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와 세계, 0에서 1까지

| 당신의 첫사랑은 그 순간 어디쯤

by Kidcat혜진

/ 그 순간, 당신의 마음이 누군가에게 닿지 않더라도..., 비록 그 마음이 누군가에게는 중요하지 않더라도 괜찮습니다. 결국 언젠가 이 소중함이 어딘가에 닿을지도 모른다는 그 마음 자체만으로도 이미 충분합니다. 어쨌든 당신의 그 시작은 중요하니까요.... /



오늘 연습하면서도 내내 멍했다.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하고...., 이상했다.
일기 쓰는 것도 오랜만인데, 어딘가에 말하기도 뭐해서 이렇게라도 써 본다.
이건 절대로 누가 보면 안 된다.
연습 내용 써야 하는데, 이런 거나 쓰고 있다니.
데뷔하려면 더 열심히 집중해서 연습해야 하는데.
아니, 아니다.
전에 심리 검사했을 때 이렇게 자기감정을 잘 정리해 보는 것도 중요하다고 했으니까.
.
.
.
연습실 가기 전에 햄버거나 빨리 먹고 들어가려고 했는데, 누군가가 길을 물어봐서 돌아봤다.
그리고 그때 발견한 거다. 나의 운명, 나의 이상형.
그때까지도 나는 내가 긴 머리를 좋아할 줄은 몰랐다.
짧은 단발에 예쁘고 동그란 얼굴을 한 귀여운 인상의 여자애가 이상형인 줄 알았다.
그때까지는 그런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긴 머리를 쓸어 넘기며 내게 묻는 얼굴은 갸름했다.
눈매가 길면서도 반달형의 예쁜 눈이었다.
렌즈를 한 건지 눈동자 색은....
아니, 잠깐만..., 내가 이렇게 정확하게 기억한다고?
짧은 순간 그런 것들이 머릿속에 확 들어오다니, 정말 내 이상형이 맞는 것 같았다.

그녀는 대뜸 반말로 ‘여기 어떻게 가?’라고 묻길래, 어버버 거리다가 주소를 보니 익숙한 건물 주소가 적혀 있었다.



“우리 회사....인데.”



예비 연습생인가? 오디션 보러 오는 건가? 이번에는 오디션 소식 못 들었는데, 따위의 생각이 오가다가 일단 길 안내가 먼저인 것 같아서 따라오라고 말했다. 그런데 걷다가 돌아봤더니 주춤거리면서 경계심 있는 얼굴로 나를 보는 것이 아닌가.



“아, 내가 여기 다녀서 잘 알아... 요. 우리 회사에 혹시 오디션 보러 가는 거... 예요?”
“..., 아니.”
“아, 그래... 요.”



나이를 정확하게 모르니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다시 애매한 반말도 존대도 아니게 말을 했지만 별로 개의치 않는 눈치다.
일단 조금 떨어져서 나를 따라오는데, 그녀의 그림자가 제법 길었다. 그래도 키 차이는 딱 이상적....
그런 망상의 나래를 펼치다가 어느새 회사 앞까지 왔는데, 건물 앞에서 걸음을 멈춘 그녀가 난감한 얼굴을 지었다. 그리고 그제야 내가 미더워 보였는지 다시 쪽지 하나를 보여주었다.



“혹시 얘 알아?”
“어, 어!?”
“연락처를 받았는데, 잃어버렸어. 여기 주소밖에 없어서. 나는..., 친척이야. 멀리서 왔어.”
“아, 아!”



아까는 낯설지 않은 주소였는데, 이번에는 익숙하고도 반가운 이름이 적혀 있었다.



“연습실에 가서 보고 와 있으면 알려줄게. 잠깐만,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응.”



건물 안으로 뛰어들어 가 사무실 스태프 분들에게 얼른 인사를 하고, 연습실이 있는 지하로 내려갔다. 바글거리는 애들 사이로 늘 보이는 얼굴 하나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야, 야!! 누가 너 찾아왔어. 친척이라던데, 빨리 나가봐. 연락처 잃어버려서 주소만 가지고 있다고, 여자던데....”
“여자?”
“어, 한국말을 잘 못하는 것 같기도 했고, 아! 멀리서 왔다고....”



의아한 얼굴로 바닥에 앉아있던 녀석은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뭔가 생각났는지 후다닥 뛰어나갔다. 일단 연습 시간이 시작된 건 아니지만 스태프에게 사정을 대충 이야기하고 나가야 할 텐데 그냥 나가버려서 결국 남아있던 내가 설명해야 했다. 그 친척과 어떻게 된 건지 궁금했지만 나까지 같이 나갈 수는 없었다.

조금 있다가 다시 들어온 녀석한테 바로 묻기도 애매해서 연습 마칠 때까지 기다리다가 결국 어떻게 된 건지 물었더니, 멀리 미국에서 공부 중인 친척이라고만 대답했다. 그리고 동갑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아, 정말 다행이다. 연상이라도 상관없기는 하지만, 뭐....

