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와 세계, 0에서 1까지

| 협조 공문과 일괄 상신

by Kidcat혜진




이동이 많아진 인간 세계에서는 최근 지부별 협조 공문이 잦아졌다.
더불어 인간 세계에서 한국의 인기가 높아질수록 한국 지부에 소속된 업무팀들은 바빠질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인생 파일 중 중요 시점이 한국 지부로 이관되는 일이 많아지면서 대리들은 여러 건의 다양한 기획을 해야 했고, [첫사랑 전형] 기획 팀도 마찬가지였다.

예를 들어 내가 겪고 있는 지금과 같은 상황도 발생한다.



“예비자와 상대자가 서로 같군요.”
“네. 그렇네요.”



중국 지부로부터 협조 공문을 받았을 때 그냥 업무 기안만 메시지로 전달할 것을 그랬다.
171713 대리가 먼저 업무 기안에 대한 협의를 제안했을 때, 예비자의 인생 파일에 문제가 생길 것이 걱정되어서 일단 제안을 받아들였다. 다른 지부의 협조 요청 사항이니 문제가 생기면 여러모로 곤란한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으니까.

블록처럼 연결된 자리에서 벗어나 171713 대리가 임시로 생성한 협의실에서 만나기로 했지만, 사실은 그때까지도 나는 지난번의 일로 뭔가 탐탁지 않았다. 인사만 간단히 나눈 후, 서로의 결재 전용 단말기를 가지고 두 개의 소용돌이치는 파일들 사이로 각자 담당하는 예비자의 인생을 한동안 살펴보았다.

171713 대리의 기획 예비자가 내가 담당한 기획의 상대자도 되는 상황.
인간 세계의 입장에서 본다면 서로가 서로를 첫사랑으로 둘 수 있는 어쩌면 가장 이상적인 상황이기는 한데, 하필이면 지금 171713 대리가 담당하는 예비자라니.



“흔하지 않은 경우네요.”
“흔하지는 않지만 전혀 없는 경우도 아니죠.”



감정이 전혀 담겨 있지 않은 대답이 돌아온다. 171713 대리는 여전히 애매모호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여성도 남성도 아닌 얼굴로 긴 머리는 하나로 묶고 있다. 나는 해바라기 잎으로 소용돌이 속에서 파일을 찾고 맡은 예비자의 파일을 살펴보고 여러 가지 병렬 협조 요청 소품을 정리했다.



“그래도 잘 되면...”
“최종 승인까지 가야 의미가 있죠. 그전까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건..., 그렇죠.”



역시 너무 껄끄럽다. 뭔가 몹시 불편하다. 신경 쓰고 싶지 않다. 얼른 업무를 끝내고 헤어지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애매모호한 인간의 형상을 한 그와 업무 외에 다른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건넨 말조차 전혀 예상과 다른 답변이 돌아온다. 그러니까 이제 업무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껄끄럽고 불편하다.

지난번 내가 담당했던 특이 전형 업무는 빠르게 처리되어 결국 최종 승인까지 이루어졌다. 긴급 결재가 진행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만약 그때 그 기안을 상신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 예비자의 인생 파일에 블랙이 남았겠지. 아니면 그의 인생 파일에 남은 시간이 조금은 더 길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만약일 뿐이다. 이미 다른 부서에서 업무가 진행된 상황이라면 더더욱 의미 없다.

맞다, 171713 대리의 말처럼..., 의미가 없다.



“[피아노]라. 이건 빼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하지만 지금 예비자와 상대자에게 가장 훌륭한 접점인데요?”
“가장 훌륭한 접점이라고 해도 지금 현재 상황에서는 좀 어울리지 않는데요. 인생 파일에서 보면 지금은 여기, 이 부분인데, 피아노는 아무래도 너무 개연성이 없네요.”
“하지만.....”



내가 담당하는 예비자는 현재 20대 초반의 여성이며, 한국으로 유학을 온 상황이고 어릴 적 약혼자와 함께 온 상태이다. 그리고 그 약혼자가 171713 대리가 담당한 예비자인 것이다. 돌고 있는 두 개의 소용 돌이 중 한쪽을 가리키며 171713 대리는 한 동안 아무런 말 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역시 아무리 봐도 적응이 안 되는 무표정이다.

개연성이라니, [첫사랑 전형] 팀에서 개연성이라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늘 가장 가깝고도 쉬운 인간관계나 소품, 상황을 활용하니까. 하긴, 그래서 타 부서의 대리들에게 틀에 박혀 있다 따위의 말을 들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나름의 최선을 다하는데....

171713 대리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허공 속 소용돌이에서 뭔가 정확하게 끄집어낸다. 그리고 한 참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나와 눈을, 아니 나는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해바라기 꽃이니 씨앗의 어딘가를 바라보다가 질문을 던졌다.



