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재가 발생하였습니다!
밤 11시쯤이었다. 아주 짧은소리를 들은듯했다. 기세 좋게 터진 함성을 누군가 싹둑 잘라버린 듯한 느낌, 혼자였고 잘못 들었다 생각했다. 그 후 인터폰이 울렸다. 관리실에서 화재감지기에 붉은빛이 보이는지 확인하는 내용이었다. 화재감지기가 정확히 어떤 모양으로 어느 곳에 몇 군데 있는지 몰랐다. 천정에 붙어있는 전등을 제외한 모든 것들을 확인했다. 붉은빛이 깜빡거리거나 켜져 있는 곳은 찾을 수 없었다. 관리실 직원은 다시 붉은빛이 보이면 연락해 달라고 했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비상벨이 울리고 화재대피 유도 방송이 급박하게 쏟아져 나왔다.
화재가 발생하였습니다. 신속히 대피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화재가 발생하였습니다!
경보기가 울리고 다급한 대피방송이 거실 벽에서 튀어나왔다. 방금 전까지 모든 것을 쓸어버리겠다는 듯 성난 황톳물을 비추는 재난특보방송을 보고 있었다. 아직도 멈추지 않은 비가 창문을 긋고 있는데 화재라니 믿을 수 없었다. 비현실적인 외침은 어서 화재경보 시 취해야 할 다음 행동을 하라고 등을 떠밀었다.
남편은 저녁 모임에서 마신 술로 깊은 잠에 빠져있었고, 엄마는 보청기를 빼고 30분 전쯤 누었다. 남편은 불러도 대답이 없었고, 엄마는 벽을 뚫을 것 같은 경보음과 방송에도 반응이 없었다. 안방과 엄마방을 번갈아 확인한 후 현관문을 열었다. 바로 엘리베이터 옆 소화전에서 쇠를 두드리는듯한 경보음이 집안으로 밀려들어왔다. 그러나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고 불이 났다는 낌새는 어디에도 없었다.
몇 번을 깨우고 나서야 남편은 일어났고, 화재경보기 소리에 허둥댔다. 집안 어디에도 화재의 낌새는 없었고 현관문을 열고 내다보아도 아무런 일이 없었다. 다시 경보음이 사라졌다. 술 취한 남편과 혼자 걸을 수 없는 엄마와 아홉 살 강아지를 데리고 어떻게 대피를 할 것인지 고민은 안 해도 될듯했다. 관리실에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았다. 아마도 집으로 올라오고 있는 모양이라고 기다려보기로 했다.
잠시 후 관리실 직원이 올라왔고 우리 집과 옆집 모두를 점검하고 나서, 원인은 비가 많이 와서 습기로 인해 생긴 경보기 오작동으로 보인다고 했다. 그사이 또다시 경보기가 울리고 날카로운 대피명령이 쏟아져 나왔다. 관리실 직원은 밤새 경보기가 멈췄다가 다시 울리기를 반복해서 우리도 관리실 직원도 잠을 못 잘지도 모르니 아예 화재 감지기를 모두 빼놓자고 했다. 화재감지기 다섯 개를 모두 제거했다. 그제야 고요가 찾아왔고 나갔던 정신도 돌아왔다.
관리실 직원이 돌아가자 남편은 자기가 일어났을 때 옷장 앞에서 뭐 하고 있었느냐고 물었다. 그때 나는 머리와 손 연결회로에 버그가 생긴 듯 옷걸이에 걸린 옷들 사이를 뒤적이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찾으려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곁에 온 남편이 뭐 하느냐고 물었지만 화재, 관리실, 옷... 띄엄띄엄 단어만 나열하고 있었다. 우습게도 민소매만 입고 있는데 관리실 직원이 올라올까 봐 강아지를 안은 채 겉에 걸칠 옷을 찾는 중이었다. 자다 말고 깬 남편에게 관리실에서 인터폰이 왔고, 화재경보기가 울리고, 대피하라는 외침이 들리고, 당신과 엄마는 딴 세상에 있고... 설명하느라 애먼 손은 겉옷을 찾질 못한 채 바보처럼 허둥대고 있었다. 화재발생, 대피라는 목소리가 집안을 들썩이고 있는 정글같은 상황에서.
