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내일 죽는다 해도 괜찮을 것 같아.
채도가 다 빠져나가 밑그림만 남은 듯한 너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다 큰 어른의 골격 속에 유폐된 작은 소년은 어째서 제 몫의 시간을 다 쓰기도 전에 문을 걸어 잠그려는 걸까.
푸른 빛의 얼굴들이 밀려와 제 몸을 짓이긴다. 바다의 가장자리, 고운 뼛가루가 된 파편들은 기어이 지상으로 투신한다. 높게 뜬 태양 아래 산란하는 그 파편들은 제 형체를 남김없이 으깨어 다시 거대한 푸름 속으로 돌아간다. 자신을 지우는 일에 어떠한 망설임도 없는 그 무심한 소멸이 경이로웠다.
모든 다정한 것들은 사라짐을 전제로 한 슬픈 예보와 같았다. 첫눈이 오던 날 엄마가 만들어준 자그마한 눈사람이 녹아서 사라질까 봐, 냉동실에 넣어 두고 가는 계절을 붙잡으려 했다. 자라며 더 많은 부재를 통과해야 했다. 전날부터 미리 울어버렸던 초등학교 때 가장 친했던 친구의 전학, 여전히 가슴 저릿한 할아버지의 부재, 그리고 누구 하나 죽은 사람처럼 울었던 생애 첫 이별까지.
어른스러움으로 무장하고 싶었던 치기 어린 상실의 기록은 그랬다.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 그 애 앞에선 입술이 터지도록 틀어잠궜다.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뒤돌아서서 그 애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걸었다. 약속이나 한 것처럼, 눈보라가 몰아쳤다. 뺨에 내려앉은 차가운 눈송이는 눈가에서 낙하한 뜨거운 눈물과 섞여 지상으로 흩어졌다. 그것은 내가 기억하는 가장 시린 소멸의 풍경이었다.
불을 만지는 대장장이는 뜨거운 감각에 무뎌지고, 얼음을 나르는 사람은 찬 감각에 무뎌진다. 무엇을 잃고 정리하는 일에 대해, 대체 언제쯤 의연하고 무심해지는 걸까. 나는 다섯 살 꼬마처럼 그 감각을 대하는 일에 서툴다.
파도는 부서져도 다시 거대한 푸름으로 돌아가지만, 나는 부서질 때마다 날카로운 조각이 되어 내면을 찔러댔다. 서툰 몸짓으로 상실을 피하려 할수록 상처가 깊어지는 시기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은 계속되었다. 몇 번의 경험 끝에 조금은 덜 울게 되었다. 상처의 결을 따라 또 다른 생의 무늬가 돋아나 나를 붙들어주었다.
종말은 거대한 해일처럼 몰려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가 나누는 농담 사이의 미세한 침묵, 마주 잡은 손바닥에서 서서히 빠져나가는 온기 속에 조용히 침전되어 있었다. 너의 '괜찮다'는 말 뒤에 숨은 미세한 균열을 나는 읽어내고야 말았다. 그것은 나에게만 들리는 작은 파열음이자, 너를 보내지 못하는 단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죽어도 괜찮다는 너의 덤덤함 끝에 밀려오는 푸른 슬픔을 나는 바다처럼 기다려주기로 했다.
그러니 널 절대 놓지 않을 거야. 파도가 다시 바다로 회귀하듯, 나의 중력은 너를 이 찬란한 지상의 온기 속으로 붙들어 올거야. 숨이 막히는 어둠 속에서도 새벽은 기어코 창틀의 먼지를 들춰내며 우리를 깨우고야 말더라. 밤새 짓물렀던 어제의 슬픔이 딱지처럼 떨어져 나간 자리에, 염치없이 돋아난 새살 같은 하루는 다시 맥박이 뛰어. 어제 우리를 덮쳤던 어둑한 밀물이 밤새 잦아든 자리에, 다시 살아가야 할 이유들이 잘게 부서진 윤슬처럼 반짝이며 밀려올거야.
그러니 어떤 모양으로라도, 부서진 뒷모습일지라도 내 곁에 있어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