“담당 예비자의 파일 중에 주량이 있습니까?”
“네? 네. 술을 거의 못하네요.”
“그런데 1년 내내 술집 출입을 했네요.”



그 짧은 순간 자신의 예비자 외에 내 예비자까지 살핀 것이다. 하긴, 자신의 예비자에 상대자이기도 하니까 당연한 건가.


부서 이동 후 처음 맡은 업무에서 상대자의 영혼에 깃들어서 수행했다는 말을 들었다. 여러모로 특이하다. 아니 그보다, 내가 자신의 부서 이동 요청서에 대한 답신을 했던 장본인이라는 것을 알 텐데도 여태껏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는 것도 이 시점에서 생각이 났다. 아, 하필이면....



“그야, 약혼자를 데리러 가는 상황이니까요. 어릴 적부터 붙어 있던 친구잖아요.”
“친구, 친구라.... 약혼자에는 큰 의미가 없다고 했죠, 두 사람 모두 다.”
“어릴 적 부모끼리 맺은 연이니까요.”
“그래서 서로에게 가장 접점이 많은 예비자와 상대자가 된 거죠. 아주 ‘전형적’인 상황이군요.”
“그, 그렇죠.”



‘전형적’인 상황을 강조한 것 같은 건 기분 탓일까.

골똘히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던 171713 대리의 손이 기안서로 옮겨갔다. 그리고 몇 가지의 결재 요청 사항이 기재된다. 나와 동시에 진행하고 있던 기안서라서 단말기를 통해 새로운 여러 가지 필요 소품들이 차례로 나타났다.



“그래서 더 어려울 수도 있겠네요.”
“뭐가요?”



병렬 협조 사항으로 [술자리 게임] [소주 한 잔] [인형 뽑기 기계: 반복적 음향 오류] [고양이 인형] [기타: 선제 요청 사항 별도 기재] 나타난다.

그리고 정확하게 [선제 요청 사항 별도 기재] 아래에는 [선제 요청: 친구의 이별 후 버릇]이 덧붙어 있었다.



“상대방의 마음을 확인할 수도 없고, 자신의 마음을 확인하기는 더더욱 어려운 상황이라는 뜻입니다.”
“.......”
“익숙한 것들의 소중함은 가끔 떠나야만 알 수 있는 경우도 있죠. 그것도 아니면 빼앗겨 보거나.”
“아..., 아!”



둘의 공통점은 피아노. 내 처음의 기획은 피아노를 치는 예비자를 상대자가 보고 반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어릴 때부터 그런 모습은 서로 수도 없이 봤을 텐데. 별다른 감정을 느낄 수도 없을 테고, 숨어있던 자신의 마음을 깨닫기도 쉽지 않겠지.



“[술자리 게임]은 왜 필요한 거죠? 제 예비자는 술자리에 참석한 적이 한 번도 없는데요.”
“[술자리 게임]은 그냥 보여주기입니다. 어차피 202117 대리님의 예비자는 그 자리에 앉지도 않을 겁니다.”
“그럼 왜, 왜 필요한 거죠?”
“글쎄요. 일종의..., 기폭제 같은 거라고 해두죠.”
“기폭제요?”



171713 대리의 얼굴에 잠깐 장난스러운 미소 같은 것이 보였다가 사라진 것 같다. 아닌가, 기분 탓인가.



“권능은 딱 한 번입니다. 202117 대리님은 예비자에게 깃들어서 무의식 중에 딱 한 잔만 마시도록 개입해주시면 됩니다. 계기는 만들어 뒀으니 큰 변수가 없다면 아마 쉬울 거예요.”
“그럼 171713 대리님은요?”
“접점이 피아노라 하셨으니, 피아노 비슷한 무언가가 쓰이기는 해야겠죠.”
“네?”
“일단 이대로 기안을 올려서 상신 진행이 이루어지도록 하겠습니다.”



/ [첫사랑 전형]과 기획팀 171713 대리님 외 1인의 협조 업무가 시작됩니다.
요청하신 [술자리 게임] [소주 한 잔] [인형 뽑기 기계: 반복적 음향 오류] [고양이 인형] [기타: 선제 요청 사항 별도 기재]의 병렬 협조가 승인되었습니다.
[별도 기재 사항]을 확인 중입니다. [선제 요청 사항]이 승인되었습니다.
현재 171713 대리님 외 1인의 업무 기안은 일괄 상신 진행 중입니다.
최종 결재까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업무의 완벽한 수행을 기원합니다. /



171713 대리의 권능은 인형 뽑기 기계 앞으로 예비자의 발길을 옮길 때 발현되었다. 꼭 권능이 아니라도 171713 대리의 예비자 기질상 그건 절대로 그냥 지나칠 수 없었을 것이다.



