요청하신 [은행잎] [곰돌이 티슈] [악기:조율이 필요한 기타] [그 외의 필요 소품]의 병렬 협조가 승인되었습니다.
현재 171713 대리님의 업무 기안은 상신 진행 중입니다.
최종 결재까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업무의 완벽한 수행을 기원합니다. /
인간들의 수많은 선택 속에서 어떻게 우리가 그들의 미래를 모두 예측할 수 있겠는가.
정해진 것이 아닌 수많은 선택지가 있는 인생이라면 인간 하나에 수많은 ‘가능성 파일’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그들의 ‘가능성 파일’을 살펴보고 각 부서의 역할에 맞춰 열심히 궁리한다.
장래 희망(자주 변경됨), 성향, 성격, 어린 시절이나 인생의 주요 사건 등등을 보는데,
특히 우리 부서에서는 인간관계에 주목한다.
물론 수많은 선택지가 있다고 했지만 그래도 이미 정해진 큰 흐름은 있다.
0 번은 인간에게만큼은(대리에게는 아니지만) 그렇게 무책임한 관리자가 아니니까.
가족관계나 친구 관계, 미래에 만나게 될 인물까지 파악하면서 가장 큰 흐름이 되는 파일을 최우선으로 살핀다.
인간 하나를 살펴볼 때 소용 돌이 같이 떠있는 셀 수 없는 정보들 사이로 내가 수행할 업무에 필요한 부분만 찾아내야 한다.
절대로 거스를 수 없는 큰 흐름에 맞추되 각 자의 부서 역할에 맞는 시점과 장소, 인물 등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다른 부서와 충돌을 최대한 피하면서 자신의 업무가 시작되면 꼭 이루어져야 하는 인생의 중요한 사건을 예비자에게 만들어줘야 하는데, 필요하다면 어떤 선택을 하도록 암시를 주거나 무의식에 자극을 주기도 하여 큰 흐름의 방향으로 나가도록 유도한다.
이것이 바로 0 번이 업무 수행을 위해 부여해준 ‘권능’이다.
“꿈을, 이상한 걸 꾼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나.”
/ 예비자가 아닌 상대자의 꿈은... 온통 슬픔이었다. 그래서 아직 어린 그녀가 가장 좋아하던 것들로 채워줬다. 꿈은 어릴 때 엄마와 함께 듣던 음악이 가득하도록. 상대자의 약점을 이용하는 것이라 할 수 있지만, 나의 업무 수행은 어디까지나 첫사랑을 앞두고 있는 예비자를 위한 일이다. /
“어, 머리에 단풍잎....”
/171713 대리님 요청하신 [은행잎]은 지역의 특성과 맞지 않는 관계로 [단풍잎]으로 대체되었습니다.
뒤늦게 요청을 확인하여 대체 사항에 대해 제대로 공지 못한 점 사과드립니다.
업무 수행에 지장이 있으셨다면 피해 사항 보고서를 부서 간 항의 서한 발송으로.... /
어쩐지 분명히 요청 사항은 [은행잎]이었는데. [단풍잎]은 색이 너무 애매하다.
노란색은 앞으로 예비자가 무의식 중에 첫사랑을 떠올릴 색으로 지정해뒀는데, 어쩐다.
소용돌이치는 예비자의 파일들 사이로 예비자와 상대자 주변의 지형과 지물을 빠르게 다시 파악해야 한다.
꽤나 큰 항구 도시라.... 그럼, 반짝거리는 야경을 함께 보는 상황도 좋을 것 같다.
이렇게 추가 기획을 하면 ‘우연’을 가장하기 위한 권능이 한 번 더 필요할지도 모르니, 추가 결재가 필요하다
아, 진짜... 한 번에 처리할 수 있었는데.
‘그런데, 아까부터 자꾸 거슬리는 기타 소리.
저거 지금 코드는 맞는데, 뭔가 이상하네.
아, 조율이 좀 덜 된 거구나. 조율만 잘하면 완벽할 텐데.’
/ 나의 권능으로 그녀의 죽은 엄마를 불러주는 일은 할 수 없다. 다만 잊었던 피아노를 칠 수 있도록 무의식을 유도했다. 그래야만 그곳에서 기타를 치는 예비자와 만날 수 있으니까. /
“나 그냥 누나 좋아할래.”
/ 다행히 큰 변수 없이 고백까지 해버린 예비자. 고백을 하지 않더라도 업무 수행이 성공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만, 누가 보더라도 [첫사랑 전형]에 딱 걸맞은 전개였다. /
부서이동 후 첫 업무라서 예전에 업무에 비해서는 순수함에 치가 떨릴(?) 정도지만, 풋풋하다고 표현해야 마땅할 예비자의 첫사랑은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업무 수행이 성공적이니, 최종 결재가 승인되면 그의 인생 파일에서 몇 안 되는 중요한 시점으로 기재될 것이다.
“아, 역시.... 첫사랑이란.”
예정된 소용돌이 속에서 예비자와 상대자의 미래가 살짝 보였다.
물론 상대자의 첫사랑은 예비자가 아닐 수도 있다. 이번 결재 건은 어디까지나 예비자만을 위한 거니까.
하지만 상대자도 자신이 누군가의 첫사랑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제 알게 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첫사랑은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그 말까지, 이번 예비자의 [첫사랑 전형]은 완벽하다.
가장 중요한 점은 지금의 이 기억으로 예비자는 자신의 꿈을 확실하게 변경하게 된다.
그리고 실제로 그 꿈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싱어송 라이터로 활약할 그의 미래가 큰 흐름으로 너무나 선명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의 음악은 많은 위로와 행복을 주면서 인간 세계에서 선순환의 일부가 될 것이 분명하다.
/ [첫사랑 전형]과 기획팀 171713 대리 님의 업무 기안이 윗윗윗선에서 현재 상신 진행 중입니다. /
다시 말하지만, 이 곳은 쓸데없는 요식행위가 너무 많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