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와 세계, 0에서 1까지

| 업무 중 휴식: 영혼의 비행장

by Kidcat혜진

육각형의 형태를 띤 끝을 알 수 없는 공간 안에는 대리들이 업무를 하는 블록이 펼쳐져 있고, 그런 육각형의 형태는 조금씩 공간을 두고 사이좋게 연결되어 있다. 생각나는 전체적인 형태는 인간 세계에서 본 벌집 모양 같기도 한데, 사실은 너무 거대해서 전체적인 모양이 둥근 구의 형태인지는 알 수 없다.

주변은 먼지 같이 생긴 것들이 부유하다가 어느 순간 육각형의 공간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것들은 업무 중 인간의 영혼에 깃들어있던 대리의 의식 같은 것인데, 시각적으로 봤을 때 썩 기분이 좋은 색감은 아니라서 먼지 같아 보인다.

인간들의 세계에서는 신체에서 빠져나간 영혼의 모습을 빛이나 밝은 색으로 표현한다던데.



“먼지라.”



171713 대리는 지금 육각형의 형태의 공간에서 벗어나 가장 꼭대기에 올라왔다. 꼭대기라고 하지만 위와 아래라는 개념이 없으니 꼭대기라는 말은 옳지 않을 수도 있다. 더 이상 머리 위로 육각형 모양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온 것인데, 그곳에서 바라보면 전체적으로 나선형으로 퍼져 있는 육각형의 공간이 복잡하게 얽혀있으며 비어있는 중심으로 바쁘게 움직이는 먼지가 보인다.

하지만 어떤 때 또 다른 곳에서 바라보면 정말 벌집 모양으로 보이기도 했다. 알 수 없는 공간. 형태가 있지만 형태가 없고, 존재는 하지만 형용할 수 없는.



“나 같네.”



지금 171713 대리의 발 밑에 그런 공간이 있다. 발 밑과 머리 위로는 여전히 뿌연 먼지 같은 것들이 날아다니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인간 세계에서 필요 없는 색감을 붙여 넣기 한 것 같다. 하긴, 0 번이라면 정말 그랬을지도 모른다. 인간 세계가 아니라면 관리자의 역할을 최소한으로 할 뿐이니까. 그리고 저 육각형 안에서 열심히 업무를 하는 대리들은 일벌 같다.

연수를 마칠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0 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어차피 졸고 있었으니 큰 감흥은 없었지만 마지막의 그 말은 아직도 기억이 난다.



- 잊지 마세요. 여러분의 존재 이유는 인간 세계를 위한 것임을.



존재의 이유와 목적이 완벽하게 같다는 것은 편리할 수 있다. 하지만....




“정말 그게 전부인가.”



가장 근본적인 의문이었다. 인간 세계를 만들었던 0 번의 의도를 여전히 모르는데, 그 알 수 없는 의도를 위해 존재할 뿐인 수단적 무언가라니.



“꼰대.”



인간 세계에서 배워온 그 말이 입에 감긴다. 표정은 짓지 못했지만 그 한 마디를 뱉고 나니 마음이 편해지는 기분이다. 인간의 영혼에 깃들어 있을수록 인간들의 감정을 많이 배우고 동화된다. 이럴 때는 욕이라도 하고 싶은 기분이다. 하지만 아직은 그 정도에서 참는다.

202117 대리와의 협업은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그래서 지금도 무사히 상신 진행 중이다.

두 개의 커다란 인생 파일의 소용돌이에서 성공적인 [첫사랑 전형]을 위한 아이템을 찾기 위해서 여러 가지를 보던 중 171713 대리는 그들의 가능성 파일들을 살펴봤다.

큰 흐름의 파일에 그 들 중 하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된다. 중요한 점은 그건 개인만의 성공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공적인 그의 성장은 인간 세계 전체에 영향을 줄 정도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데, 그가 남긴 연주가 여러 세대에 전해져 이후 ‘선순환 고리의 연결점’이 된다. 몇 세대 후의 일은 중요하지 않다고 해도 그는 분명히 유명 인물로 생을 마감할 것이다.

하지만, 분명 그 들 중 ‘하나’였다. 게다가 그 결말의 시발점은 [첫사랑 전형]과 연결되어 있었다.

예비자와 상대자를 매칭 하는 것은 기획팀 대리들의 업무지만, 협조 공문으로 왔을 때 그들 둘은 매칭이 되어 온 상황이었다. 202117 대리는 공문을 보낸 지부에서 이미 매칭을 한 상황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171713 대리는 그 예비자와 상대자가 어릴 때부터 약혼자였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타지부의 대리에게 메시지로 문의한 결과 자신들은 그저 공문을 넘겨준 것 외에 한 일이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가장 전형적인 상황.”