/ 빠~빰~ 빠~빰빰~~ /

‘피아노 비슷한 무언가’ 라더니. [인형 뽑기 기계: 반복적 음향 오류]가 이렇게 쓰일 줄이야.



/ ‘빠~빠~빠밤~~ 인형 뽑기 기계 음악이 갑자기 서글픈 피아노 소리처럼 들렸다.’ /

인형 뽑기 기계에서 피아노 소리가 나올리는 절대로 없었다. 경박한 음이 반복적으로 흘러나오는 기계일 뿐이니까. 하지만 음향 오류처럼 기계가 내는 반복적 소리에 예비자의 진심이 한 마디씩 쏟아진다.



/ “... 아까 술자리에 있던 애들 중에 하나가 너 소개해 달라고 하더라. 그런데, 막상 그런 생각을 하니까 기분이 이상했어.” /

[기타: 선제 요청 사항 별도 기재] [선제 요청: 친구의 이별 후 버릇]

171713 대리는 예비자의 인간관계를 너무 완벽하게 파악했다.
예비자 친구의 이별 후 버릇이 소개팅 부탁이라니. 그의 기획은 빈틈없이 너무 완벽해서 나의 권능 발현이 크게 의미가 없다고 느껴질 정도다. 예비자의 영혼에 깃들어 있으니 많은 것이 느껴졌다. 닫혀있던 그녀의 다양한 감정들이 갑자기 빗장이 벗겨진 듯이 쏟아져 나왔고, 나까지 동화되어서 잠시 동안은..., 행복했다.

기어이 기획된 모든 것들이 이루어졌다. 윗윗윗선까지 진행 중이니 곧 최종 승인 결재가 이루어질 것이 분명하다.
이제 두 사람의 인생 파일에는 동시에 아주 중요한 시점으로 기재 되겠지.

...인정하기 싫지만, 171713 대리는 확실히 업무 수행 능력이 뛰어나다.




“수고하셨습니다.”
“네. 202117 대리님도 수고하셨습니다.”



업무를 마무리하고 인사를 나누고는 있지만, 그는 여전히 진행 중인 결재 창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



“저....”
“네.”
“지난번 그 업무는..., 최종 승인 결재가 되었습니다.”
“그렇군요. 잘 됐네요.”
“하지만 저는 제가 담당하는 예비자의 기획을 그런 식으로 진행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왜죠?”
“그야....”



애매한 인간의 얼굴을 한 171713 대리가 결재용 단말기에서 드디어 시선을 뗀다. 그리고 순식간에 다가와 해바라기 꽃잎 하나를 툭 떼어낸다. 아픔을 느끼는 건 아니지만,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것은 사실이었다.



“해바라기 형상을 하고 있는 이유가 있습니까?”
“네?”
“그냥 궁금해서요. 이런 형상으로는 파일 찾기도 비효율적이고 업무를 하기에 뭔가 편리할 것 같지는 않은데요.”
“........”
“202117 대리님은 0 번이 왜 대리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까?”



만지작거리던 해바라기 꽃잎을 허공에 띄우며 171713 대리는 장난치듯이 한 동안 꽃잎을 자유자재로 이동시켰다. 동그랗게 원을 그리기도 하고, 위아래로 움직이는 노란 해바라기 꽃잎은 장난감 같았다.



“그야, 인간 세계가 복잡하고....”
“예전에 저한테 보내신 메시지에서 이 부서에서 하는 일이 ‘선순환 고리’의 연결점이라는 말씀을 하셨죠. 틀에 박힌 [첫사랑 전형]을 기획하는 그런 단순한 일이 아니다,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은데요.”
“아, 그때 그 메시지는..., 네. 맞습니다.”



171713 대리는 내가 보낸 메시지를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역시, 아까 업무 중 ‘전형적’을 강조했던 건 기분 탓이 아니었나.
노란 해바라기 꽃잎이 점점 높은 곳으로 가더니 천천히 나풀거리며 날린다.



“저는 말입니다. 0 번이, 아니, 가장 윗선이 만들어놓은 계획에서 책임지기 싫은 부분을 우리에게 떠넘긴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럴 리가요. 우리가 하는 일은....”
“어쨌든, 요청하신 적도 없는데 202117 대리님의 업무에 손을 함부로 댄 것은 사과하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또 뵐 수 있으면 뵙죠.”



그리고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애매모호한 그의 얼굴에 잠깐의 웃음 같은 것이 보였다. 아니, 저건 비웃음인가....

그가 사라지자 곧 해바라기 꽃잎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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