혼자 걸을 수 없는 엄마와 술 취한 채 잠든 남편, 그리고 아홉 살인 강아지를 데리고 화재가 난 아파트에서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실 실제 불이 나지 않았다는 것은 현관문을 열어보고 관리실 직원에게서 온 인터폰으로 알 수 있었지만 벽에서 튀어나오는 급박한 목소리는 실제 상황인 것처럼 나를 정글로 몰아넣었다.
14년 전, 1종보통운전면허를 땄다. 하지만 호기롭게 등록을 했으나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어떻게 하면 학원을 안 갈 수 있을까 하고 없는 이유를 찾았다. 2종보통면허를 신청할걸 왜 굳이 1종을 택해서 스틱 기어변속에 애를 먹고 있나 스스로 한심했다. 학원 연습장안에서 '돌발'과 '가속구간'이라는 외침이 들리는 순간 평온했던 가슴은 북소리가 나는 정글로 변했다. 방망이질해대는 긴장 때문에 손과 발은 질서를 잃어버리곤 했다.
이쯤 해서 돌발이, 정확히 여기서 가속구간, 이렇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평온한 운전면허연습장 내에서 현실감 없는 '돌발' 짧은 비명과 같은 외침이 귀에 전달이 되면 가슴은 콩닥거렸다. 하지만 운전면허학원 출석일수가 늘어갈수록 '돌발'의 '돌'만 들려도 오른쪽 발은 급하게 브레이크를 잘도 밟았다. 실제 시험 볼 때쯤 되니 두근거림은 여전했지만 급브레이크를 밟고 다시 출발하는데 자연스러워졌다. 그러나 가속구간은 코스연습기간이 거의 끝나갈 즈음까지 애를 먹였다. 자주 기어변속 중 시동이 꺼지기 일쑤였다. 2달 후, 결국 돌발과 가속구간이라는 예정된 사건에 대한 훈련을 통해 무사히 운전면허를 따냈다.
이번 일을 계기로 비록 화재경보는 감지기 이상으로 인한 것이었지만 실제 화재가 발생했더라면 내가 얼마나 우왕좌왕했을지 알 수 있었다. 화재경보기 이상으로 경보기가 제거된 상태에서 실제 불이 나면 어떤 상황이 생길 수 있을까 하는 끔찍한 생각까지 해보았다. 돌발과 가속구간이라는 생길 수도 있는 변수에 대하여 훈련과 연습을 통해 무사히 운전면허를 땄듯이, 언제 닥칠지 모를 재난에 대비한 대피훈련과 대비책을 알아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전부터 뜨거운 여름을 이겨보고자 서랍장과 책장 찬장등 장이란 장을 모두 들쑤셔 쓸데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물건들을 버렸다. 최선의 정리는 버리는 것이었다. 대신 아이들 유초등시절 어버이날이나 생일이면 주던 손 편지, 우리 청첩장( 이것은 친구가 자신의 물건정리 중 발견했다며 내게 돌려준 것이었다) 등은 다시 작은 서랍 한 칸으로 들어가 추억뭉치가 되었다. 그리고 보험증권과 등기도 다시 파일칸에 정리했다. 임대아파트에서 내 집이 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아 국세청에 취득세 소명자료까지 제출해야 했던 과정이 담긴 서류뭉치도 손으로 파쇄과정을 거쳐 쓰레기통에 넣었다. 몇 되지 않는 반지와 목걸이 팔찌도 한 곳에 모아 반짝 반짝이라는 라벨지를 붙여놓았다. 혹여라도 아무런 말도 없이 사라질지도 모를 비상사태를 대비한 일이었다. 화재경보가 내게 일으킨 생활정리였다.
오늘 밤 다시 폭우경보가 떴다. 다시 천변 조형물이 떠내려가고 다리 위로 곧 올라올듯한 황톳물이 화면 위로 하루에 몇 천 번의 낙뢰가 있었다는 뉴스가 속보로 올라왔다. 기후위기로 인한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은 내게도 언제 위기상황이 닥칠지도 모르는 두려움이 온다. 티브이 화면 하단에 폭우경보와 대피방법에 대한 자막이 떴다. 또박또박 읽어본다.