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와 세계, 0에서 1까지

| 어쩌면 당신이 가장 잘 아는 첫사랑

by Kidcat혜진

/ 원하던 원하지 않던 그 방향으로 흘러가는 무언가가 있다면 붙잡아 확인해봐야 합니다.
당신이 용기 내어 분명히 하고 싶은 그 순간이 온다면, 뜬금없는 무언가가 도와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



처음 한국에 올 때,
내 손을 잡으며 아주머니께서는 여러 가지를 당부, 아니 부탁을 하셨다.

우리 준이는 세상 물정도 어둡고, 사람 사귀는 걸 어려워하는 아이라서 유학 보내는 것도 걱정이 많다고. 그나마 어릴 때부터 가깝게 지냈던 너라도 같이 가게 돼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고. 가서 사기를 당하기라도 하면 어쩌냐며, 돈이 문제는 아니지만(절대로 돈이 문제 일리 없는 가문이니), 사람에 대한 믿음이 큰 우리 준이는 상처 받을지도 모른다고.

그런 걱정을 하던 아주머니에게 저기서 저러고 있는 녀석의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어서 보내 드리고 싶... 지만, 일단 충격이 크실 것 같으니 참아보자.



“야, 쉬면 안 되지!”
“가, 가!”



테이블 위에 저렇게 많은 빈병이 있는데, 또 새 소주를 까네.
아휴, 우리 준이 소주병으로 회오리도 만들 줄 알아요.
아주머니가 공부 열심히 하라고 보내준 유학비는 회오리처럼 돌고 있네.
하긴, 너네 집에서 가장 흔한 게 돈이니 그러려니 할게. 어차피 내 돈도 아닌데, 뭐.
그래도 우리 준이, 비싼 술 안 마시고 서민적으로 노는구나.



“마셔라, 마셔라~ 마셔라~마셔라~술이 들어간다~쭉~쭉쭉쭉~쭉~쭉쭉쭉~”



즐거운 K-컬처의 위대함이란.
1년 조금 지났을 뿐인데, 술자리 게임도 저렇게 잘하네.
발음도 정확해요, 누가 보면 한국 사람인 줄 알겠다.

양 팔을 흔들며 어린애처럼 좋아하는 저기 저 허우대만 멀쩡하고 잘생긴 얼굴을 보고 있으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언제나 그렇듯 술자리를 알고 오기는 했는데, 술 집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에 기가 막힌다. 이미 테이블 위에는 빈 병이 가득하고 새로운 안주가 나왔다. 끝나려면 한 참은 더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근처 피시방에 가 있을까. 어차피 난 술도 안 마시는데.



“어, 여기! 여기!”



늦었다. 조금 더 빨리 생각했어야 했는데. 어쩔 수 없이 술집 안으로 발을 들였다. 녀석의 한심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멀리 고향에 계실 아주머니 생각에 눈물이 앞을 가린다.

이런 녀석을 자식이라고 걱정하고 계시겠지. 아주머니, 준이는 아주 잘..., 잘 지내요.



“가자.”
“이거만 마시고 같이 가자.”
“이미 많이 마셨잖아.”
“오, 준이 여자 친구 또 왔네?”
“아니거든?”
“아니야, 아니야. 우린 그냥 고향 친구.”



이미 한 손에 든 술잔을 놓지는 못하고 다른 한 손으로 대충 해명의 손짓을 한다.
나도 늘 이런 식의 오해를 받아서 이제 기분 나쁘지도 않다. 한두 번이 아니니 그러려니....



“무슨 고향 친구가 술자리 에스코트까지 해주는 건데.”
“그 정도로 가까운 친구지. 부모님끼리도 아는 사이.”
“중국에서는 어릴 때 약혼도 하고 그런다던데, 그럼 너희도 그런 사이야?”
“아니라고, 글쎄. 우리는 그냥....”
“응, 그러기는 했지.”
“오, 진짜!?”
“아주 어릴 때, 부모님끼리.”