왜 이걸 적고 있는데 자꾸 웃음이 나는지 모르겠다.
그 얼굴이 자꾸만 아른거려서 오늘은 잠을 자기 힘들 것 같다.
내일 아침에 학교 가려면 일찍 일어나야 하는데....
친척이면 한국에 잠시 놀러 온 걸까? 그런데 왜 하필이면 멀리 미국에 살까.
아, 몰라. 그렇게 멀리서 사는 그녀가 이렇게 내 앞에 나타난 것만 봐도 정말 운명일지 모른다.
게다가 내가 친하게 지내는 그 녀석과 친척이라니.

자꾸 웃음이 새어 나온다.
어떻게든 연락처 알아내야지.
아니, 좀 부담스러우려나.
아니다. 이럴 땐 직진이라고 우리 아빠가 그랬다.
좋아하는 건 일단 좋아해야지.

큰일이다.
웃음이 멈추질 않고,
마음은 싱숭생숭하고,
그녀의 얼굴은 자꾸 떠오르고.
.
.
.
-
.
.
.
오늘은 꼭 일기를 써야 한다.
그녀를 드디어 다시 만났다!!! 무려 1주일 만이었다.
그동안 녀석에게 그녀에 대해 물었지만 긴 답변을 듣지는 못했다.
공부를 잠시 쉬는 중이라서 한국에 왔고, 오래 있지는 않을 거라는 슬픈 소식 정도만 들었다.
연락처를 알아내는 것은..., 포기했다. 사실은 모르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나도 정말 중요한 시점이니까....
그냥 그녀를 알게 된 것만으로도 행운이라고 그렇게 정리하려 했는데.

그런데 오늘 오전에 녀석이 그녀와 함께 어머니 선물을 사러 간다는 말을 들었다.



“..., 너도 같이 갈래?”



그 말이 얼마나 반갑던지.
평소에 말수가 많지 않았던 녀석이라 그 말을 해주니 더 고맙기도 했다.
사실 그동안 나 혼자만 친한 사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닌지 좀 의심하고 있었으니까.
아무튼 이로써 두 가지가 모두 해결되었으니 얼마나 기쁜 일인가.
그녀도 만나고, 녀석과 내가 친한 사이라는 사실도 증명되었으니까.

일주일 만에 만난 그녀와 백화점으로 가서 선물을 고르고, 같이 햄버거를 먹었다.
셋이서 동갑이니 말을 편하게 해도 되냐니까, 어깨를 으쓱하더니 그냥 웃는다.
그 환한 웃음이 정말이지 너무 시원하게 느껴졌다.

아, 그녀는 정말이지..., 내가 좋아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보통의 한국 학생들은 뭘 하면서 노느냐고 물어서 자주 가는 PC방에 가려는 녀석을 붙잡고 말렸다.
절대로 내가 게임을 못해서가 아니었다. 하지만 결국 갔다. 그녀가 궁금하다고 해서.
그 녀석만 신나서 여러 가지 게임을 하는데, (지만 잘 났다.)
그녀와 나는 그냥 옆에서 구경만 하다가 가장 쉬운 레이싱 게임을 같이 했다.
‘재밌어?’라고 물으니 그녀는 활짝 웃으며 ‘처음 해 봤는데, 재밌다.’라고 이야기해서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PC방에서 나와 즉석 떡볶이를 먹으러 갔다.
그것도 처음 해보는 일이라고 했다.
신기한 얼굴로 음식 사진을 찍던 그녀는 갑자기 녀석과 내가 나란히 앉아있는 쪽으로 카메라를 들어 사진을 찍었다.
그러고 보니 미국에서 뭘 공부하는지 몰라서 물었더니, 미술 공부를 한다고 했다.
예술가라니. 정말 멋지다.

우리는 나중에 유명한 가수가 될 거라고 말했다.
녀석은 조금 쑥스러운 얼굴로 내 팔을 툭 쳤지만, 나는 전혀 쑥스럽지 않았다.
그건 어차피 진짜 이루어질 미래니까.
내 확신에 찬 얼굴에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럼 해외 투어 콘서트 할 때 미국도 오라고, 그러면 자신도 보러 가겠다고 했다.



“에이, 그때는 우리 콘서트 표 구하기 정말 힘들지도 몰라. 그러니까 우리가 널 초대할게. 진짜 꼭 보러 와야 해, 알았지?”



크게 웃는 내 옆에서 녀석은 이상하게 웃지 않았다.
쑥스러워서일까, 아니면 아직도 우리의 미래가 불안하다고 생각해서일까.
하지만 그녀는 싱긋 웃으며 그러겠노라고, 꼭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헤어질 때 그녀에게 연락처를 묻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나중에 어른이 되면, 그 미래에도 그녀에 대한 이 감정이 그대로라면 당당하게 묻고 싶었다.

