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도 모르는 당신의 첫사랑
/ 삶에서 절대로 거부할 수 없는 무언가를 마주하는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돌아보면 결국 모든 일들은 당신의 선택이라는 걸 알 수 있을 겁니다. /
주저앉아있기 싫었는데, 오늘은 조금 힘든 날이었다.
뭔가 잔뜩 묻은 손을 대충 털며 바지 주머니를 천천히 뒤진 남자의 손에 담배 하나가 잡혔다. 한 개비를 입가에 물고는 있었지만 불은 붙이지 않았다. 라이터를 찾을 생각도 없이 그저 뒷골목으로 희미하게 비집고 들어오는 네온사인 불빛에 흩어져 내리는 빗방울을 바라만 봤다. 휘황찬란한 술집의 간판과 네온사인과는 달리 그 뒷면은 어둡고 빗방울을 간신히 피할 수 있는 조립식 처마가 전부였다. 뒷골목의 새벽어둠을 틈타 뭔가가 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었지만 별로 개의치 않았다.
“아, 깜짝이야. 누구?”
뒷문이 살짝 열리더니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남자가 고개를 들어 살짝 올려다본 시선의 끝에 짧은 치마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아, 오빠 혹시 새로 온 웨이터야?”
“.......”
“흐음, 많이 힘들었던 모양이네요. 불 줄까요?”
남자는 대답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버렸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그저 떨어지는 빗방울만 보는 남자에게 여자는 곧 흥미를 잃었다. 메고 있던 손바닥만 한 자그마한 핸드백에서 뭔가를 꺼내 곧 입에 물었다. 담배인가 했는데, 막대 사탕이다. 여자도 내리는 빗방울만 바라보다가 건물 사이로 돌풍 같은 바람이 불자 몸을 움츠렸다. 세찬 바람에 여자의 긴 머리가 날렸다.
“아, 추워. 이제 들어가야....”
움츠린 여자의 어깨에 남자의 정장 외투가 걸쳐졌다. 남자는 이미 누군가와 통화를 하면서 뒷문을 열고 다시 들어가는 중이었다.
“뭐야, 저 오빠.”
비가 내리는 새벽은 여자의 얇은 옷으로 버티기에 너무 추웠다. 못 이긴 척 남자가 걸쳐준 겉옷을 대충 추스르고 보니 소매 끝에 거뭇거뭇한 것이 묻어있었다. 뭔가 싶어서 자세히 보니 핏자국 같은 것들이 보였다. 깜짝 놀라 미간을 찡그린다. 어스름한 새벽 뒷골목에서 한 번 봤을 뿐이지만 누구든지 기억할 수 있을 정도의 외모였다. 내일 출근하면 고맙다고 말하며 돌려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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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여자가 겉옷을 들고 찾아간 웨이터 대기실에는 그가 없었다. 당연했다. 그는 새로 온 잘 생긴 웨이터가 아니라 새로 온 잘 생긴 사장님이었다. 그것도 이 지역을 관리하는 조직에서 제법 높은 임원.
잘생긴 얼굴에 조직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날렵한 몸매, 하지만 타고난 운동신경과 오랜 싸움 경험으로 여전히 위험한 현장을 나가는 특이한 임원. 몸만 쓸 줄 아는 것이 아니라 사업 수완도 뛰어나서 조직의 차기 보스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남자.
거기까지가 그녀가 대기실에서 하루 만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어쩐지, 비싼 옷이 더라니....”
남자는 전 날의 일들을 정리하도록 지시한 후 어제 그 술집으로 다시 갔다. 매니저에게 가게의 매출과 영업실적 같은 것들을 보고 받고 있는데, 룸 안으로 여자 하나가 빼꼼히 고개를 내밀더니 들어왔다. 매니저의 눈이 동그랗게 변하며 손을 내젓는데, 곱게 쇼핑백을 소파 끝에 내려두고는 인사만 꾸벅하고 다시 나간다. 매니저가 나가고 난 후 쇼핑백을 열어본 그는 다시 매니저를 불렀다.
“아까 걔 좀.”
“아, 걔가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애라서 실수를....”
“그냥 불러주면 돼. 그리고, 술도.”
“아, 네....”