준이의 뜻밖에 발언으로 순식간에 오! 신기하다!라는 반응이다.
어느새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다시 술잔을 드는 분위기였지만, 나는 여전히 잠자코 서 있었다. 다시 게임하자, 아까 그거? 따위의 말들이 오고 간다. 스멀스멀, 인내심의 한계다. 처음부터 앉지 않기를 잘했지.



“이거만 마시고 가는 거였지?”
“어, 야, 야!”



준이의 손에 있던 술잔을 빼앗아서 얼른 들이켰다. 내 돌발 행동에 그 잘생긴 얼굴이 당황하며 나를 올려다본다. 아하, 이거 기분이 나쁘지 않네.



“지금 안 일어나면, 다음은 없어.”
“어.....”
“아주머니한테 전화해? 아직 안 주무실 것 같은데.”
“아니!”



협박 아닌 협박, 단호한 얼굴로 말하고는 그냥 등을 돌렸다.
마치, ‘이제 OO는 마트에서 살아. 엄마는 갈 거야.’를 한 기분이다.



“미안, 먼저 간다!”



그래도 효과는 즉각 나타난다. 뒤 돌아보지 않아도 얼른 쫓아오는 녀석을 알 수 있다.
결국 오늘도 무사히 귀가 중.
술집 주변 여기저기 있는 CCTV, 치안이 아주 훌륭한 한국이라 다행이다.
안 그랬으면 오늘 내가 저 녀석을 한대 쳤을지도 모르겠다.



-



1년 전의 나에게 돌아가 말할 수 있다면, ‘절대로 준이와 같은 오피스텔 건물에는 살지 말아라.’라고 한 마디 했을텐데.

유학 올 때 준이네 아주머니가 부탁했던 것도 있고, 어차피 아는 사람도 많이 없는 곳이니 가까이 살면 좋겠다는 아주 단순한 생각에서 그랬던 것뿐인데.... 1년 전의 나는 대체 왜 그랬을까. 그리고 1년이 지난 지금, 왜 아직도 나는 이럴까. 이 녀석이 술 마실 때마다 준이네 아주머니께서 부탁하셨던 그 말이 자꾸 내 발목을 잡는다.

홧김에 마신 술기운이 올라오기 전에 얼른 돌아가야겠다. 그렇지만 그전에.



“네가 자꾸 그런 말을 하니까 우리가 약혼한 사이네, 결혼한 사이네 하고 자꾸 이상한 소문이 나는 거잖아.”
“어릴 때 부모님이 약속하신 건 사실이니까.”
“그러니까, 너도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며. 의미도 없고 중요하지도 않은 사실을 남들한테 자꾸 이야기하지 말라고.”
“... 알았어, 알았어.”



내가 한국에 온 많은 이유 중 하나에 한국 남자와의 연애가 있었다.
어릴 때부터 본 한국 드라마가 큰 영향을 준 것인데, 1년이 지나도록 내가 가장 좋아했던 이민호 닮은 남자는커녕, 두 번째로 좋아했던 김수현 닮은 남자도 없었다. 아니, 사실 있다한들 지금 같은 상황이면 절대로 연애는 못하겠지. 이렇게 약혼자니 정혼자니 소리를 듣는 녀석이 옆에 있는데, 무슨....



“너 지난번에도 안 그런다고 하고서는 오늘 또 그랬.... 어? 어디 갔어?”



또 이런다. 무사 귀가 ‘중’이었지. 귀가 ‘완료’가 아닌 것을 잊었네.
자신의 세계에 금방 빠져드는 녀석은 어느새 내 이야기는 듣지 않고, 저기 서 있다. 뭐하냐.



“인형 뽑기? 애냐?”
“나 이거 완전 잘해.”
“아, 네. 또 얼마나 쏟아부은 거야.”



