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와 세계, 0에서 1까지

| 특이 전형 업무

by Kidcat혜진




업무 수행 중 가끔 특이 전형이 발생한다.
인간이 자신의 첫사랑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지나가는 경우.
분명 기획대로 성립이 되었지만, 예비자 자신이 스스로 [첫사랑 전형]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이다.
아주 어릴 때라서 그 감정이 모호하여 업무 수행 기안을 상신하는 과정 중 자체적으로 결재가 취소된다.
이런 전형을 담당하는 대리의 입장은 상당히 난감한데, 이 경우에는 [첫사랑 전형] 기획을 다시 할 수 있다.
나름의 융통성을 주는 것인데, 방금 설명한 경우 외에도 자체적으로 결재가 취소되는 경우가 또 있다.
바로 예비자가 이런 기획된 [첫사랑 전형]을 철저히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이다.



“아, 아, 안 돼!”



이렇게 새로 마련한 기획조차 제대로 수행되지 못하고 실패하게 되면 보고서는 다시 자체 결재 취소 후 반려함으로 되돌아온다. 분명 이번 기획은 그의 인생 파일에 남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림도 없었나 보다.



“큰일이네. 이러다가... 정말....”
“블랙 뜨는 거 아니야?”
“벌써 두 번째야. 근데 이번에도 안 되네.”



꽤나 공을 들였던 기획은 상대자가 예비자의 돈을 훔쳐 달아나는 바람에 끝이 났고, 한 달 전에 기획한 이번 기안은 예비자가 철저히 기획과 반대되는 선택을 해 상대자가 결국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았다.

이대로면 그의 인생 파일에는 ‘블랙’이 남는다. ‘블랙’이란, 이미 0 번이 처음부터 설정해 둔 가장 큰 흐름의 파일에서 반드시 있어야 할 사건이 비어진다는 뜻이다. 시점을 정확하게 지정해 둔 것은 아니지만 마치 인생 중 꼭 있어야 할 그 공간이 비어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건 시말서 한 두장으로 절대 끝나지 않는다.



“어떡하지.”



해바라기의 꽃이 축 쳐진다. 인간 세계에서 꽤나 익숙한 모양의 곰돌이 푸가 그의 줄기를 다독여 준다.

대리들은 물리적으로 혹은 시각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변형할 수 있다. 굳이 그런 식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대리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대리들은 자신의 이상향이나 혹은 인간 세계에서의 즐거운 경험 같은 것들(뜬금없는 것도 있지만)을 반영하여 모습을 드러낸다. 물론 모습이 겹치는 경우도 있겠지만, 어차피 대부분은 자신의 자리에서 벗어나는 일이 거의 없고, 장난감 블록처럼 연결된 대리들의 자리는 수를 셀 수도 없다.

같은 [첫사랑 전형]과 라도 대리들 서로가 노력하지 않는다면 아는 체를 하기는 어렵다. 업무 상 자주 보는 사이가 아니라면 같은 팀이라도 계속 모를 수 있다. 다 아는 사이지만, 다 알 수 없고, 모두 서로의 존재를 알지만 굳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다시 한번 기획하면 되잖아.”
“그래야 하는데, 시간이....”



초조해하는 해바라기의 꽃잎 중 하나가 떨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 부분만 수정해서 다시 올리는 것이 좋을 것 같네요.”
“에, 네? 어!”



해바라기 꽃잎 사이로 갑자기 인간과 같은 손이 나타나더니 소용돌이치는 예비자의 파일들을 건져 냈다.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 그리고는 202117 대리의 반려함에서 자체 결재 취소된 보고서를 빠르게 수정하더니 말릴 겨를도 없이 바로 승인 요청을 해버린다.



/ [첫사랑 전형]과 기획팀 202117대리 님의 업무가 시작됩니다.
요청하신 [피 묻은 재킷] [딸기맛 막대 사탕] [생크림 케이크] [날씨: 돌풍, 비] [그 외 소품들: 징조]의 병렬 협조가 승인되었습니다.
현재 202117 대리님의 업무 기안은 상신 진행 중입니다.
최종 결재까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업무의 완벽한 수행을 기원합니다. /



“무슨 짓입니까?”
“업무를 도와드린 겁니다. 감사인사는 됐습니다.”
“하지만, 이건.”
“뭐가 잘 못 되었습니까?”