바짝 긴장한 매니저가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자가 들어왔다. 문 앞에 서 있더니 테이블의 세팅을 보고는 곧장 남자의 옆에 앉았다. 처음에 교육받은 대로 잔에 얼음을 먼저, 그리고 술을 따르고는 남자 앞에 두었지만 남자는 그걸 잡을 생각도 마실 생각도 없어 보였다.
“안 드세요?”
“옷은 그냥 버려.”
“비싼 거던데.”
“피 묻은 옷은 못 입어. 세탁해도 피 냄새가 나는 것 같아서.”
“그럼 제가 가져도 돼요?”
“그러든가.”
“그 말하려고 부르신 거예요?”
“.......”
“사장님, 아니, 오빠 되게 특이한 거 알죠?”
“.......”
“근데 우리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아요?”
“글쎄.”
질문을 던져도 대답이 없던 그의 관심을 드디어 얻었다. 그제야 테이블 위의 마시지 않은 술잔만 보던 눈이 여자에게 향했다.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제대로 볼 수 있게 되자 여자는 자신도 모르게 ‘흡’ 소리를 냈다.
“대박.”
“.... 왜?”
“오빠, 정말 잘생겼다.”
“........”
“아니, 예쁘고 잘 생겼어.”
“하하하....”
잠시 멈칫하던 남자의 눈이 살짝 휘더니 입꼬리가 어색하게 올라갔다. 마치 오랜만에 웃어서 표정을 어떻게 지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내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웃으면 더 잘생겼는데, 왜 안 웃어요. 난 잘 생긴 사람 진짜 좋은데.”
“그래, 잘 됐네.”
“네?”
“이름이 뭐야?”
과일을 집어 먹던 여자의 손이 멈추자, 남자가 다시 한번 웃었다. 아까와 비슷한 어색한 웃음이지만, 이제 조금은 편해 보였다.
“혜리요.”
“본명?”
“... 에이, 예명인 거 알잖아요.”
“그럼 본명은?”
“사장님은 얼마든지 알 수 있잖아요. 그게 왜 궁금해요?”
“내가 아는 누구랑 닮아서.”
“누구요?”
“... 첫사랑.”
자기가 방금 호구한테 쓰는 멘트 했다고 사장님도 그런 멘트 하는 거냐고, 여자가 먼저 웃었다. 그러자 남자는 조금 전보다 더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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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죽고 엄마는 도망가고 그래서 보육원에 맡겨진 그저 그런 이야기는 안 할 거라고 했다. 먹을 거 하나에 얼마나 서러웠는지 돈을 벌고 가장 먼저 한 일은 딸기 케이크를 산거라고 했다. 그래서 지금도 가장 기분 좋은 일이나 우울한 일이 생기면 케이크를 사 먹는다고 했다. 남자는 그저 여자의 이야기를 몇 시간 동안 듣기만 한다.
“그런데 오빠.”
“응.”
“내가 정말 첫사랑이랑 닮았어?”
“.... 아니. 이제 보니까 안 닮았네.”
“피이.... 보나 마나, 나 보다 못생겼을 거야.”
“그럴지도.”
침대에 누운 채 자꾸만 말을 거는 여자가 귀찮을 것 같은데도 눈을 감은 남자는 꼬박꼬박 모두 대답을 해준다. 예쁘고, 잘 생긴 얼굴. 그 속에 읽기 어려운 표정. 여자의 손끝이 남자의 얼굴 여기저기를 쿡쿡 찌르다가 코끝에서 이마 끝까지 가로지른다. 간지러운 듯 미간을 찡그리던 남자가 여자의 손을 잡아 부드럽게 자신의 가슴 위로 올렸다.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두근거림이 서로에게 전염되는 기분이다..... 이러다가 정말 사랑이라도 할 것 같다.
“돈 벌면 뭐하고 싶어?”
“나? 난 어릴 때부터 케이크 만들고 싶었어.”
“... 케이크?”
“돈 벌면 제빵학원 다닐 거야.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거 많이 만들어서 먹고, 팔고.”
“좋네. 케이크 만드는... 혜리.”
“내가 제일 처음에 만든 케이크는 오빠 줄게.”
“... 그래.”