그게 신경 쓰인다. 그런 상황을 보통은 인간 세계에서 우연 혹은 인연이라고 하겠지만, 이 세계에서 우연이나 인연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202117 대리는 예비자와 상대자의 선택이 쉽도록 도와주는 정도가 업무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예전에 자신처럼. 대부분의 다른 대리들도 그렇게 생각하면서 업무를 할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게 전부라면 처음부터 개입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인간 세계에서 그들의 선택이 쉽도록 조금의 ‘용기’나 ‘계기’를 만드는 것이 [첫사랑 전형] 팀 대리의 일이라면, 그건 그들의 선택을 돕는 것이 아니라 선택으로 등을 떠미는 것은 아닐까.

기획이 아니었다면, 그래서 그런 선택으로 등을 떠밀지 않았다면 그들은 다른 선택의 결말을 맞을 텐데. 하지만, 절대 그럴 수 없도록 이미 만들어진 가장 큰 흐름은 주변에 흩어져있는 가능성 파일을 끌어당기고 소멸시키는 것 같았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이 필요 없다고 판단되는 것들을 하나씩 지우는 것처럼.

171713 대리는 202117 대리의 업무에 손을 댄 것에 대해 사과했지만, 사실 미안함은 전혀 갖지 않았다.

첫사랑은 결국 시작되고 그 끝은 어차피 그들의 선택일 뿐이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그 말의 반만 진실이고, 반은 거짓이다. 202117 대리가 기획했던 모든 상황을 밀어내면서까지 우연을 가장한 그 예비자의 인생 파일이 기다린 것. 처음부터 맺어져 있던 인연, 171713 대리는 결국 그 상황까지 가도록 한 무언가가 있었다고 생각했다.

처음은 그저 근본적인 ‘의문’ 일뿐이었지만, 반복되는 낯설지 않은 상황은 그런 ‘의문’을 점점 키워서 결국 ‘의심’으로 번졌다.



“결국은 그렇게 되도록 선택을 종용할 뿐이라면 우리가 하는 일은 인간을 위한 게 아니라..., 0 번의 계획을 위한 거잖아.”



지금 상신 진행 중인 협조 업무도 사실 상대자의 인생 파일 중 가능성 파일의 끝까지 보았기 때문에 마음에 걸린다. 그들 중 ‘하나’가 위대한 음악가가 되겠지만, 그들 중 ‘하나’는 분명히 [첫사랑 전형]에서 기획한 선택으로 인해 가능성 파일 중 하나가 완전히 소멸되었다. 그 소멸된 가능성 파일에는 아름답게 피아노를 치는 노인의 모습이 있었다.

하지만 소멸된 파일의 주인은 이제 노인이 될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뛰어난 재능을 가졌지만 요절하는 인간은 너무나도 많다. 죽음이 마음에 걸리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누군가의 죽음이 남아있는 인간의 인생에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이 거슬린다. [첫사랑 전형]의 기획에 따라 서로를 선택하여 행복한 시간을 보낼 그들의 인생 파일은 [영원한 사랑] 과의 기획팀으로 문서가 이관되었다. 그것도 ‘긴급’으로.

[영원한 사랑]까지 최종 결재 승인이 진행된다면 이들은 죽을 때까지 서로만을 바라본다. 그중 하나가 생을 다한다고 하더라도.

[영원한 사랑]과 [한 명의 요절], 그리고 후대에도 세계적으로 남을 [위대한 음악]까지.



“대본이 너무 완벽하잖아.... 꼰대.”



살아남아 생을 살아갈 인간에게는 너무나 가혹할 수 있는 인생 파일이다. 당장의 선택이 행복이라도 그것은 진정으로 그들이 원하던 인생일까. 하지만 이런 근원적인 생각을 하기에는 너무 업무를 완벽하게 처리해 버렸다. 171713 대리는 업무 결재창을 계속 바라보면서 어쩐지 놀아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어이구, 누가 계셨네요.”



떠다니던 먼지 하나가 내려앉는 것 같더니 곧 모습이 드러났다. 171713 대리는 고개를 돌리며 결재용 단말기를 빠르게 눈 앞에서 치웠다.

