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일 열람: 예비자의 친구
담담한 표정으로 듣고 있던 171713 대리는 예비자의 인생 파일을 보자고 했다.
202117 대리는 자신의 단말기를 펼치고 기안에 표시된 예비자의 인생 파일을 열람 모드로 바꿨다. 가능성 파일들과 함께 가지런하게 소용돌이치는 인생 파일을 바라보던 171713 대리는 한 곳을 응시하다가 202117 대리에게 상대자의 파일을 펼쳐 보라고 했다.
/ [열람 제한 파일] 입니다. [열람 승인 요청] 을 먼저 하시기 바랍니다. /
역시 같은 지시 사항이 나타났다. 171713 대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물었다.
“[열람 승인 요청]을 먼저 하라는 말은 요청하면 들어줄 수도 있다는 뜻으로 들리는데요.”
“그럴까요? 하지만....”
“하지만 메시지의 내용으로 봐서는 그런 요청을 반길 것 같지는 않네요.”
“그렇죠?”
“그렇다면 우회하는 방법을 찾아야죠.”
“우회하는 방법이요?”
“예비자의 인생 파일에서 기획안의 내용을 한 번 볼까요?”
분명 기획안의 내용으로는 첫 만남의 순간에 [첫사랑 전형]이 시작된다. 그전까지 예비자의 인간관계에는 없던 인물이다.
“적당한 햇살과 일기장.... 병렬 협조 사항도 애매하군요.”
“상대자의 인생 파일을 전혀 모르니까, 지금은 이후의 관계 발전도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가 없어요.”
“[첫사랑 전형]이 시작된다는 것 외에는 예측해서 손 쓸 수 있는 부분은 없네요.”
171713 대리는 1 대리가 202117 대리에게 보낸 메시지를 여러 번 살피며 곱씹었다. 그것이 힌트 따위를 주지는 않겠지만, 그래서 조금 더 오기 같은 것이 생겼다.
다른 ‘대리’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윗선’이라 이건가. 여차하면 ‘편법’ 조차도 사용할 수 있다는 거고. 그래 봤자 같은 직함을 쓰는 주제에.
메시지에서는 예비자의 그 순간 감정만 증폭시키면 이후의 일은 자연스럽게 진행될 거라고 했다. 그렇다면 기획안은 이전까지의 관계보다 이제껏 예비자의 인생에 없었던 상대자가 등장한 이후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렇게 ‘필수불가결’한 상대자의 등장이 예비자에게 계획된 인생 파일의 큰 흐름에도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고도 했다.
뭔가 이상하다. ‘필수불가결’한 첫사랑이지만 예비자의 인생 파일에는 [첫사랑 전형]의 중요한 시점으로 기재된 후 별다른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꼭 열람 제한이 걸린 이 특별한 상대자여야 하는 이유는 뭘까.
“예비자의 인생 파일에 기재될 [첫사랑 전형]이 중요한 건 아니라는 뜻인데....”
“네?”
“예비자보다 중요한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뜻입니다. 예비자의 인생 파일을 조금 더 자세히 당겨주시겠습니까?”
“어, 네.”
171713 대리는 천천히 소용돌이치는 인생 파일 중 한 곳을 지그시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제가 202117 대리님의 예비자 파일을 직접 살펴봐도 될까요?”
“네?”
그제야 202117 대리는 171713 대리가 자신의 예비자 파일을 한 번도 직접 꺼내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이 것은 매우 정중한 요청이었다. 그전에 있었던 사건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여전히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얼굴은 그저 답을 기다리기만 했다. 자신이 먼저 찾아와 도움을 요청하기는 했지만 어쩌면 당연한 질문이다. 다른 대리가 기획한 예비자의 인생 파일을 함부로 손대는 것은 업무 예절이 아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171713 대리가 지난번 자신의 기획안에 함부로 손을 댄 것은 그 순간 자신이 너무 곤란해 보여서 그랬던 것은 아닐까. 곤경에 처한 자신을 일부러 돌발 상황을 만들어 구해준 것은 아닐까.
“아, 네. 괜찮습니다.”
“그럼, 몇 가지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허락이 떨어지자 171713 대리는 정확하게 응시하던 한 곳의 파일을 꺼내서 펼쳤다. 빠르게 넘어가는 파일을 응시하는 눈은 고정되어 있었다.