171713 대리는 남자도 여자도 아닌 애매한 인간의 형상으로 무표정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171713 대리의 얼굴을 보던 해바라기는 큰 줄기를 흔들면서 씨가 떨어져 나갈 듯 세차게 대답했다.



“이렇게 진행하면 예비자는....”
“죽겠죠.”



아무런 감정 없이 서늘하게 떨어지는 그의 대답에 안 듣는 척 듣고 있던 주변 모든 대리들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알면서 그런 겁니까?”
“202117 대리님. 우리 팀은 뭘 기획하죠?”
“[첫사랑 전형]입니다. 하지만, 이건....”
“그의 진짜 첫사랑은 저 상대자가 맞습니다. 그렇죠? 그런데 뭐가 문제죠? 어릴 때라서 인식하지 못하고 반려되었던 보고서를 다시 수정해서 상신하는 편이 가장 효율적입니다. 게다가 지금 시점에서는 그의 좁은 인간관계에서 절대로 새로운 상대자를 찾기 힘들죠.”
“... 하지만 이렇게 되면....”
“어차피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은 것 아닙니까, 그의 인생 파일은.”
“.......”
“병으로 죽던, 살해당하던. 둘 중 하나입니다.”



예비자는 그녀를 처음 보는 순간 알았을 것이다. 딸기맛 사탕을 꺼내는 그녀의 손을 보는 순간 기시감 같은 것을 느꼈을 것이다. 대리의 ‘권능’이 발현되지 않더라도.

/ “내가 아는 누구랑 닮아서.”
“누구요?”
“... 첫사랑.” /

이미 오래전 한 번 해 봤던 상황이니까.

게다가 그는 어린 시절 처음 그녀를 생각했던 그 모든 감정들로만 20년 가까운 힘든 시간을 버텼다. 자신의 가슴 위로 올린 그녀의 손 끝에 닿는 크고 작은 흉터가 드디어 위로받는 기분. 이런 감정을 다 전달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외모를 좋아하는 그녀의 취향이 변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도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이 생의 행복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매일 아침 눈을 떴을 때 계속 심해지는 두통에 병원을 찾아간 것은 그녀를 만나기 불과 일주일 전.



/“내가 제일 처음에 만든 케이크는 오빠 줄게.”/

그녀를 만나지 않았다면 생애 미련 따위 없었겠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다.
하루만 더, 한 번 만 더....
그녀를 만날 때마다 여기까지 여야 한다고 그렇게 생각했지만 째깍이는 시계를 볼 때마다 그 순간이 너무 아쉬웠다.

그런 그의 감정과는 상관없이, 인간에게 가장 공평하지만 또 한 편으로 공평하지 않은 것이 시간이다.



“예비자의 인생 파일에 남길 중요한 시점을 분명하게 만들었으니 된 것 아닙니까.”



그의 큰 흐름은 분명히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다만 그의 선택에 따라서 마지막은 변수가 존재했다.

171713 대리는 소용돌이치는 예비자의 파일 속에서 그의 선택으로 변화되는 분명한 끝을 보았다.

그녀는 그의 삶에 최초이자 최후의 약점이 된다. 결국 그녀가 위험하지 않도록 헤어짐을 선택하지만, 이미 정해진 하나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그녀를 위험한 함정에서 구하고 죽는다. 그 마지막 선택으로 인생의 큰 흐름이 조금 더 짧아졌다. 점점 큰 흐름 하나로 뚜렷하게 소용돌이치는 그 속에는 예비자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모습이 선명하게 떠 있었다.


... 그 후의 일은 어차피 다른 부서의 업무 중 하나일 뿐이다.



“슬프거나 기쁘거나, 또 행복하거나 가끔은 비극적이더라도.”
“.......”
“첫사랑은 시작되고, 그 끝은 어차피 그들의 선택일 뿐이니까요.”



아주 오래 계속될 누군가의 슬픔을 막지는 못 했지만, 그의 마지막 미소는 지켜졌다.

/ [첫사랑 전형]과 기획팀 202117 대리 님의 업무 기안이 긴급 결재로 전환됩니다. /

어쨌든 이것은 상대자의 인생 파일이 아니라, 예비자의 [첫사랑 전형] 기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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