내려선 모습은 평범한 중년의 남성이었다. 가벼운 점퍼 차림에 어디서든 볼 수 있는 바지를 입고 단화를 신고 있었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옷을 입은 채로 물에 빠졌는지 흠뻑 젖은 그의 몸에는 계속 물방울이 떨어졌다. 그리고 두 눈은 한 참을 운 것인지 시뻘겋게 부어올라 있었다.



“아, 방해했다면 미안합니다. 인간 감정에 동화되어서 이 모습에서 빠져나오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네요.”
“괜찮습니다. [죽음] 과에서 일하시는군요.”
“네, 저는 주로 [사고사]만 전담하는 기획팀에 있습니다.”



인간 영혼에 동화되었던 대리 중 하나지만, 그의 모습은 다른 팀과는 확실히 달랐다.



“비행장에서 다른 팀 대리는 만나기 힘든데, 반갑네요.”
“여기가 비행장이었군요.”
“저희 팀에서는 그렇게 부릅니다. 이상하죠? 비행장이라니. 업무를 마치고 돌아올 때 익숙한 지점 중 하나일 뿐인데, 뭔가 그런 말을 붙이고 싶었나 봅니다.”
“힘든 업무였나요?”
“그렇죠. 죽음은 대부분이 고통이니까요. 하지만 이번 업무는 정말이지..., 좀 그렇네요. 이런 모습에서 빠져나오기 힘들 정도로.”



중년의 남자는 다시 두 눈이 빨갛게 변하더니 눈물이 주르륵 나온다.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은 너무 서러운 표정이라 기괴하게 보였다.



“인간의 영혼이 무척 고통스럽게 마감했나 보군요.”
“그런 영혼의 고통을 반 정도는 저희가 가져가야 생을 완벽하게 마무리하고 소멸할 수 있죠.”
“절 반이라. 듣던 대로 다 가져갈 수는 없나 보군요.”
“인간의 영혼이 완전히 소멸할 수 있도록 돕는 에너지가 고통이니까요. 죽고 싶을 만큼의 고통이라고 하잖아요.”
“그렇군요.”



다른 부서의 대리들은 [죽음]과의 일을 잘 모른다. 아니, 사실은 다른 부서의 일 자체를 궁금해하지 않는다.

대충 알려진 바로는 인간이 생을 마감할 때 [죽음] 과에서 대리들은 기획된 업무에 따라서 영혼에 깃들어 그 자신이 담당하는 영혼의 고통 중 절반을 나눠가진다. 그리고 무사히 인간의 영혼이 소멸할 수 있도록 돕는다. 하지만 처음부터 고통을 덜어줄 권능이 있다면 전부 다 가져가 주는 편이 인간에게는 더 좋지 않을까. 영혼의 소멸이야 새로운 시스템으로 0번이 만들면 그만인 것을.

0번은 정말이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시스템을 만든 걸까.



“안식과 같은 편안한 죽음이라면 고통이 없지 않습니까.”
“아, 그런 경우도 종종 있지요. [죽음] 과에서도 [안식]만 전담하는 기획팀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팀도 업무가 어렵죠.”
“그런가요?”
“소멸의 에너지는 고통에서 오는데, 에너지로 사용할 인간의 고통이 없으니 대리들은 자신의 역량으로 소멸시켜야 하거든요.”
“그렇군요. 그런 시스템이군요.”
“이건 비밀인데....”



갑자기 슬쩍 다가온 죽음 부서의 대리는 171713 대리의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였다.



“[안식]만 전담하는 기획팀이 가끔은 고통을 저장하기 위해 다른 팀의 업무를 돕기도 합니다. 소멸의 에너지를 끌어내려면 어쩔 수 없죠.”
“쉽지 않은 일이네요.”
“어느 부서든, 어느 팀이든 쉬운 업무는 없지요.”
“... 과연, 그렇네요.”



불편하면서 어려운 업무다. 이런 목적을 알 수 없는 시스템과 조직을 왜 만든 걸까. 그냥 인간의 생이 다하면 고통이나 안식 중 하나로 끝내고 소멸시키면 될 일이다. 일부러 대리들의 업무를 위해 만든 조직이 아니라면, 굳이.



“그나저나, 이번 동화는 너무 오래가네요. 역시 고통이 너무 컸어요.”
“아직도 모습의 변화가 없네요. 익사였나요?”
“익사였죠. 하지만, 그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이 있었습니다.”
“... 털어놓고 싶으신 거군요.”



[죽음]과의 대리는 인간의 형상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고, 두 눈에서는 계속해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들어드릴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업무는 이미 수행했으니, 기밀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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