인형 뽑기에 푹 빠진 표정이 행복한 어린애가 따로 없다. 술을 그렇게 많이 마셨는데, 얼굴색 하나 안 변했네.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는 옆모습은 모델이 따로 없다. 아주머니네 아들은 참 잘생겼다. 그냥..., 잘 생기기만 했다.



“나 저거 뽑아줘. 잘 뽑는다며.”
“저거? 고양이 인형?”
“응.”



뽑은 인형은 없는데, 준이 주머니에서 현금은 계속 나간다. 끝이 없을 것 같아서, 목표 하나를 정해줬다.



“고양이 인형, 고양이 인형.”



집중하며 중얼거리는 잘생긴 얼굴을 멍하게 두고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역시 허우대만 멀쩡하다. 나의 어릴 적 약혼자는.
싫다. 술자리에서 계산할 사람이 필요할 때면 순진한 녀석을 부르는 사람들이.
싫다. 우리 사이를 자기들 마음대로 판단하는 사람들이.
싫다. 녀석의 겉모습만 보고 먼저 좋아했다가, 곧바로 실증 내는 여자들도.
정말 싫다. 이런 사이라도 그냥 뿌리칠 수 없는..., 나도.



“야, 그만 하면 됐어. 만원 넘게 썼으면 그냥 가자.”
“고양이 인형 뽑으면, 나 소원 하나 들어줘.”
“하아, 그래. 알았어. 대신 이번 판이 마지막이야.”



보지도 않은 채 대충 대답을 하고는 길게 한숨을 쉬는데, 갑자기 인형 뽑기 기계에서 뭔가가 덜컥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설마....



“자, 여기 고양이 인형.”
“어, 어....”
“이제 내 소원.”



진짜 고양이 인형이다. 제법 큰 인형을 얼떨결에 받고 녀석을 보니, 방금 전 웃음기 가득했던 표정이... 아니다.



“소, 소원이 뭔데?”
“이제 나 데리러 오지 마.”
“뭐?”
“엄마 부탁받고 그러는 거 알아. 그러지 말라고.”
“그거야, 네가 자꾸 술 마시고 늦게 들어가니까.”
“안 그럴게. 이제 안 그럴 테니까, 그러니까....”
“.......”
“의미도 없고, 중요하지도 않은 어릴 적 약혼자는 안 챙겨도 된다고.”
“.......”



빠~빰~ 빠~빰빰~~
인형 뽑기 기계가 갑자기 큰 소리를 내면서 울린다. 흠칫 놀라서 나도 모르게 고양이 인형을 끌어안았다.

황당함이 먼저였다. 그리고 곧바로 억울함, 뭔지 모를 깊이 눌러두었던 화, 그리고..., 서글픔까지. 여러 가지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뒤섞여 정리되기 전에 결국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그래, 알았어. 아주머니가 네 실체도 모르시고 너무 걱정스럽게 부탁을 하셔서 그런 거지. 누구는 뭐 좋아서 그런 줄 아냐? 미안하다, 미안해. 그렇게 귀찮아하는 줄 몰랐네.”
“그런 말이 아니라.”
“알겠어, 나도 이제 신경 끌게. 각자 유학 생활 잘하고, 무사히 귀국 하자.”



싫다. 마음에도 없는 모진 소리를 또박또박하고 있는 내가.
아무리 애정이 없더라도, 그래도 오랜 세월을 같이 지내온 의리는 있는데.
그래, 그런 거지. 의리..., 의리지.
그러니까 먼저 잘못한 건 이 녀석이다.
한 마디씩 모진 말을 내뱉는 순간에 이상한 감정들이 마구 밀려온다.

빠~빠~빠밤~~ 인형 뽑기 기계 음악이 갑자기 서글픈 피아노 소리처럼 들렸다.



