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누엘 노이어의 스위핑 = 전술의 유연화
NBA의 전설, 코비 브라이언트는 지난 2011년 한국 방문 당시에 열었던 유소년 농구 아카데미에서 수비의 정의를 이렇게 내렸다.
"수비란, 공격수를 공격하는 것이다."
이 말에는 몇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공격수에 대한 적극적 압박을 주문하는 뜻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수비가 바로 공격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수비한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공수 전환을 위해서는 단순히 잘 막는 것만이 수비가 아니다. 수비에서 공격으로 유려하게 전환하게 하는, 일명 빌드업이 중요하다. 공격을 위한 공격적인 수비, 그것은 공격과 수비의 단일한 원리를 뜻하며 공격과 수비 사이에는 어떤 불가침의 경계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공격과 수비의 경계를 지우는 토탈 사커는 분명 오랜 역사를 지녔다. 하지만 토탈 사커의 경계에 골키퍼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얘기가 조금 달라진다. 최후방 수비수가 공수의 경계를 파괴한다는 인식은 축구계에서도 쉽게 받아들이기가 다소 어색하다. 지금도 축구 경기 현장에서 골키퍼가 패널티 박스에서 계속 멀어지거나 발재간을 부리기라도 하면, 감독들의 불호령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골키퍼의 발재간 자체가 기행으로 여겨지던 시절이 불과 20여년 전이다.
그런데 이러한 경계 파괴를 실제로 보여준 이가 있다면, 그이가 이 시대 최고의 골키퍼라면, 그 파괴에는 적지 않은 의미가 부여된다. 골키퍼는 골문을 지키는 데에만 치중해야 한다는 사람들의 인식에 변화가 생기고, 나아가 어떤 전술의 변화를 도입할 여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독일 축구를 대표하는 골키퍼, 마누엘 노이어가 특별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마누엘 노이어를 스위핑 골키퍼라고 부른다. 수비수와 골키퍼 사이의 공간을 지키며, 골키퍼까지도 보호하는 포지션인 스위퍼 (Sweeper) 역할까지 한다고 해서 붙여진 별칭이다. 노이어가 바이에른 뮌헨 입단 전인 샬케 04 시절부터 스위핑 골키퍼를 한 것은 아니었는데, 독일 대표팀과 바이에른 뮌헨이 스페인의 점유율 축구를 벤치마킹하면서 전체적인 선수들의 위치를 공격적으로 끌어올렸고, 필연적으로 넓어지는 뒷공간을 지키려면 골키퍼의 활동량이 필요했다.
노이어의 손이 아닌 발이 이 때부터 진가를 발휘했다. 수비 뒷 공간이 비어있는 상태에서 롱 패스가 날아오면 박스 밖으로 지체없이 뛰쳐나가 막았는데, 노이어의 퍼스트터치가 웬만한 중앙 수비수보다 탁월한 수준이다 보니 군더더기 없는 수비와 공격 전환이 가능했다. 게다가 한쪽 발만 쓰는 다른 골키퍼와는 다르게 양발 모두를 쓰다 보니, 어떻게 공이 날아와도 안정적인 터치와 패스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의 패스나 킥은 단순히 걷어내는 게 아니었다. 전방의 필드 플레이어의 발이나 머리로 정확하게 착륙했다는 게 핵심이다. 펩 과르디올라가 바이에른 뮌헨 감독으로 부임했던 첫 시즌인 2013-14시즌에는 무려 93%의 패스 성공률을 자랑했고, 2014-15시즌에도 86%의 패스 성공률을 기록했다. 웬만한 딥 라잉 플레이메이커의 전진 패스보다도 훨씬 우수한 기록이다. 골키퍼가 후방에서 안정적인 패스를 건네주니, 수비수와 미드필더들이 마음놓고 라인을 끌어올릴 수 있다.
많은 축구 팬들이 2010년 이후에 바이에른 뮌헨이 영입한 필드 플레이어들을 주목하는 경향이 강하지만, 지난 10년 간 뮌헨이 성사시킨 최고의 영입은 노이어의 영입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2011년에 노이어가 들어온 이후로 바이에른 뮌헨은 분데스리가 우승 8회, DFB 포칼 우승 4회,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 1회 등 우승 트로피를 쓸어담기 시작했다. 노이어가 후방을 지키면서 뮌헨의 뒷공간이 안전해진 것은 물론, 다른 팀들보다 더 공격적인 패턴 전개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스위핑 골키퍼의 등장은 전술적으로 의미가 있다. 골키퍼는 골문만 지켜야 한다는 편견을 깼으며, 스위핑 골키퍼 덕분에 후방 공간 사수와 빌드업을 효율적으로 전개할 수 있게 됐다. 효율적인 빌드업은 공격과 수비의 유연한 전환에서 한 단계 나아가, 수비와 공격의 경계를 허무는 효과를 지닌다. 더구나 그 빌드업 지점에 스위핑 골키퍼가 있다면 효과는 두 배다. 굳이 중앙 수비수나 풀백이 수비 위치로 돌아가기 위해 뛰어갈 필요가 없기 때문에, 체력 소모를 아낄 수 있으니까.
노이어라는 사례가 등장하면서, 골키퍼와 발 기술 사이의 먼 거리가 가까워졌다. 수많은 축구 구단들이 골키퍼의 역할을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필드 플레이어와 골키퍼의 역할을 무조건 분리해야 한다는 관념이 깨졌으니, 전술의 시작점에 대한 고민의 폭이 넓어진다. 골키퍼에게 일종의 금기와도 같은 패널티 박스 경계선 때문에 생겼던 제약도 희미해졌다. 야구에서 쉬프트가 도입되면서 야수의 위치 개념이 바뀌듯, 축구에서도 골키퍼가 뛰쳐나오면서 포메이션 개념을 재고해야 하는 순간이다.
전술의 변화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지만, 가장 결정적 요인은 포지션 파괴다. 전술의 변화가 포지션 파괴를 유도하기도 하지만, 포지션 파괴가 전술의 변화를 이끌어내기도 한다. 노이어가 지난 10년 간 보여준 스위핑의 역사는 10명의 필드 플레이어가 뛰는 축구의 개념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