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람 제한 파일
/ [첫사랑 전형]과 기획팀 202117 대리 님의 업무가 시작됩니다.
요청하신 [날씨: 적당한 햇살] [기타 소품: 일기장] 의 병렬 협조가 승인되었습니다.
현재 202117 대리님의 업무 기안은 상신 진행 중입니다.
최종 결재까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업무의 완벽한 수행을 기원합니다. /
“응?”
202117 대리가 업무 기안서를 올리려고 결재전용 창을 열었는데, 자신이 기획하지 않은 것들이 저장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상신이 진행 중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단말기를 건드린 것일까. 절대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 더 기이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윗선.
당황하지 않은 척하며, 일단 기획된 예비자의 소용돌이 파일 속에서 삶의 전반을 훑어본다. 기획된 예비자의 인생 파일은 너무..., 깨끗했다.
그는 해맑음과 순수함, 그리고 빛나는 인생으로 압축해서 표현할 수 있었다. 자신의 꿈을 오래도록 지켜온 소년은 힘든 순간들을 잘 이겨내어 결국 그 꿈을 이루고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가수가 된다. 이후에도 자신의 원하는 모든 것들을 이루다가 적당한 시기에 편안하게 삶을 마감한다.
주변의 인간관계는 너무나 원만하고 좋은 관계들 뿐이다. 인간 세계에서 이런 괜찮은 인생을 살 수도 있구나, 싶을 정도로. 이상한 부분은..., 없다. 단 하나도.
다만, 이 예비자의 [첫사랑 전형] 기획에 대한 내용이 아무것도 없다가 누군가가 슬그머니 던져 놓은 듯 갑자기 자신의 기획으로 등장한 것이다. 자신이 손대지 않은 채 자신의 이름으로 상신 진행 중인 업무 기안은 병렬 협조 조차 너무 단조로울 정도로 가볍다.
그런데 왜..., 왜 하필이면 나지?
해바라기 꽃잎이 잠시 작동을 잊은 듯 멈춰버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예비자의 파일들을 살피고, 상대자의 파일을 찾아보려던 순간,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것이 등장했다.
/ [열람 제한 파일]입니다. [열람 승인 요청] 을 먼저 하시기 바랍니다. /
“이게..., 뭐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지시 사항에 어리둥절해하다가 혹시나 하는 생각에 퍼뜩 업무용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새 메시지 하나를 발견했다. 202117 대리는 메시지의 가장 위에 떠 있는 이름을 보고 놀라서 벌떡 일어나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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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내는 이: 1 대리]
안녕하십니까, 202117 대리님.
갑작스러운 상신 중인 업무 기획으로 많이 당황하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기안은 제가 직접 만들어 대리님의 이름으로 상신하였습니다.
저는 [첫사랑 전형] 과 소속이 아니라서 [첫사랑 전형] 과 관련 기안서 자체를 상신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꼭 필요한 부분이라서 어쩔 수 없이 조금의 ‘편법’을 사용해야 했습니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아주 급하게 진행된 사안임을 감안해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202117 대리님의 업무에는 큰 변동 사항이 없을 겁니다.
평소대로 [첫사랑 전형] 기획에 맞는 업무를 수행하시면 됩니다.
병렬 협조 사항도 많이 없는 관계로 그저 그 순간 영혼에 깃들어 예비자가 가진 감정을 증폭시켜주기만 한다면 아주 자연스럽게 진행될 겁니다.
다시 한번 알려 말씀드리지만, 예비자의 첫사랑은 업무 파일에 기재된 그대로만 진행하시면 됩니다.
불합리한 조치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예비자의 인생 파일은 평온함 그 자체입니다.
갑작스럽게 진행된 사항이지만, [첫사랑 전형] 과의 업무 진행 상황이 인생 파일의 큰 흐름에는 전혀 영향을 주지 않을 테니 염려는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 그리고 상대자의 파일 열람 제한에 의아하실 겁니다.
기밀사항이 첨부되어 있는 관계로 지부의 일반 대리님들에게는 열람 제한이 되어 있으니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예비자의 첫사랑이 상대자인 것은 ‘필수불가결’ 사항입니다.
그러니 이번 [첫사랑 전형] 기획은 상대자보다 예비자에게 온전히 집중하여 진행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부디 예비자의 첫사랑이 잘 진행되어 그의 인생 파일에 아주 중요한 시점으로 무사히 기재되었으면 합니다.
마지막으로 업무의 진행이 정상적인 경로가 아니었던 점에 대해 한 번 더 너그러운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그럼 항상 사랑이 가득하시고, 기적과 권능이 함께하길 기원하며
본사 - [총괄 본부] 전략 기획팀 1번 대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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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7 대리는 예비자의 인생 파일과 상신 진행 중인 기안서를 뚫어져라 보았다. 다시 봐도 조금 있으면 영혼에 깃들어 업무를 수행해야 한다. 이것은 자신의 이름으로 작성되었으니까. 하지만,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열람 제한 파일]이라니.
‘상대자보다 예비자에게 온전히 집중하라’ 는 문구가 상대자에 대한 쓸데없는 관심을 끄라는 이야기로 받아들여졌다.
상대자가 어떤 인물인지도 모르고 예비자를 [첫사랑 전형] 으로 이끌 수는 없었다. 그건 자신이 이제껏 믿어왔던 업무의 목적과는 전혀 다른 방향이다.
이미 정해진 상대자, 필수불가결 사항....
‘저는 말입니다. 0 번이, 아니, 가장 윗선이 만들어놓은 계획에서 책임지기 싫은 부분을 우리에게 떠넘긴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문득 이 상황에서 불편하게 느껴졌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뭔가가 거슬린다. 불편하다. 그것도 아주 많이.
해바라기가 춤을 추듯 흔들리다가 잎은 어느새 인간의 손으로 변했다. 이윽고 202117 대리의 모습은 얼마 전 기획했던 여자의 형상으로 변했고, 변화된 그 모습으로 허공의 어느 한 지점을 손으로 짚어 이내 어딘가의 공간을 잡고 끌어당겼다. 그 공간에는 자신이 지금 찾는 이가 있을 것이다.
곧장 202117 대리의 눈 앞에 인간의 형상이지만 여전히 뭔가 기시감이 느껴지는 그의 모습이 드러났다. 단말기 창을 유심히 보면서 소용돌이치는 인생 파일을 살피던 그의 눈이 이윽고 202117 대리에게 향했다.
“171713 대리님.”
“아..., 202117 대리님. 그런데 오늘은 해바라기가 아니군요.”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합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만..., 바쁘시지 않다면요.”
“바쁘지 않습니다.”
단말기 창을 접으며 누군가의 인생 파일도 사라졌다.
여전히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저 얼굴이 불편하지만, 지금 자신의 업무를 위해서 도움을 요청할 대리는 눈 앞에 있는 이가 유일하다는 것은 확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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