“... 아까 술자리에 있던 애들 중에 하나가 너 소개해 달라고 하더라. 그런데 막상 그런 생각을 하니까 기분이 이상했어.”
“.......”
“맞아, 우리가 어릴 때 부모님끼리 약속했던 건 중요하지 않은 일이지.”
“......”
“네가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면, 어차피 그건 아무 의미가 없잖아.”



빰빰!!! 배경음악처럼 인형 뽑기 기계의 음악소리가 다시 울렸다.

빤히 쳐다보는 녀석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뭔가 대답을 바라는 얼굴이다.
대체 무슨 대답을 원하는 건데? 질문이 아닌 말을 해놓고, 나한테 무슨 말을 바라는 거야.

그리고 그 순간, 의리가 아닌 뭔가가 내 마음에서 튀어나왔다.

끌어안고 있는 인형이 제법 푹신하고 포근해서 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조금 전 객기로 마신 소주 한 잔의 취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아니면, 인형 뽑기 기계에서 내뿜는 싸구려 조명 따위에도 빛나는 이 허우대만 멀쩡한 녀석의 얼굴이 순간 이민호, 김수현보다 잘 생겨 보여서 일지도.

그것도 아니면, 아니면....



“... 없잖아.”
“응?”
“넌 나한테 물어본 적도 없잖아, 그리고 너도....”
“.......”
“너도 나한테 그런 거 말한 적 없잖아.”



원래 있었지만, 나만 몰랐던 건지도.



“그러니까, 틀렸어. 내 마음만큼 네 마음도 중요해.”



서로가 절대로 깨닫지 못했던 무엇인지도.

빠빰~~~ 바바바 밤!!!! 빰빰!!!!
경쾌한 인형 뽑기 기계의 음악과 함께 흠칫 놀라 다시 한번 고양이 인형을 끌어안았다.
그러니까 나는 너에게..., 지금 묻는다.



“소개해 줄 거야?”
“뭐?”
“아까 걔한테 나 소개시켜 줄 거냐고.”
“아니, 절대 싫어.”



그러고 보니, 생각났다. 어릴 때도 저런 표정이었다. 내가 다른 애들이랑 먼저 놀고 있으면, 저런 심통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 그랬지. 준이는..., 늘 그랬다.
그리고 난 정말이지..., 저 얼굴에 너무 약하다.



“그럼 너....”
“나는 너 좋아해.”
“.......”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약혼자는 아니라도 남자 친구로는 어떠냐고.”



내가 가장 잘 아는 얼굴로 저렇게 말한다.
지금 내 마음만큼 중요한 너의 마음은 그런 거였구나.
갑작스러운 진심은 간결하지만 우리 만의 긴 시간을 담고 있다.
막상 듣고 보니 가장 쉬운 길을 돌고 돌아온 기분이다.
그래도 마침내 도착해서 다행이다..., 그래서 안심이 되는 그런 기분.



“야, 지금 겨우 고양이 인형 하나 주고 고백하는 거야?”
“기다려 봐, 그럼. 다른 인형도 뽑아줄게.”
“됐어. 얼른 가. 그리고 나도 너 좋아.”
“응? 뭐라고 했어?”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네가 나 데리러 와.”



다시 인형 뽑기 앞으로 가려는 녀석을 겨우 막았다. 한 손으로 인형을 안아 들고 다른 한 손은 어느새 녀석에게 잡혀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꼭 나를 데리러 가겠다고 하는 그 얼굴이 제법 보기 좋다. 늦가을의 쌀쌀한 밤에 서로의 온기로 느낄 수 있는 따뜻함이란.

어쨌든 우린 지금 무사 귀가 ‘중’이고,
앞으로는 내가 이 녀석을 데리러 가는 일은 절대로 없을 테고,
이제부터는 허울뿐인 약혼자 관계가 아니라 실질적인 연인 관계로 지낼 수 있을 거 같다.

그리고 당분간은 준이네 아주머니께 거짓말 없이 전화할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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