역시, 아니다. 그냥 이 대리는 이상한 거다.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202117 대리는 그가 보는 파일을 함께 열람했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은 인간관계 파일이었다. 부모와 형제 관계, 친구와 선후배 관계까지 빠르게 지나갔다. 그러다가 문득 한 페이지에서 멈추었다.
“..., 찾았다.”
순간, 202117 대리는 옆에 서 있는 171713 대리가 기이하게 웃는 표정을 보았다. 섬뜩하게 웃던 그의 표정이 어느새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예비자의 친구군요.”
“지금은 예비자 중심으로 형성된 관계이니 예비자 중심으로 만들어진 기재사항입니다. 그리고 여기....”
“아..., 이 사람이 상대자인가요?”
“친구의 먼 친척..., 이군요.”
상대자의 파일 열람은 제한되어서 일부 기재된 기본 사항만 확인했었다. 공개된 기본 사항에는 성별과 나이, 한국이 아닌 국적과 이름만 있었다. 예비자의 옛 기억 속에 상대자의 모습은 당연히 없으니 겉모습조차 알 수 없었는데, 기재된 기본 사항 만으로 연결고리를 찾아낸 것이다.
“어떻게 아신 거죠?”
“이건 예비자 중심의 인생 파일입니다. 친구의 먼 친척은 별로 중요한 사항이 아니죠. 하지만 이렇게 기재되어 있다는 건....”
“중요해질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거군요.”
이어진 202117 대리의 말에 171713 대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자의 파일 열람은 제한이 되었지만, 예비자의 인간관계 파일까지 제한을 둘 수는 없었을 테니까요.”
“예비자의 가장 가까운 곳부터 살펴 먼 곳까지 보신 거군요.”
“앞으로 일어날 일을 전부 알 수는 없지만, 예비자와 가까운 인간관계에서 힌트를 더 얻을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런데....”
“뭐가 또 이상한가요?”
171713 대리는 예비자의 친구 파일에서 잠시 무언가를 살피더니 다시 상대자의 기본 사항을 바라보며 물었다.
“먼 친척이라면, 어디까지를 말하는 걸까요?”
“글쎄요. 친척의 개념은 조금씩 다르니까요.”
“분명한 건..., 상대자는 예비자 친구의 진짜 친척은 아닐 겁니다. 친척이라고 알고 있는 건 예비자의 시선일 뿐이죠.”
“네?”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는 202117 대리를 아랑곳 않고, 171713 대리의 손이 바쁘게 무언가를 더 찾기 시작했다. 열람 가능한 것은 역시 지금 눈 앞에 있는 예비자의 파일밖에 없다. 작게 혀를 차며 171713 대리는 예비자 친구의 간략한 사항들을 확인했다. 그래도 예비자와 친한 편인지 제법 기재된 사항들이 많았다.
한 참을 시선이 빠르게 움직이던 171713 대리는 문득 뭔가를 깨달은 듯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예비자 친구를 가리키며 말을 이어 나갔다.
“이 예비자의 친구 말입니다. [첫사랑 전형] 계획이 상신 진행된 적이 있었습니다. 자동으로 기결 처리되었지만.”
“아주 어릴 때요?”
“네, 그리고 그 상대자가..., 202117 대리님의 예비자와 같은 상대자입니다.”
“아니,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아시죠? 지금은 예비자의 친구일 뿐인데, 그런 상신 진행 상황까지 나와 있을 리 없는....”
202117 대리는 문득 말을 이어나가지 못했다. 어느새 171713 대리의 등 뒤로 단말기 창이 펼쳐져 있었고, 그곳에는 분명 다른 과의 상신 진행 상황이 보였기 때문이다.
“아직 인수인계가 덜 끝나서, 지난 팀의 권한이 제게 있거든요.”
“그, 그럼....”
“한쪽만 ‘편법’을 쓰는 건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이건 사실 ‘편법’도 아니고요. 그냥 조직의 시스템적 허점을 조금 이용하는 것뿐이죠.”
171713 대리는 일상적인 업무를 이야기하듯 말했지만, 인간처럼 어깨를 으쓱하며 한쪽 눈을 찡긋한다. 뭔가 통쾌한 것 같아 보였다.