이로써 나는 오늘 내 꿈을 이뤄야 하는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나는 꼭 내 꿈을 이뤄서 유명한 가수가 되고, 또 해외 투어를 가야 한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 그녀가 있는 곳으로.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이렇게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처음이니까.
하지만 이때의 마음을 이렇게 여기 남겨두면 언젠가는 닿지 않을까 싶은..., 그런 이상한 기분이 든다.

어쩌면 이런 마음이나 기분도 어느 순간 사라지고 어른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의 내가 느끼는 이 모든 순간들을 기록해 두고 싶다.
순식간에 지나간 것 같은 그녀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 언젠가 내가 부르는 노래가 되고, 내가 표현하는 춤이 될지도 모른다.

사라질 것들은 사라지겠지만, 영원한 것은 또 영원하니까.
아....
내가 지금 뭐라고 쓰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그냥..... 폭발할 것 같은 이 주체 못 할 감정이 얼마나 갈지 나도 궁금하다.
.
.
.
- 몇 년 후
.
.
.
오랜만에 이 일기장에 그녀에 관한 이야기를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나의 첫사랑인 그녀는 정말 멋진 화가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 콘서트에도 진짜 왔다.
미국 투어는 아니었지만, 일본에서 하는 가장 큰 콘서트에 녀석의 가족들과 함께 초대되어 온 것이다.
예상은 했지만 여전히..., 아니, 그때 보다 더 예쁘고 아름다웠다.
그 시원하고 맑은 웃음을 보이면서 축하한다는 인사를 담은 카드를 적어 나에게 꽃도 주었다.
녀석과 내가 이렇게까지 유명한 가수가 될지 알았냐고 묻자, 당연히 알았다고 했다.
자신이 아주 오랫동안 정말 간절하게 기원했으니까, 당연하다고.

와..., 그녀도 나의 꿈을 응원했다고 생각하니 뭔가 마음이 이상했다.

그리고 용기 내어 그동안 절대로 묻지 않았던 질문을 했다.
연락처 알려줄 수 있느냐고,
이제 난 네게 직접 안부를 묻고 계속 연락도 하고 싶다고.

깜빡거리는 두 눈동자가 나에게 한 동안 고정되었다.
잠시 어딘가를 바라보더니 이윽고 선선히 내 손에 자신의 핸드폰을 내어주는 그녀의 모습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였다.
오늘은 정말이지 잊을 수 없는 날이다.
.
.
.
-... 어느 날, 그녀의 집 앞
.
.
.
데려다준 매니저형이 그랬는데, 그녀가 사는 이 동네는 엄청 부자 동네라고 했었다.
딱 봐도 높은 담장이 많고, 간혹 울타리 너머로 잘 정돈된 정원들이 보이는 동네였다.
외국 드라마에서 보던 커다란 대문 앞에서 큰 장미 꽃다발을 들고 그녀를 기다렸다.
갑자기 나타난 내 얼굴을 보고 놀랄 그녀를 생각하니 가슴이 너무 두근두근거렸다.
그녀는 뭐라고 할까, 어떻게 왔냐고?
아니면,... 자신도 보고 싶었다고?
빠르게 뛰어오는 발소리, 대문이 열리기는 했지만 나는 계속 꽃다발로 얼굴을 가린 채 서 있었다.
멀리서 들리던 그 소리 가까이 왔을 때.

꽃다발을 내리는 순간,
눈 앞에 있는 그녀의 환한 웃음이 흔들린다.
흔들리던 웃음은 기어이 사라지고,
웃음이 사라진 그녀의 얼굴에 잠깐의 당혹감이 스치고,
이윽고..., 그 자리에서 천천히 무너져 내린다.

내 소중한......, 첫사랑.
나의 멋지고 어여쁜 그녀가..., 그렇게 무너지고 무너져서....
얇은 어깨를 떨면서 웅크린 채 울고 있다.
꽃다발에서 자리를 잃은 장미꽃잎 한 장이 그녀의 머리 위로 살짝 떨어진다.

어찌할 바를 모르던 내가 마른침을 삼키며 그저 서 있다.
한 참을 무너져 있던 그녀가 천천히 비틀거리며 일어나 눈물을 닦는다.
뭐가 미안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미안해’라는 말을 겨우 꺼낸 그녀는 더는 말을 잇지 못한다.
닦아도 닦아도 계속 흐르는 눈물에 결국...,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녀를 안아주었다.

문득 그녀의 이 슬픔을 거둬줄 수 없다는 사실이,
이 눈물을 멈추게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는 사실이 슬프고..., 미안하다.
울고 있는 그녀를 달래줘야 하는데, 나까지 울게 될 것 같다.

어쩌면 이 감정은 몰랐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첫사랑은 하지 말아야 했을지도 모른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그녀를 알게 되어서 이렇게 된 것일까.
모르는 것 투성이라서....
지금 나는 그저 이렇게 울고 있는 그녀를 안아주는 것 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
.
.
-

매거진의 이전글세계와 세계, 0에서 1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