눈을 뜨며 대답을 하는 남자의 얼굴에 웃음이 보였다. 가슴 위에 올려둔 여자의 손이 따뜻하다 못해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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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무슨 말이에요?”
“글쎄. 그게.... 사장님의 지시라서.”
“이렇게 갑자기....”
자신의 짐이 모두 카운터에 나와 있었다. 갑작스럽게 해고 통지를 받은 여자는 정신이 없었다. 분명히 그저께 헤어질 때까지만 해도 웃으며 손을 흔들던 그였는데.
“너 사장님한테 잘 못 한 거 없지?”
“그럴 리 없잖아요.”
“그럼 일 그만하라고 그러시는 거겠지. 너 이제 팔자 핀거야.”
“그게 무슨.....”
멍하게 자신의 짐을 들고 가게를 나섰을 때, 늘 사장의 옆에서 수행비서처럼 따라다니던 남자가 나타나 주차되어있던 자동차의 뒷 문을 열었다.
“오, 오빠한테 가는 거예요?”
“타세요.”
늘 만나던 호텔 일거라 생각했는데,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도착한 곳은 도심 외곽의 주택이었다. 거실에 앉아있는 남자를 보자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하지만 곧 다시 불안했다. 잘 정돈된 마당과 넓고 깨끗한 집. 이쯤 되면 같이 살자고 청혼이라도 할 것 같은 분위기지만 여자는 불안함에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어떻게 된 거야. 이게 무슨....”
“마음에 들어?”
“어? 아.... 마음에 들기는 하는데.”
“다행이네. 급하게 구한 건데.”
“오빠.”
“위자료 정도로 생각해.”
“... 무슨 말이야?”
무표정한 남자의 얼굴이 그녀를 향했다. 그 와중에도 얼굴에 난 상처가 거슬렸다. 저 예쁘고 잘생긴 얼굴이 또 어디서 다친 걸까. 그저께까지 분명 없었는데. 왜, 왜.....
“앞으로는 볼 일 없을 거야.”
“무슨 소리냐고!”
“혜리야.”
“.......”
“그만 만나자는 말이야.”
“.......”
“사실 우린 어디서 본 적도 없고.”
남자가 차분하게 거실 탁자 위에 올려두는 돈 봉투. 드라마나 영화에서 봤을 때는 저걸 받지 않으면 멍청한 거라고 생각했었다.
“넌..., 내 진짜 첫사랑도 아니니까.”
돌아서는 남자를 잡아야 했다. 여자의 생각은 분명히 그래야 한다고 하는데, 몸은 전혀 움직일 수 없었다. 자신을 다정하게 잡아주던 그 손이 매정하게 뿌리칠까 봐 두려웠다. 자신에게만 보여주던 따스한 눈길이 식어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너무 무서웠다.
버림받는 것, 헤어지고 남겨지는 것은 수도 없이 해 왔는데. 그렇게 많이 버림받아봤으니 이런 헤어짐 따위 익숙해져야 마땅할 텐데 절대로 익숙해지지 않는..., 이미 넘쳐흘러서 주워 담을 수 없는 미련한 감정들....
한걸음 한걸음. 멀어지는 남자의 저 걸음이 얼마나 무겁고, 무서운지.
현관문이 닫히고, 대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것을 거실의 창으로 멍하게 바라보던 여자의 울음소리를 누군가는 들었을지....
- 오래 전의 그 어느 날
“이름이 뭐야?”
“혜리, 이혜리.”
“혜리는 케이크를 정말 좋아하는구나.”
“응! 세상에서 제일 좋아!”
자신이 양보한 케이크를 열심히 먹고 있는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했다. 입가에 잔뜩 크림을 묻힌 여자아이가 행복한 얼굴로 대답한다.
“오빠는 이름이 뭐야?”
“난....”
“나 오빠 좋아.”
“응?”
갑작스러운 7살의 당돌한 고백에 당황한 얼굴의 소년이다.
“오빠는 예쁘고 잘 생겼어. 그리고 케이크도 주고.”
“아, 아하하하. 그래. 고마워.”
“오늘부터 내 오빠 해. 다른 애들 오빠 하지 말고.”
“그럼 이제부터 정한 오빠라고 불러.”
“정한 오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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