“예전에 제가 상신했던 기획이 있었는데, 갑자기 생각이 나서 잠깐 열어 봤습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 아직 처리가 안 되어서 열람이 가능하네요. 아주 드문 유형이어서 기억이 납니다. [유예] 상황이었거든요.”
“[유예] 요?”
“[영원한 사랑] 과에서는 [유예]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까지 한 번도 실제로 본 적은 없었죠. 그 지시 사항이 단말기에 떴을 때 윗선에 질문하니, 말 그대로라고 했습니다.”
“[유예]라면 일정 시간 뒤로 미루는 건가요?”
“네, 이상 했죠. 한 건이라도 더 업무를 수행해서 최종 승인 결재까지 이뤄야 하는 팀에서 [유예]라니.”
171713 대리의 결재 전용창에서 예비자의 친구가 아닌, [영원한 사랑] 과 기획의 예비자로서 인생 파일이 열렸다. 조금 전 보다 더 방대한 양의 파일들이 소용돌이치듯이 나타났다. 202117 대리의 예비자 파일이 간결하고 단정한 느낌이라면, 171713 대리가 열람한 파일은 뭔가 응집된 덩어리 같아 보였다. 폭풍우 속에서 또 다른 폭풍우를 만난다면 이런 느낌 일까.
“[첫사랑 전형] 과 계획이 아주 어릴 때 진행되었지만 기결 처리되었죠. 어릴 때였으니까요. 하지만 한 번 더 상신이 진행되었습니다. 그것도 우리 팀에서.”
“[영원한 사랑] 과 기획이었다는 말입니까?”
“게다가 기결되었던 [첫사랑 전형] 기획의 상대자와 같았죠. 그 상대자가 바로 [열람 제한 파일]의 주인.”
“상대자가 [첫사랑 전형]과 [영원한 사랑]의 기획으로 올라왔다는 건..., 확실히 친척은 아니겠네요. 그럼 그때는 상대자 파일을 열람하셨나요?”
“어땠을 것 같으세요?”
/ [열람 제한 파일] 입니다. [열람 승인 요청]을 먼저 하시기 바랍니다. /
두 대리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분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뭔가..., 있다.
“지금 생각이 났는데, 그때도 이 문구를 본 적이 있었네요. 같은 파일인지는 몰랐지만.”
“막다른 길이네요, 또.”
“막다른 길이 같은 건 우연은 아니겠죠. 한 가지는 확실하네요. 이 모든 기획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이 모든 기획의 중심은 202117 대리의 해맑은 예비자가 아니다.
예비자의 첫사랑은 그저 [열람 제한 파일] 의 주인을 위한 과정일 것이다.
그 [열람 제한 파일] 의 주인을 위해 예비자는 가장 아름다운 첫사랑을 할 수밖에 없다.
자신이 아닌 그저 그 첫사랑을 위한, [열람 제한 파일] 의 주인을 위한 어떤 장치.
하지만 예비자는 그 사실을 절대로 모를 것이다.
그저 찬란하고 아름다운 첫사랑을 하게 되겠지.
누군가의 [첫사랑 전형]을 기결 처리하게 만들고,
[영원한 사랑] 기획마저 [유예]로 처리할 수밖에 없으며,
‘편법’까지 동원하게 만드는 이유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지부의 ‘일반 대리’ 따위는 알면 안 되는 무언가가 본사에서 진행되고 있다.
“어쩔 수 없네요. 일단 예비자의 인생 파일에 영향을 주는 건 절대로 아니라고 했으니 업무는 수행해야죠.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 네, 그렇군요. 다음에 뵙겠습니다.”
202117 대리는 예상외로 순순히 수긍하는 171713 대리의 대답에 의아했지만, 이내 고개를 숙이고 공간을 끌어당겨 사라졌다.
171713 대리는 202117 대리가 사라지자, 자신의 [유예]된 기획안을 다시 꺼냈다. 그리고 이내 결심한 듯 손을 움직였다.
“그럼, 어쩔 수 없이..., [열람 승인 요청] 을 해야겠군요.”
/ [열람 제한 파일]의 [열람 승인]을 [요청] 합니다.
... 171713 대리님의 [요청]이 윗선에 접수되었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